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호시노 도모유키의 인간탐색

일본 대표팀의 힘이란, ‘일본인’의 힘이 아니라,
일본에서 사는 사람들의 힘이며

그것을 ‘일본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픽션일 뿐입니다.
각국의 내셔널 팀에 각각의 개성이 있는 것은
그 지역의 문화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 민족의 본질적인 성격’과 같은 사고방식은

이미 낡은 개념입니다.

 

나는 집에 틀어박혀 일하기 때문에 운동 부족이 되지 않도록 매주 풋살을 하고 있습니다. 풋살은 5인조 미니 축구로, 작은 장소에서도 가능해서 일본에서는 꽤 성행하고 있습니다.
내가 참가하는 것은 ‘개인 풋살’인데, 개인적으로 신청하고 그래서 모여든 낯선 사람과 팀을 이뤄 2시간, 게임을 즐기는 방식입니다. 축구만큼 격렬하지는 않아서 여성이나 중, 고등학생도 참가할 수 있습니다. 줄여서 ‘코사루(個サル, 개인 풋살의 준말)’라고 부릅니다.
그 코사루가 요즘은 아주 빨리 정원을 채우고 있습니다. 이유는 월드컵 때문이죠. 월드컵을 보고 일본 대표팀의 활약에 자극을 받아 평소에 축구를 하지 않던 사람들이 갑자기 축구를 하거나 개인 풋살을 신청하는 것입니다. 내가 참가하는 코사루에도 평소와 달리 사람이 늘었습니다. 때때로 일본 대표 선수의 슛을 흉내내며 떠들썩합니다.
흉내 내고 싶겠죠. 카타르 월드컵에서 일본 대표팀은 우승 후보였던 독일과 스페인을 이기는 쾌거를 이뤄 일본 전체가 축제처럼 떠들썩했으니까요.
이길 때마다 나의 컬럼을 번역하고 있는 김석희 교수가 메시지를 보내주었고 같이 기뻐해 주었습니다. 나도 한국 시합은 전부 관전하면서 김 교수에게 축하의 말을 전했죠.
그렇게 문자를 주고받는 가운데 월드컵에서 일본과 한국의 대결이 실현되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상당히 기대에 부풀었습니다. 실제로 일본과 한국이 함께 8강까지 올라가면 두 팀이 만나게 되어 있었습니다.
월드컵에서 한·일전(일본에서는 일·한전이라고 하죠)이라니! 얼마나 뜨거운 시합이 될지 생각만으로도 신이 났겠지요? 축구 팬으로서 최대의 꿈 중 하나입니다. 둘이서 두 팀을 모두 응원하자는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2002년 월드컵 이후 만들어진 감정들
물론 좋기만 한 이야기는 아닐지도 모릅니다. 내셔널리즘의 문제가 있으니까요. 2002년 열렸던 한·일 월드컵의 열광 이면에는 네거티브한 측면이 폭발해 버리기도 했습니다. 일본에서 그때까지와는 다른 문맥에서 한국에 대한 악감정이나 차별의식이 생겨나게 된 것은 한·일 월드컵 이후였습니다. 한국이 4강에 진출한 것을 질투한 일본인들이 내셔널리즘의 폭력성에 노출됐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직접 타깃이 된 것은 일본에 사는 자이니치(재일교포를 이르는 말. 한반도의 남과 북을 모두 포함하는 표현-옮긴이)였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심각한 차별문제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번 카타르 월드컵에서는 일본의 축구팬이 일본 대표팀의 활약에 기분이 좋아져서 한국 대표팀의 포르투갈전 승리를 함께 기뻐했습니다.
하지만 만약 8강에서 월드컵 사상 최초의 한·일전을 하게 된다면, 보고 싶지 않은 말도 여기저기서 튀어나올지 모릅니다. 그리고 지게 된 나라의 일부 사람들은 내셔널리즘에 의존해 상대방을 차별적으로 폄훼할지 모릅니다. 이것은 축구와 월드컵의 숙명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사실 나는 이번 월드컵을 거의 보지 않았습니다. 일본과 한국의 경기 말고는 아르헨티나의 경기 몇 개와 멕시코 경기 몇 개를 보았을 뿐입니다(거의 안 봤다는 것은 거짓말이군요. 죄송합니다. 그렇지만 저로서는 이 정도가 아주 적은 것입니다!).
이유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지금 내가 신문 소설을 매일 연재하고 있는 탓에 시간이 전혀 나지 않는다는 것, 또 하나는 코로나 탓입니다.
코로나 때문에 사람과 만나지 않고 여행도 하지 못하니, 그 대신 나의 큰 활력소인 일본 리그 (남자 J리그와 여자 WE리그)를 보러 갔습니다. 전에는 직접 관전하러 가기도 했지만, 코로나 때문에 스타디움에 가는 의미와 무게가 크게 달라졌습니다. 일종의 의존증 상태에 빠진 것 같습니다.
그래서인지 외국 축구를 TV 등으로 보는 일도 확 줄었고, 유럽이나 라틴아메리카 축구는 멀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나에게는 내가 사는 지역에서 언제나 응원하는 팀이 월드컵에 나오는 각국 대표팀보다 훨씬 가깝게 느껴집니다. 일본 대표팀도 한국 대표팀도, 항상 보는 리그에서 알게 된 선수들이 월드컵에 출전했기에 응원할 기분이 났습니다. 그러니 한국 대표팀의 골 중 가장 기뻤던 골은 FC도쿄에서 활약했던 김영권 선수의 16강 포르투갈전 동점 골이었습니다.

내셔널리즘과 픽션
국가대표팀보다 지역팀 쪽이 소중합니다. 내 안에는 이 감각이 분명하고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모든 축구에 해당합니다. 국가대표팀은 이미 민족 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지역에 사는 사람과 관련 있는 팀을 의미합니다. 그 선구적인 예가 프랑스 대표팀입니다.
그러므로 일본 대표팀도 한국 대표팀도 민족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과 한국에 살고 있는 사람 그리고 일본과 한국에 근거를 둔 사람들의 팀이라고 하는 편이 가깝습니다.
예를 들어 일본의 J리그에서는 오사카에 있는 두 클럽이 격전을 벌이고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지역전이지 인종이나 민족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즉, 일본 대표팀의 힘이란, ‘일본인’의 힘이 아니라, 일본에서 사는 사람들의 힘이며 그것을 ‘일본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픽션일 뿐입니다. 각국의 내셔널 팀에 각각의 개성이 있는 것은 그 지역의 문화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 민족의 본질적인 성격’과 같은 사고방식은 이미 낡은 개념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일본과 한국의 대전도 감각이 달라진 것은 아닌지요? 픽션으로서의 라이벌과 싸우는, 동아시아전인 것입니다. 민족의 우위성이라는 가치관과는 전혀 무관합니다.
이 칼럼에서 집요하게 쓰고 있듯이 ‘픽션’이란 거짓이라거나 가공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민족이든, 국적이든, 젠더든 그것은 본질적인 속성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자유롭게 선택하고 자의적으로 바꿀 수 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태어나면서 정해진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인간이 만든 구분법이며 그 구분법을 좀 더 좋은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는 의미에서, 나는 그것을 픽션이라고 부릅니다. (번역  김석희 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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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ulsa***
    어디까지나 인간이 만든 구분법.. 참 그렇습니다.!
    2022-12-20 22:47:26

사람과 삶

영상으로 보는 KN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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