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3일, 작가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 선생이 돌아가셨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일본의 두 번째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라는 업적을 상찬하지만, 나에게는 우리 현대의 작가들이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기초를 만들어 준, 소중한 작가입니다.
오에 선생은 1935년 1월 31일에 태어났고, 향년 88세였습니다. 오에 선생은 최근 십 년 가까이 문학의 일선에서 물러나 있었기에 새로운 문장과 말을 접할 수는 없었지만, 나의 어머니가 치매에 걸려 쇠약해져 가는 것을 보면서 때때로 오에 선생을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래서일까, 이런 날이 그리 멀지 않을 것이라 각오는 하고 있었으나, 막상 부고를 접하고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깊은 상실감을 느끼게 됩니다. 얼마나 내가 오에 선생을 마음속 깊이 의지하고 있었는지 깨닫습니다.

오에 선생은, 일본의 과거 전쟁책임, 피폭자에 대한 행정과
사회의 차별의식, 원자력 발전에 대한 이의 제기 등,
사회와 정치 문제에 대해 일관되게 발언했고,
당사자들과 관계를 맺으려고 했습니다.
그 근저에는 항상 누구에게나 똑같이 살 가치가 있다는,
공생의 감각을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오에 선생을 처음 만난 것은 『오레오레』(‘오레 오레’는 ‘나야 나’라는 의미로 한동안 유행했던 스미싱 사기를 칭하는 말-옮긴이)라는 소설로 오에 겐자부로 상을 수상해 대담했던 2011년입니다. 첫 대면에서 인사를 할 때, 선생은 “오레라는 말을 외국어 사전에서 찾아봤는데, 스페인어로는 힘내라는 의미도 있더군요. 그러니 호시노 상, 오레, 오레!”하고 유쾌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평소 오에 선생은 그런 언어유희를 좋아하는 것 같았습니다.
‘전후문학’의 가치 유지하려 애쓴 작가
한 시대가 저물었다고, 누구나가 느낍니다. 그것은 ‘전후문학’의 끝이라고 해도 좋겠지요(일본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에 패전한 1945년 이후를 ‘전후(戰後)’라는 말로 부르고, 그 민주화가 시작된 시기부터 등장한 문학을 ‘전후문학’이라도 부릅니다). 그러나 내가 상실감을 느끼는 것은 ‘이제 끝났다’라는, 모두가 생각하는 일이 망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위기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경우, ‘전후’란, 역사상 최초의 진정한 ‘민주화’가 일어난 시대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지배에 의한 민주화라고는 하지만, 그것을 정말로 일본 사회를 살아가는 개개인의 행방으로까지 심화시킨 것은 일본에 사는 사람들의 노력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것 없이는 제국주의 일본이 나라 안팎에서 행한 여러 가지 폭력을 성찰하고 넘어서는 것조차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그 민주화, 자유의 획득을 문학의 측면에서 행해 온 것이 전후문학입니다. 오에 선생은 젊은 작가로서 문단의 중핵에 돌연히 나타나 마지막까지 전후문학의 가치를 유지하고자 투쟁했습니다.
나는 자유란 당연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대단한 투쟁을 거쳐 실현되는 것이며, 유지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아차하는 사이에 사라져 버린다는 것을, 오에 선생의 작품을 읽으면서 배웠습니다.
장애를 지닌 아들이 태어나면서부터 오에 선생은 인권이라고 하는 측량하기 어려운 가치와 감촉을 말로 옮겨 왔습니다. 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우생 사상이 강했던 시대에 어떤 사람에게도 산다는 것은 똑같은 가치가 있으며, 함께 사는 사람에게 무한한 기쁨을 준다는 것을 소설을 통해 말해주었습니다. 나 역시 관념으로뿐만 아니라, 장애 여부와 상관없이 인간은 한 개인이라는 존재의 감각을 오에 선생의 소설을 통해 몸으로 익혔습니다.
공생(共生)의 가치와 감각
오에 선생은, 일본의 과거 전쟁책임, 피폭자에 대한 행정과 사회의 차별의식, 원자력 발전에 대한 이의 제기 등 사회와 정치 문제에 대해 일관되게 발언했고, 당사자들과 관계를 맺으려고 했습니다. 그 근저에는 항상 누구에게나 똑같이 살 가치가 있다는, 아드님에게서 배운 공생의 감각을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공생할 수 있다는 것의 가치는 유지하려는 노력을 계속하지 않는 한, 힘 있는 자에 의해 훼손돼 버립니다. 그러니 오에 선생은 정치적 발언도 아끼지 않았던 것이겠지요.
일본에서는 예술이나 스포츠에 관여하는 사람이 정치적·사회적인 발언을 하는 것을 대단히 싫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에 선생도 몇 번이나 역풍을 맞았고 「정치소년 죽다」라는 우익 소년을 소재로 했던 소설을 썼을 때는 우익으로부터 협박을 받아 책을 내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오에 선생은 스스로의 자세를 바꾸려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런 오에 선생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문학관을 형성했습니다. 내가 정치에 관해 의견을 말하거나 소설 속에서 사회적인 문제를 테마로 다룰 때, 그것은 문학의 일이 아니라는 무언의 압력을 느끼지만, 그에 상관하지 않고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오에 선생이 만들어 준 길을 걷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발언이나 에세이를 보면, 오에 선생이 철저하게 리버럴한 입장에 있었지만, 소설에서는 피해를 입은 쪽, 약한 자 쪽에 시선을 두면서도 가해자나 강한 힘을 가진 자가 어떻게 폭력에 이르는지 상세히 그려냈습니다. 단편「세븐 틴」은 학교 사회에서도 가정에서도 소외당한 소년이 어떤 마음의 변화를 거쳐 우익에 몸을 담게 됐는지를 그린 작품으로, 우익뿐 아니라 열등의식을 가진 남성이 어떻게 약한 자를 향한 폭력에 의존성을 갖게 되는지, 그 과정을 치밀하게 그린 소설로 지금도 필독서로 삼고 있습니다.
오에의 작품을 반복해서 읽는 까닭
1945년 이후의 ‘전후문학’의 남성중심주의를 무너뜨리고 젠더 측면에서의 자유를 문학 분야에서 개척하는 것은 오에 선생의 역할이 아니라 우리 세대의 과제라고 생각하고, 나는 소설을 써 왔습니다. 현재의 소설은 그런 점
에서 크게 달라졌다고 생각합니다.
그 자유는 패전 직후부터 긴 시간과 노력을 들여 손에 넣은 것입니다. 그 사실의 실감이, 오에 선생의 죽음과 함께 잊혀 버린다면, 자유란 처음부터 존재하는 당연한 것으로 여겨 자유를 유지하기 위해 투쟁하는 사람이 없어질 것이며, 결국 그 자유를 잃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오에의 작품을 현재에도 의미 있는 것으로 유지하기 위해, 나는 그의 작품을 반복하여 읽으려고 합니다.
번역 김석희 경희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