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삶   우리 시대를 일구는 문화예술인

1989년 3월 7일, 스물아홉의 나이로 세상을 뜬 시인이 있다. 「안개」 「질투는 나의 힘」 「입 속의 검은 잎」 「빈 집」 등으로 알려지던 시인 기형도(1960~1989)다. 때 이른 그의 죽음은 그의 유고 시집 『입 속의 검은 잎』(문학과지성사, 1989)에 해석의 두께를 더했다. 그에 대한 평가는 일찍이 평론가 김현이 부여했던 “아주 극단적인 비극적 세계관(도저한 부정적 세계관)의 표현” “젊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시인”이 대세를 이뤘고, 이런 시적 해석은 요지부동으로 이어졌다.
한국외대 튀르키예과·일본어과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거쳐 사업을 일구다가 ‘바닥 끝’을 경험한 뒤 방송대 국어국문학과, 일본학과에서 잇달아 공부한 이강 동문이 지난 10월 첫 시집 『기형도』(한국문연)를 들고 시단에 얼굴을 드러냈다. 그런데 그의 등장이 예사롭지 않다. 그가 요절한 시인 기형도와 중앙고등학교 70회 동기였다는 것, 기형도 전기에서 공백으로 남았던 고교 시절에 대한 문학적 증언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래서 더욱 『기형도』라는 시집을 발표한 그가 궁금했다.


 

그의 등장이 예사롭지 않다.
그가 요절한 시인 기형도와
중앙고등학교 70회 동기였다는 것,
기형도의 고교 시절에 대한
문학적 증언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동시에 그 스스로 빛을 내는
시적 가능성을 보여줘서다.

 


문우에 대한 시적 증언을 넘어
이강 시인은 일본학과에 재학하던 2020년 제44회 방송대문학상 시 부문에 도전해 ‘본선’에 오른 이력이 시적 경력의 전부다. 방송대 프라임칼리지 시 창작반에서 손택수 시인 등으로부터 따끔한 질책을 들으며 습작을 거쳤다. 2020년부터 자신의 고향 남해를 배경으로 쓰기 시작한 시편들과 기형도에 관한 기억의 꼬투리에서 길어 올린 시편을 모아 출판사를 두드렸다. 그렇지만 신춘문예 등단이나 문예지 추천 하나 없는 그에게 선뜻 출판을 해주겠다고 응답할 곳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몇 번의 노크 끝에 시 전문지 〈현대시〉를 발행하는 한국문연에서 출판하겠다는 대답을 받을 수 있었다.
그의 첫 시집 『기형도』에는 기형도 연작시 35편, 염해부락 이야기 연작시 22편이 수록돼 있다. 시집 제목을 고민하다가 경남 남해 출신인 자신이 기형도를 만나 시에 관한 새로운 시선을 갖게 됐다는 데 의미를 두어 ‘기형도’로 제목을 결정했다. 그는 ‘시인의 말’에서 “나는 이 시집이 기형도에 대한 늦은 조시가 아니라 축시로 읽히기를 바란다”라고 썼다. 왜 그랬을까?
“고등학생 형도는 자존심이 무척 쎘어요. 그래서 자기 어려운 얘기도 잘 하지 않고 또 아쉬운 소리도 잘 하지 않는 그런 친구였죠. 그 시집(『입 속의 검은 잎』)이 나오고서부터 이상하게 형도가 비운의 주인공처럼 회자되고 평가받는 점이 저로서는 좀 안타까웠죠. 요절한 그 자체가 하나의 화젯거리가 된 거죠. 형도에 대한 시를 쓰겠다고 생각한 뒤로는 모든 자료를 찾아 읽고 메모했죠. 비운 혹은 요절, 이런 것 때문에 형도가 조금 왜곡돼 보이기도 하고, 또 약간 과장돼서 보일 수도 있겠다 싶었어요. 그래서 저는 고교 시절 그냥 밝고 명랑했던 형도 그 자체를 담담히 시에 담고 싶었어요.”
그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1989년 3월 그의 부고를 접하고 녹십자병원에 뛰어갔지요. 대학에 입학한 뒤로는 서로 왕래가 거의 없었어요. 세월이 흘러 친구 기형도가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올랐죠. 중앙고 교정에 저희 70회 동기들이 시비도 세우고… 그런데 기형도의 일생 중에서 텅 비어 있는 부분이 보이더군요. 이 부분을 조금이라도 채울 수 있다면 형도에 대한 마음의 빚을 좀 덜 수 있지 않을까, 그동안 너무 소홀했던 아쉬운 마음이 들어서 형도를 주제로 시를 쓰기 시작했죠. 죽음, 부정, 비극 등으로 색칠된 세평보다 희망의 역설로 접근하고 싶었어요.”

새로운 해석의 전기적 근거 마련
그런 이강 시인의 시 속에서 살아나는 기형도는 이런 모습이다. 학교 도서관이 10시에 문을 닫으면 막차를 타기 위해 뛰기 시작한다든가, 두만강을 구성지게 부르면서도 팝송을 멋들어지게 노래하는 중창 단원으로도 활동하며, 반 친구들의 만류에도 기어코 축구 시합에 끼어 하늘 높이 똥볼만 차대기도 하고, 갈래머리를 한 여학생을 무척 좋아했으며, 시와 노래 사이 정현종과 릴케 사이에서 콧노래를 흥얼거렸고,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는 시가 아니라고 단언하는 당찬 모습이다. 이강 시인의 기억을 따라가면, 기형도는 공부도 잘하고 노래도 잘 부르고, 축구도 전후반 내내 뛰려고 욕심내는 명랑하고 밝은 고등학생이다.
“형도는 문예반은 아니었어요. 그런데도 워낙 글을 잘 쓰니까 교내에 짜했었죠. 문예반 모임에 가끔 와서 자기 시 몇 편 툭 던져놓고 가곤 했죠. 한 번은 그런 형도를 쫓아가서 물었어요. 네가 생각하는 시라는 게 뭔지 설명해달라고요. 형도는 피식 웃으면서 나중에, 나중에 얘기하자, 이러는 겁니다. 자신은 시를 써서는 안 되는 형편이라고 하면서도 또 시를 써야만 한다고 했던 말도 알쏭달쏭했지요.”

이강 시인의 기억 속에는 중앙고 1학년 때, 3학년 때 기형도와 같은 반을 했던 것으로 정리된다. 이 시기 그는  졸업할 때까지 산문과 시, 시인에 관하여 기형도와 많은 대화를 나눴다고 회고했다. 문학적으로 눈을 떠가던 시기인지라, 그의 기억 속 기형도는 너무나 밝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기형도의 돌연한 죽음으로부터 시작된 시적 해석은 이강 시인의 기억 속 친구의 모습과는 동떨어져 있었다. 국회도서관 자료실에서 ‘기형도’를 키워드로 입력하면 360편이나 되는 기형도 관련 글을 만날 수 있다. 이 가운데 학위논문은 박사논문 5편 등 모두 114편이 있다. 그런데 기형도 시인 20주기(2009)를 전후해서 그에 대한 해석 지층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2009년 3월 4일 KBS 1TV 「낭독의 발」 프로그램에서 ‘영원한 청년, 시인 기형도를 읽다’라는 기형도 시인 20주기 추모 낭독무대를 마련했다. 1980년대 동인지 활동을 통해 기형도와 교류했던 시인 이문재는 “기형도 시인은 작품 속 검은 절망의 이미지와 달리 낭만적이고 유쾌한 성품이었다”라고 회고했다.
이런 기류는 김은석의 박사논문인 「기형도 문학 연구」(2013.2)로 이어졌고, 다시 김행숙의 논문 「기형도가 희망을 말하는 방법」(〈한국문학연구〉 51권, 2016.8)으로 진화했다. 김행숙은 “기형도 시에 남겨진 좌절과 실패의 흔적들은 희망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희망을 계속하게 하는 시적 계기들이었다”라고 읽어냈다. 2019년 3월 7일, 연세대 백주년기념홀에서 열린 ‘기형도 시인 30주기 추모 심포지엄’은 아예 주제 자체를 ‘신화에서 역사로. 기형도 시의 새로운 이해’를 내걸고, ‘새로운 이해’를 시도했다. 이강 시인의 시집 『기형도』가 놓일 수 있는 문학사적 위치는 바로 이쯤이다.
그렇다고 이 시인의 『기형도』를 문우 기형도에 관한 시적 증언으로만 읽어내서도 곤란하다. 시집 해설을 맡은 평론가 염선옥의 지적을 들어보자. “이강의 시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편은 역사가 된 ‘기형도’를 떠올려주는 연작들보다 ‘염해부락 이야기’ 연작에 있지 않나 싶다.” “젊은 시인들에게는 없는 ‘옛것’의 이니셜이 있고 바글거리는 관계성이 녹아 있다. 이것이야말로 시를 새롭게 해주는 둘도 없는 자원이 아니겠는가.” 기형도라는 신화를 떠나서도 시인 이강의 가능성이 가득하다는 진단이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시는 ‘옛것’의 단순한 복기가 아니라, 그것을 매개로 그의 시적 서사가 확장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양철지붕이 녹슬어 가고,
굴뚝은 휘우듬하니
새들의 발이 된 지 오래

모래톱, 흑발의 밤 속으로 
동동거리며 떠도는 섬

바다는 검붉은 하혈을 하고 
마을은 어둠 속에서 구붓하다

입 없는 것도 헐하고 
입 여는 것도 헐하고 
입 다문 것도 헐하고

염해부락 
폴락폴락 잔가지에 서다
―「염해부락 이야기 15」 전문

“방송대, 제대로 평가받았으면…”
사실 이 시인은 방송대 일본학과를 졸업할 때 4.5 만점에 4.5로 최우수상을 받았다. 국문학과에 이어 일본학과도 장학금을 받으면서 다녔지만, 일반 대학보다 방송대 공부가 더 재미있었다는 말도 빠뜨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는 왜 뒤늦게 방송대를 찾았을까?
“2015년 5월부터 지난 10월까지 읽었던 책이 대략 4천900권 가까이 되더군요. 물론 남독(濫讀)이죠. 그런데 책을 읽다 보니 제가 문해력이 모자란다는 걸 느끼게 됐어요. 그래서 2018년에 ‘책을 잘 읽기 위해서’ 국문학과에 편입했던 거죠. ‘글을 쓰기 위해서’가 아니였어요.(웃음) 이제야 조금 제대로 책을 읽을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도 인문학 공부는 워낙 어려워요.”
밤새 교재를 읽고 밑줄을 긋고, 빨간 줄, 파란 줄을 입혀가면서 공부했다. 물론 학과 스터디의 도움도 컸다. 지금도 국문학과 스터디 모임을 같이 했던 동료들과 친분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이런 말도 보탰다.
“방송대에서 공부해 보니, 학교가 일반 사회에 알려진 것보다는 훨씬 더 좋은 분들이 열심히 많이 공부하는 곳인데도 신·편입이 쉽다고 해서 훌쩍 저평가받고 있다는 생각에 아쉬움이 컸어요. 그게 안타까워서 주변에 방송대를 많이 소개했더니, 지금은 방송대 전도사가 된 것 같아요.”
이강 시인은 평생 세 권의 시집을 발표하고 싶다고 했다. 첫 시집을 내놨으니, 두 번째, 세 번째 시집이 남아 있는 셈이다. 기타 연주도 일품인 그는 틈틈이 동아리 회원들과 함께 봉사활동과 지역공연 참여에도 열심이라고 했다. 오랫동안 생활인으로 살면서 문학을, 시를 잊었던 그가 친구 기형도의 기억을 되새기면서 다시 시의 길에 접어들 수 있었다. 앞으로 10년, 정말 오래 남을 시를 쓰겠다고 말하는 시인 이강. 그의 다음 시집은 어떤 모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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