사람과 삶   지평을 넓히는 방송대인

그는 오늘도 배수로를 깊게 판다.

단감 밭의 물 빠짐이 좋지 않으면

명품 단감을 얻을 수 없는 것처럼,

지식기술을 전수하지 않으면

명품이 될 수 없다.

 

단감 익는 계절이 돌아오면 한의사들이 울상을 짓는다는 옛말도 있죠.” 김영기 동문은 각종 비타민과 무기질이 풍부한 단감은 예부터 한약재로 각광받을 정도로 영양소 덩어리라며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는다. 최상급 단감을 키워내기까지 농부의 손은 쉴 수가 없다. 그래서인지 대한민국을 통틀어 6명밖에 안 되는 단감 마이스터를 만나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방송대에도 단감 마이스터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농학과를 졸업한 김영기 동문은 10여 년 전부터 단감 장인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한때는 극단적인 생각까지 했다던 그가 어떻게 장인의 반열에까지 오르게 되었을까?

 

그냥 열심히만 하면 망한다고 

차마···, 어린 남매가 눈에 밟히더라고요.”

창원 출신인 김영기 동문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에 나가 여러 직종을 전전하다가 사업을 벌였다. 잘 되는 것 같았지만 얼마 못 가서 부도를 맞았다. 결혼 초부터 50대에 귀농할 것이라고 아내에게 말해왔지만, 도시에서는 더 이상 희망이 없었다. 계획보다 10년이나 빠른 43세가 되던 1996년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부모님도 농부였고 농번기에 일손이 부족할 때 돕던 순진했던 기억을 떠올리면서.

 

물론 쉽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은 했었어요. 하지만 생각보다 더 어렵더라고요. 초창기엔 생활비도 없었어요. 그래도 살아야겠기에, 요즘말로 쓰리잡을 뛰었어요. 오전엔 단감 밭, 오후엔 배달, 새벽엔 식당 짬밥을 거둬 가축 사료로 쓰는 일을 했죠. 온갖 정성을 들이고, 아무리 열심히 해도 각종 경비를 제하고 빚을 갚고 나면, 남는 것이 없더라고요. 이렇게 3년을 보내니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요. 무엇이 잘못됐는지.”

 

단감의 생리나 재배 원리를 알고 이해해야 병충해도 잡고 열매도 크게 키워 상품성을 높일 수 있는데, 이런 과정 없이 장기간 방치돼 있던 과수원을 빌려, 주위 농가에서 하던 관행농법을 그저 열심히따라 한 것이 실책이었다. 기존의 농법을 개선하지 않으면 승산이 없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농사일을 거들어주고 조언을 해 주는 이웃 대부분이 이런 관행농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답답함을 풀어보고자 농민신문도 열심히 보고, 농업기술원, 농업마이스터 대학 등 단감과 관련된 교육이나 세미나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가 질문을 퍼부었죠. 토양 관리부터 단감나무의 생리와 결실 관리, 병해충 발생요인 등 실질적인 재배기술에 눈을 뜨게 됐습니다. 돌아와서는 배운 대로 밭에서 곧장 실습을 했죠. 머리와 손, 마음으로 감을 이해하게 되자 단감농사에 자신감이 붙었어요. 이렇게 2년이 지나자 서울까지 김영기 단감소문이 나더라고요.”

 

단감에 어려 있는 슬픈 역사

1960년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김 동문의 처지는 여느 사람들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군것질거리도 변변치 않던 시절 친구들과 함께 했던 과수원 서리’. 그렇게 서리해서 먹던 과일 가운데 그는 단감의 시원하고 달콤한 맛을 잊지 못했다. 당시 단감은 고급 과일의 한 종류로 생산량도 많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일부 부유한 사람들만 먹을 수 있었다.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먹을 수 없었던 아쉬움, 사주지 못하는 부모님의 가난한 상황 등 단감에 대한 아련한 기억이 여전히 그의 가슴에 남아 있다고 한다.

 

저 개인적으로도 그렇지만, 현재 재배되고 있는 단감 종이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정착된 것은 1910년경 일제강점기부터죠. 100년이 됐어요.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떫은 감나무를 재배해 건시나 숙시 등으로 가공해 먹었지만, 일본에서는 생식할 수 있는 단감을 개발해 많은 품종을 보유하고 있었던 거죠.”

 

식민지 시대, 한국에 살던 일본인들은 그들의 감을 직접 재배해 먹고자 했다. 일본의 단감 재배지와 비슷한 기후와 토양을 경상남도에서 발견했다. 이런 역사로 우리나라 단감의 대부분이 창원에서 출하되고 있다고 한다. 일본인이 조성한 단감 과수원은 해방 후 한국인들이 관리하기 시작하면서 점차 재배 면적이 확산되고 품질도 좋아 전국적인 명성을 얻게 됐다.

 

방송대서 과학 영농의 영감을 얻다!

단감 관련 세미나나 교육이 있을 때마다 주변의 단감 농사를 짓는 이웃에게 무료니 같이 가자고 말해도 시큰둥하더라고요. 저는 관행농법의 한계를 깨달았기 때문에 절실했습니다. 배운 기술을 응용하고 적용해 단감 농사는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죠. 그런데 단감도 이젠 품질에 따른 가격 편차가 커지는 추세라 최적의 당도를 확보하는 농업 기술을 찾거나 배워야 했죠. 경남지역 대부분의 단감이 식감이 좋고 맛있지만, 얼마나 상품화하느냐에 따라 성패가 좌우되거든요.”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돈에 욕심이 있었다면, 그는 자신을 찾아와 농법을 알려달라는 사람들에게 무료로 자신의 시행착오를 나누지 않았을 것이다. 명품 단감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때로는 초심의 엉뚱한질문이 도움이 될 때도 있었다. 이런 탐구 정신과 열정으로 그는 본격적으로 농사를 지은 지 17년 만인 2013년 농업마이스터 단감 부문에 선정됐다.

 

농림축산부가 운영하는 마이스터제도는 독일 농림부의 것을 벤치마킹한 것이죠. 그래서 단감 마이스터로 뽑히고 나서 독일 연수도 다녀왔어요. 독일 정부에서는 다섯 농가당 1명의 마이스터를 필수로 배정해요. 예를 들어, 단감 농사를 짓는 5가구를 국가에서 인정한 1명의 마이스터가 관리해 농장주와 토양부터 판매로 확보까지 상의하고 방안을 모색하죠.”

 

단순히 농사를 잘 짓는 것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그들의 시스템을 보고 자극을 받았다. 김 동문은 체계적인 공부가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2015년 방송대 농학과 신입생이 됐다. 입학하자마자 학생들은 그를 마이스터라고 알아봤다. 그는 순식간에 인기 인사로 등극했다. 밤잠을 쪼개가면서 농업마이스터대학에서 강의하고, 방송대에서는 학생으로, 학생회 일까지도 도맡아 했다

 

물론 농업마이스터대학에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방송대 농학과 공부를 통해 과학 영농의 영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저의 기술과 지식이 필요한 사람들과 나누면서 더욱 성장하고 발전시킬 수 있게 된 것도 사실입니다. 다들 마이스터까지 됐으면서 무슨 대학이냐고 말릴 때마다 저는 단감 재배의 기본적인 성공조건을 떠올렸어요. 그것은 바로 토양관리죠.” 

 

기본이 안 되어 있으면 아무리 기술이 좋아도 명품 단감의 반열에 올릴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김 동문은 더 배워야 한다라며 뚝심을 세웠다. 고품질 다수확을 위해 단감 마이스터 김영기 동문은 오늘도 배수로를 깊게 판다. 단감 밭의 물 빠짐이 좋지 않으면 명품 단감을 얻을 수 없는 것처럼, 지식과 기술을 후배들에게 전수하지 않으면 명품 기술이 될 수 없다. 농학과를 통해 자신의 토양을 윤택하게 관리할 수 있었다는 그는 이제 정부의 지원을 받아 산청에서 단감 스마트팜을 운영하고 기술을 전수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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