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음식과 권력

“창조는 투쟁에 의해 생긴다. 투쟁 없는 곳에 인생은 없다.” -비스마르크

온전한 인간은 없다. 과실이 있을 때 솔직하게 인정하고 뉘우칠 줄 알고, 슬프면 슬퍼하고 화가 나면 화도 내는 것이 사람이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권력의 힘으로 자신의 부족함이나 불만에 대한 민중의 소리를 억누를 수는 있어도 본인은 자신이 어떤 위인인지를 안다. 정치 지도자가 반드시 청렴하거나 도덕적이지는 않다. 문제는 솔직함이고 개선 의지가 있냐 없냐다. 독일 통일의 리더 오토 폰 비스마르크도 결함이 많은 인물이었다. 먹는 것도 무척 좋아했다. 단순히 좋아한 것이 아니라 과도하게 먹는 것에 열중했다.
여전히 기아로 인한 어린이 사망률이 높지만, 어느 면에서는 음식이 넘쳐나는 풍요의 사회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음식을 많이 먹는다. 음식을 즐긴다거나 사랑한다고 말한다. 식탐이 더 이상 흉이 되지도 않는다. 폭식이나 과식을 식탐으로만 설명할 수 있을까? 한때 우리나라도 아침나절이면 문전걸식하던 걸인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음식의 내용보다는 양만을 얘기한다면 그들은 주어지는 음식은 무엇이든 다 먹었다.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않은 걸인의 심정 때문에 그들을 대식가로 취급할 수는 없다. 비스마르크야말로 대식가였다.

수상 지낸 뒤 황제 대리청정하기도
오토 에두아르트 사진 출처=위키피디아레오폴트 폰 비스마르크 쇤하우젠 후작(Otto Eduard Leopold Furst von Bismarck-Schnhausen, 1815~1898)은 독일을 통일해 독일 제국을 건설한 프로이센의 외교관이자 정치인이다. 비스마르크 후작은 프로이센 쇤하우젠에서 융커의 아들로 태어났다. 괴팅겐대학교와 베를린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했고, 이후 공무원으로 근무하다 1847년 프로이센 의회의원에 당선돼 정계에 진출했다. 1848년 베를린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그는 반(反)혁명파로 활동했다.
1862년 빌헬름 1세에 의해 프로이센 수상으로 임명된 비스마르크는 1873년에 퇴임했고, 1862년 12월 1일에서 1866년 12월 31일까지 빌헬름 1세의 대리청정직무를  수행하기도 했다. 수상 취임 후 첫 연설에서 군비확장을 주장한 ‘철혈 정책’ 연설(연설문의 제목은 ‘Eisen und Blut’ 즉 ‘철과 피’였다)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독일에서의 프로이센의 지위는 프로이센의 자유주의가 아닌 프로이센의 권력에 의해 결정될 것 … 당면한 문제들은 오직 철과 피에 의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라고 말한 그는 이 연설로 ‘철혈 재상’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일부에서는 ‘철혈 재상’이라는 말은 비스마르크의 반대파가 그를 깎아내리기 위해 사실을 대폭 과장한 것으로 본다. 그가 ‘철혈적인’ 모습을 보인 것은 사실이지만, 통일이 되자 평화주의적 정책으로 전환해 평화유지에 힘썼던 측면을 간과했다는 지적이다).
철혈 정책에 따라 의회의 반대를 무릅쓰고 군비를 확장해 1864년 덴마크를, 1866년 오스트리아를 제압했고 이후 일으킨 프랑스-프로이센 전쟁(1870~1871)에서 승리해 독일 제국을 선포, 통일을 이룩했다.
비스마르크는 당시 유럽 열강들이 몰두하던 해외 식민지 개척에 관해서는 원칙적으로 부정적이었다. 그는 해외 식민지 개척 비용 및 각종 부담을 고려할 때 지나친 식민지 확장 정책은 국익에 실효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그런 그도 1880년대 초반 들어 국민 여론이 식민지 개척 쪽으로 기울자 마지못해 정책을 전환했다. 그 결과 독일은 아프리카에서 토고랜드(지금의 가나와 토고), 카메룬, 독일령 동아프리카(지금의 르완다, 브룬디, 탄자니아), 독일령 남서아프리카(지금의 나미비아) 등을 차지했다.
사진 출처=위키피디아

비스마르크는 술도 워낙 좋아해 그의 이름을 딴
칵테일이 존재할 정도다.
젊은 시절부터 발포주인 샴페인에 독일식 흑맥주를
머그잔이나 스타인에 섞어서 즐겨 마신 것으로 알려졌다.
마셨다하면 엄청나게 마셨다. 이 때문에 오늘날 독일에서는
이 칵테일을 ‘비스마르크 칵테일’이라고
부르며 그를 추억한다.

 

독일 통일한 프로이센의 정치가
그는 독일 역사에서 최초로 통일을 이룩했던 정치가로 독일을 진정한 강대국 대열에 올려놓았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수백 년간 지속된 독일권의 지역주의를 타파하고 강력한 민족국가로서의 독일제국을 탄생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세계 최초로 의료보험, 산재보험, 노인복지법 등의 정책을 실행해 사회보장제도의 기틀을 마련하기도 했다.
비스마르크는 철저한 ‘현실정치가’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그의 자세는 정책에 대한 불만 세력의 결집 및 활동의 원인이 되기도 했으며 훗날 빌헬름 2세와의 갈등에서 대중과 정당들로부터 인기를 얻지 못했다는 점에 있어서 부정적인 평가도 있다.
1890년 비스마르크는 빌헬름 2세와의 갈등으로 정계를 은퇴했다. 비스마르크 사후 빌헬름 2세의 신중하지 못한 대외 정책들은 독일을 국제적으로 고립시켜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지는 대독 포위망을 초래했다. 빌헬름 2세 자신도 전쟁 패배와 함께 퇴위하면서 국외로 망명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는 비스마르크에 의해 세워진 독일 제2제국의 멸망을 의미했다.
학창 시절 비스마르크는 교사들과 동급생들 사이에서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조용한 학생이었다. 그러나 그는 언어능력이 탁월해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의사소통 및 서신교환이 가능할 정도였다. 모국어인 독일어는 물론 영어와 프랑스어, 러시아어, 이탈리아어, 스페인어를 자유롭게 구사했다. 이러한 언어능력은 비스마르크가 성인이 된 후 당시의 국제 정세를 파악하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됐던 것으로 보인다.

왕성한 식욕, 얼마나 술을 좋아했기에…
사진 출처= cocktail101.wordpress.com비스마르크는 식욕이 왕성한 사람이었다. 음식을 가리지 않고 먹었는데 특히 감자를 곁들인 비프 스테이크, 콜드 로스트 비프, 사슴고기, 프라이 푸딩과 온갖 디저트를 다 즐겼다. 아침이고 저녁이고 식사 때마다 와인을 마셨으며 점심에는 우유, 레몬수, 맥주, 샴페인을 곁들였다. 여기에 더해 청어와 달걀을 특히 좋아했는데, 아침 식사로 달걀 10개를 거뜬히 먹어 치웠다고 한다.
피자 중에 비스마르크 피자가 있는데 이는 달걀을 좋아한 그의 이름을 딴 듯싶다. 이 피자는 치즈 베이스에 달걀 반숙, 양송이버섯, 프로슈토, 트러플 오일, 루꼴라를 재료로 하여 만든다. 비교적 산뜻하고 가벼운 맛의 이탈리아 피자와는 다르게 조금 무거운 맛을 낸다. 하지만 달걀 노른자와 트러플 오일이 주는 풍미는 신선하면서 담백하다.       
비스마르크 피자는 ‘피자 알라 비스마르크’로도 알려져 있는데, 1862년 비스마르크가 이탈리아에서 연설하면서 “변화를 이뤄내기 위해서는 피와 철(blood and iron)이 요구된다”라고 한 데서 비롯된다. 그 후 이 말이 ‘blood and eggs’로 오역되면서 달걀이 들어 있는 피자를 비스마르크 피자라고 부르게 됐다.
비스마르크는 술도 워낙 좋아해 그의 이름을 딴 칵테일이 존재할 정도다. 본격적으로 프러시아 정치·외교가에 두각을 나타내기 전인 젊은 시절부터, 발포주인 샴페인에 독일식 흑맥주를 머그잔이나 스타인(뚜껑이 있는 독일식 큰 맥주잔)에 섞어서 즐겨 마신 것으로 알려졌다. 한번 마셨다하면 엄청나게 마셨다고 한다. 이 때문에 오늘날 독일에서는 이 칵테일을 ‘비스마르크 칵테일’이라고 부르며 그를 추억한다.
‘비스마르크 칵테일’과 닮은꼴로 독일 이외의 다른 나라 사람들이 즐겨 마시는 칵테일 ‘블랙 벨벳(Black Velvet)’이 있다. 샴페인을 사용하는 것은 같으나 독일식 흑맥주가 아니라 스타우트(stout) 계열의 흑맥주를 사용한다는 점이 다르다. 스타우트 중에서도 아일랜드의 유명한 국민주인 기네스 맥주를 사용하는 것을 정통으로 친다. 스타우트와 독일식 흑맥주 쉬바르츠비어는 흑맥주라는 점에서는 같지만, 그 제조공법과 맛에서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쉬바르츠비어는 우리나라 맥주처럼 하면(下面) 발효를 시키는 전형적인 라거(lager) 맥주의 일종으로 상쾌한 맛이 나면서 초콜릿이나 커피향이 느껴지는 맥주다. 반면 기네스와 같은 스타우트 맥주는 상면(上面) 발효를 통해 만들어지는 에일(ale) 계통의 맥주로, 독일식 흑맥주에 비해 쓴맛이 더 강하다.
블랙 벨벳은 1861년 영국 런던의 유명한 사교클럽이었던 브룩스 클럽의 한 바텐더가 빅토리아 여왕의 부군이었던 앨버트공(1819~1861)의 갑작스러운 사망을 추도하며 고안한 것으로, 당시 조문객들이 착용했던 완장의 색깔과 유사하게 칵테일의 색깔을 만들어 냈다고 한다. 비록 그 외관은 거의 비슷하지만 칵테일의 탄생 측면에서 보면 블랙 벨벳과 비스마르크 칵테일은 전혀 다른 바탕을 가지고 있다.
제조 방법도 조금은 달라 전형적인 블랙 벨벳은 시각적인 효과를 위해 ‘champagne flute(길고 가는 샴페인 잔)’를 사용한다. 먼저 차가운 스타우트 맥주를 절반 정도 플루트에 채운 다음 그 위로 조심스럽게 샴페인을 채워 비중이 다른 두 술이 층을 이루게 하는 일종의 푸스카페(pousse-cafe)식 칵테일로 만든다.영어학자이지만, 뒤늦게 중앙아시아사를 공부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차와 여행을 좋아해『茶의 고향을 찾아서』『문명의 뒤안 오지 사람들』『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 초원에서 흑해까지』등을 썼다.
비스마르크는 세상을 뜨고 없지만 그의 이름이 붙은 술과 음식은 후대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의 정치적 행적을 두고서는 다양한 평가가 가능하겠지만, 그가 남긴 말 한마디는 의미심장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운명에 겁내는 자는 운명에 먹히고, 운명에 맞서는 사람은 운명이 길을 비킨다. 대담하게 나의 운명에 맞서라! 그러면 물새의 등에 물이 흘러 버리듯 인생의 물결은 가볍게 뒤로 사라진다.”


2좋아요 URL복사 공유
현재 댓글 0
댓글쓰기
0/300

사람과 삶

영상으로 보는 KNOU

  • banner01
  • banner01
  • banner01
  • banner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