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제42회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2003년 제32기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뒤에는 곧장 고향인 청주로 내려와 변호사사무실을 열었다. 최근에는 충북총동문회장을 맡아 동문과 지역대학, 후배 학우들까지 챙기느라 여념이 없는 사람, 최영준 동문 변호사다. 변호사를 천직으로 알고 있지만, 현장에서 일하다 보니 새로운 꿈이 생겼다고 했다. 2020년 21대 총선에 나섰다가 좌절을 맛보았지만, 1보 전진을 위한 2보 후퇴라고 생각한다. 그런 그를 6월 16일(금) 오후 3시 청주 서원구 산남로에 있는 그의 변호사사무실에서 만났다.
최익현 선임기자 bukhak@knou.ac.kr
사회적 성공을 이룬 방송대 사람들에게는 공통적인 특징이 몇 가지 있다. 그 가운데 단연 첫 번째는 ‘경제적 어려움’이다. 흔히 말하는 ‘가난한 집안 환경’이다. 그리고 이들은 이 운명 같은 ‘상수’를 이겨낸다.
제42회 사법시험에 합격한 이후 20년째 변호사로 청주 지역사회에 기여하고 있는 최영준 동문도 그런 사람의 하나다. 1967년 충북 청주에서 3남 2녀의 장남으로 태어났지만, 11세 때 아버지가 병환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온 식구가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릴 수밖에 없었다. 의지력이 강한 어머니가 식당일, 날품팔이 등을 하며 자식들을 키워냈다. 최 동문은 ‘어머니의 강한 의지’가 자신의 원동력이었다고 말했다.
고향 청주에서 20여년을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일해왔습니다. 이제는 지금까지의 경험과 역량을
지역사회와 나라를 위해 사용하고 싶어요.
방송대 공부는 가능하면
학과나 모임, 동아리나 학생회 활동 등에 적극 참여해
함께 공부하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라고 봐요.
가난한 환경을 이기고 이룬 꿈
청주상업고(현 대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가 선택한 것은 공무원의 길이었다. 성에 차지는 않았지만, 일단은 생계를 책임져야 했기 때문이다. 이 무렵 방송 광고를 통해 방송대를 알게 됐고, 선배인 삼촌의 권유에 따라 다른 야간대학 대신 방송대 법학과에 입학했다. 1986년 19세 때의 일이다.
1995년 방송대를 졸업한 뒤에는 신림동 고시촌에서 4년여 머리를 싸매고 공부했다. 사법시험을 보기 전에는 방송대 중앙도서관에 틀어박혀 마지막 점검을 하기도 했다. “방송대 법학과 시절의 에피소드가 많았어요. 함께 밤을 지새우며 학생회장 선거에서 후보자를 당선시키기 위해 제천, 단양까지 학우들을 찾아가 설득했던 일들, 공부하다 보니 겪어야 했던 이런저런 어려웠던 순간들, 동문들이 도와줘서 사법시험 준비를 했던 기억 등등 너무나 많습니다.”
최 동문은 자신의 20~30대 기억의 약 8할은 ‘방송대의 기억’이라고 힘줘 말한다. 그렇기에 그도 많은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방송대가 인생을 바꿔줬다’라는 데 동의한다. “방송대는 지금의 제 삶이 있게 해준 고마운 곳입니다. 꿈을 키워줬고, 그 꿈을 실현할 수 있도록 안내해줬어요.”
동문들이 모이는 곳이라면 그는 어김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청춘의 젊은 시절을 함께했던 방송대 사람들이 그저 정겹고, 말이 통하기 때문이다. 그 역시 ‘100만 인의 꿈’을 향한 동문회 활동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다. 사회 곳곳에서 방송대 동문이 깊이 뿌리를 내리고, 이들이 하나둘 거대한 나무가 되는 게 방송대의 가치를 증명하는 길이라고 믿고 있다.
“함께 공부하는 게 제일 좋은 방법”
“코로나19 팬데믹이 진정된 이후 수많은 동문 관련 모임들이 다시 살아나고 있어요. 이런 추세로 본다면 동문 ‘100만 인의 꿈’은 곧 현실화할 것이라고 강력히 믿습니다. 오늘의 저를 있게 한 방송대와 동문회의 발전을 위해 제가 할 일이 무엇인지 계속 살피고 있고요.”
그런 의미에서 최근 학교가 역점을 두고 있는 ‘50·500억 발전기금 모금 프로젝트’에도 관심이 깊다. 원격교육 분야에서는 방송대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노하우를 가지고 있고, 이런 장점이 다른 대학에도 많이 전파되겠지만 새로운 활로 개척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방송대는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은 전공이나 기타 이공 분야 등의 전문학부도 개설할 필요성이 있다고 봐요. 타 대학과의 경쟁력을 생각한다면 이러한 분야의 개설도 충분히 생각해야 할 때라는 거죠.”
1986년에 입학해 1995년 졸업했으니, 10년의 시간을 방송대 학생으로 보낸 셈이다. 그동안 주변에서 포기하는 학우들을 많이 지켜봤으리라. 신림동 고시촌 생활 등 5년 만에 사법시험에 합격했지만, 뭔가 뾰족한 공부 방법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 역시 방송대에서 공부할 때는 ‘함께’를 늘 염두에 뒀다고 한다.
“방송대 완주를 위해서는 혼자 공부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혼자 학습하는 건 쉽게 지칠 수 있어요. 공부라는 게 외로운 과정일 수밖에 없지만, 가능하면 학과나 모임, 동아리나 학생회 활동 등에 적극 참여해 함께 공부하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라고 봐요. 저도 학생회 활동에 많이 참여했거든요.”
그가 꾸는 새로운 꿈
11세 때 부친이 돌아가신 뒤로 최 동문은 10여 회 이상 이곳저곳으로 이사를 했다. 그때의 경제적 어려움이 ‘돈 잘 버는 변호사’라는 꿈을 자극하는 촉발제가 됐지만, 그가 물질적인 성취에 경도된 것은 아니다. 그는 사법제도를 움직이는 것은 제도가 아니라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다. 법원 문턱을 닳도록 오르내리면서 그는 ‘사람의 진실한 마음’의 의미를 거듭 깨쳤다.
그가 2020년 21대 총선에
출사표를 던졌을 때, 주변에서는 ‘응? 왜지?’ 이런 눈길을 던진 이들도 있었다. 사람의 진실한 마음이 승리하는 세상을 만들어 보고 싶었던 그의 속내를 읽어내지 못한 시선들이었다.
“지금까지의 경험과 역량을 지역사회 발전과 나라 발전에 보태고 싶어졌어요. 그래서 2020년 총선을 약 4개월 앞둔 상태에서 약간은 용감하게 그러나 무모하게 총선 출마를 선언하고 경쟁에 뛰어들었는데, 결국 공천을 받지 못했죠. 지금은 제 뜻을 알고 도와주는 분들의 조력과 응원도 생기고 있어요. 이제 제대로 한번 해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바닥을 다지고 있습니다. (웃음)”
그는 자신의 장점으로 목표를 설정하고 성취하는 강렬한 의지, 꺾이지 않는 굳건한 희망을 꼽는다. 웃을 때 덧니가 보이는 소박한 미소도 지녔다. 그가 생각하는 정치도 그랬다. 한국 정치의 가장 큰 문제로 ‘정치의 양극화’를 꼽는 그는 거대 양당이 극단적으로 맞붙어 사안마다 이념적으로 대립하고 있으니 국민도 양극화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러다 보니 정치의 세계에서 대화와 타협, 공존이라는 모습을 전혀 볼 수 없죠. 자유민주주의라는 큰 틀에서 당리당략이 아닌 국민을 위한 정책경쟁, 민생구제를 위한 입법과 소수자 보호와 복지제도 확립 등 ‘오직 국민을 위한 정치’를 실천해야 합니다.”
그는 최근에 감명 깊게 읽은 책으로 19세기 어류 분류학자의 삶을 논픽션으로 다룬 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꼽았다. 세상을 바라보는 ‘진실한 관계들’의 의미를 되묻는 부분이 흥미로웠다고 말하는 최 동문이 과연 어떤 새로운 출사표를 던질지 궁금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