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송대생들은 일반대생 못지않게 지식을 제대로 공부하면서 더욱 지평을 넓혀가야 합니다. 방송대가 일반대 진학을 하지 못한 이들에게 기회를 준 것이기 때문이죠. ‘보충’(補充)은 부족한 것을 보태 채우는 것이지, 들러리가 아니에요. 방송대가 우리 인생 항로에서 보충의 역할을 해 준 것입니다. 저의 인생에서도 그랬고요.”
9급 공무원에서 1급 신화 이룩
송도근 동문(행정 졸)은 경남 사천에서 8남매의 일곱째로 태어났다. 목수인 아버지와 농사일을 거들던 어머니 덕에 고등학교까지는 무사히 졸업할 수 있었다. 청소년 시절 특별히 원대한 꿈을 가졌던 건 아니다. 교사가 되면 학비 부담 없이 먹고 살 수 있겠다는 생각에 당시 100% 취업이 가능했던 교대에 시험을 쳤는데, 그만 신체검사에서 탈락했다. 적록색약으로 미술 과목을 가르칠 수 없단 사유였다. 급히 방향을 틀어 9급 공무원 시험(당시 5급 을류)을 치고 통영시(당시 통영군)로 발령을 받았다. 1년 2개월의 통영시 근무를 마치고 길고 긴 건설교통부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특유의 성실함과 실력으로 승진을 거듭하던 그가 9급에서 5급 사무관이 되기까지는 12년이 걸렸다. 건설교통부 광역교통관리국장 시절에는 서울시와 경기도, 인천광역시의 광역교통망을 구축했다. 이를 바탕으로 국내 도로, 철도, 항공 등 교통정책과 수자원 관리, 국가산업단지 조성, 주택문제를 담당하는 업무 전반을 섭렵하며 부산서울지방국토관리청장을 역임했다. 현 국토교통부에서는 고졸 출신의 말단 9급 공무원이 중앙부처 1급까지 승진한 입지전적인 인물로 회자하고 있다.
시장으로 지킨 ‘삼무’(三無) 원칙
공직생활을 정리할 즈음, 사천시 청년들이 그를 찾아왔다. 고향으로 돌아와 사천시를 발전시켜 달라는 요청이었다. 그는 “줄반장 선거도 안 해본 사람이 무슨 시장”이냐며 손사래를 쳤다. 거듭된 요청에 그는 주말 시간을 쪼개 고향 구석구석을 둘러봤다. 송 동문은 “명절에나 고향에 내려갔었는데 그렇게 자세히 고향을 들여다본 적이 없었죠. 평생 국토개발 분야에서 잔뼈가 굵었는데, 고향에 와 보니, 산업단지를 비롯해 도로망, 하천 이런 부분을 체계적으로 개선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38년 공직 경험과 노하우로 고향에 헌신하기로 마음먹고 사천시장 선거에 출마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민선 6기 취임 일성으로 “인구 20만의 작지만 강한 도시, 시민이 행복한 강도소시 사천 건설”을 외쳤다. △사주 천년의 역사 재정립 △해양관광 거점도시 △우주항공산업 중심도시라는 3개의 큰 그림은 민선 7기인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사천시의 대표 축제인 와룡문화제 명칭을 고려현종대왕축제로 변경했고, 사천바다케이블카와 생태탐방로를 설치했다. 또 우주항공산업 중심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차세대 중형위성조립공장을 포함한 KAI우주센터 유치, 항공산업특화단지 조성에 박차를 가했다.
송 시장은 현재 사천시가 직면한 과제로 ‘사천 항공 MRO(Maintenance, Repair and Operation, 항공기 정비) 산업의 집중 육성과 사수’를 꼽았다. 정부는 지난 8월 MRO산업 클러스터 간 중복투자를 방지하기 위해 지역별 특화 분야 육성 정책을 발표했다. 사실상 인천공항의 MRO산업 진출을 허용하는 조치라는 반론이 제기되는 지점이다. 송 동문은 “수도권 위주의 산업과 자본·기술의 집중화로 지역 경쟁력은 고사할 수밖에 없다. 힘든 과정이 예상되지만, 경남도민과 연대해 사천 항공 MRO산업 발전의 당위성을 강조하겠다”라고 말했다.
공무원 행정가에서 민선 시장으로 변신하며 지켜온 원칙은 인사에 ‘삼무’(三無)를 적용한 것이다. 출신지, 출신교, 종교를 업무 특히 인사원칙에서는 배제했다. 현재 통합 사천시는 종전의 삼천포시와 사천군을 통합한 행정구역명이다. 송 시장은 “아직도 사천 사람, 삼천포 사람이라는 소지역감정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전 그런 이야기 하지 않아요. 국장 자리가 하나 나면 이번엔 어느 지역 사람이 한다? 그런 거 없습니다. 업무 능력과 인품을 보고서 인사를 하죠”라고 말했다.
5년간 휴가 반납하며 방송대 졸업
송 동문은 1980년 방송대 행정학과에 입학했다. 서울대 부설 방송통신대 시절이다. 연 2회 10일의 출석수업에 참석하느라 5년간 휴가를 한 번도 가지 못하며 뒤늦은 공부에 매진했다. 그는 “수재들만 가르치던 서울대 교수님들의 강의를 들으니 얼마나 어렵던지요. 졸업시험에 영어 과목이 있어서 고생도 했어요. 졸업률이 2~3%였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래도 방송대 공부가 정말 많이 도움 됐습니다. 독학으로 행정법, 행정학을 공부했는데 비로소 체계적인 공부 틀을 잡았다고 할까요? 당시 서울대 사회학과장이셨던 김경동 교수님 강의에서 막스 베버도 알게 됐어요”라며 활짝 웃었다.
그에게 공부란 무엇일까? 왜 공부를 해야 할까? 송 동문은 “각자에게 공부의 개념이 다를 것이지만, 저는 공자님 말씀처럼 ‘인간으로서 길을 가는 수단’이 공부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논어』 시대 인간의 길과 현재의 것은 다를 수 있지만, 그래도 사람다운 삶을 살려면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라고 답했다.
고졸 출신인 송 동문은 방송대 덕분에 학사 졸업장을 따고, 대학원도 나올 수 있었음을 늘 마음 깊이 기억하고 있다. 공무원으로서는 사무관 이후 시험이 더 없는데, 방송대에서 졸업 이수학점인 160학점에 초과 학점까지 딸 정도로 책을 가까이했다. 그 열정으로 대학원에 진학할 수 있었던 것. 덕분에 근무지에서도 이른바 일류대 출신들과의 경쟁에서 학벌로는 진다고 해도, 업무나 지식 면에서는 절대 안 진다는 마음으로 일할 수 있었다.
그런 송 시장의 좌우명은 ‘장근보졸(將勤補拙)’이다. 장근보졸은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의 시에서 유래했으며 ‘부지런히 노력해 아둔함을 보완한다’라는 뜻이다. 즉, 어떤 일을 할 때 재주만 믿고 노력을 게을리하면 결국 일의 낭패를 본다는 의미로, 재주보다 노력이 더 중요함을 강조한다. 송 동문은 “부지런함으로써 나의 모자람을 보충한다는 마음으로 시정에 임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송 동문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방송대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질 것으로 예측한다. 그는 “종전에는 대면 교육만이 지식습득 방법으로 여겨졌지만, 이제는 비대면 시대가 됐습니다. 그런 면에서 가장 앞선 곳이 바로 방송대죠. 지금까지의 노하우를 잘 살려 미래 세대에 맞는 현실적인 커리큘럼을 만든다면 그 어느 대학보다 경쟁력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이 선점자인 방송대가 방향을 설정할 적기입니다”라고 제안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