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재일조선인 시인 김시종, 삶을 말하다 ②]

‘비국민’ 아버지와 ‘황국소년’ 아들여름이 되면 정원에 커다란 접시꽃이 핍니다. 나에게는 향수를 자극하는 꽃입니다. 소년시절을 지낸 제주도 집의 우물가에는 특별히 꽃잎이 커다란 접시꽃이 있어서 나비가 날아들기만 해도 꽃잎은 살짝 흔들리곤 했습니다. 한반도 남쪽 80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제주도는 한라산이라는 화산으로 인해 태어난 달걀 모양의 섬입니다. 식민지 시절에는 제주도와 오사카를 잇는 ‘기미가요마루(君が代丸)’라는 이름의 연락선이 있었습니다. 자이니치 루트의 하나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의 친정은 지금의 제주공항 주변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요리집을 운영하느라 바쁘셨지만 아버지는 당신이 직접 공사에 참여했다는 둑방에서 낚싯줄을 드리우고 한복차림으로 거리를 걸으며 써서는 안 될 조선어로 생활했습니다. 일본의 지배에 대한 아버지 나름의 항의였던 것이겠지요. ‘비국민’이라 불러도 어쩔 수 없는 아버지와는 대조적으로 나의 ‘황국신민화’는 순조로운 진전을 보였습니다. 조선인 아이들이 다니는 공립보통학교(소학교)에 다녔습니다. 3학년 때부터 조선어 수업이 없어지고 조선어를 쓸 수 없게 되었지만, 일본의 창가나 군가에 익숙했던 나는 아무런 지장도 없었습니다. 중일전쟁이 시작되자, 난징 함락을 축하하는 제등행렬에도 힘차게 뛰어들었습니다. 일본인 교장선생님과 선생님은 식민지 조선의 아이들을 뼛속까지 ‘천황의 적자(赤子)’로 만드는 것이 사명이었고, 나는 천황을 ‘현인신’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매월 8일은 ‘다이쇼호타이비(大詔奉戴日, 중일전쟁 중, 국민정신 총동원운동의 일환으로 생활 규제, 전의(戰意) 고양을 꾀했던 날-옮긴이 주)’가 되었고 아침 조례 때 의식을 행했습니다. 동방요배(東方遙拜), 황국신민의 맹세, ‘기미가요(君が代)’, ‘우미 유카바(海ゆかば)’ 제창. 12월 8일은 음력으로 내 생일이기도 해서 나는 그것이 매우 자랑스러웠습니다. 주민이 총출동하는 신사참배도 이 날 있었습니다. 엉망진창 제각각인 참배 행렬을 보면서 완전히 황국소년이 된 나는 ‘이래가지고는 전쟁에 이길 리가 없다’고 걱정하기도 했습니다. 내 자신을 돌아보며 교육이란 정말 무서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아사히신문>, 2019년 7월 19일(금), 3회차.조선이 내 안에서 되살아났다열일곱 살이던 나는 한반도 남서부, 광주에서 교사를 양성하는 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여름방학을 맞아 제주도로 돌아갔을 때, 청천벽력 같은 ‘해방’과 마주했습니다. 황민화 교육이 뼛속까지 침투하여 ‘천황의 방패’가 되어 천황폐하께 목숨을 바칠 각오까지 되어 있던 나였습니다. ‘만세, 만세!’ 하며 온 거리가 환희로 들끓고 있을 때, 나는 홀로 일본의 군가와 창가를 부르며 풀이 죽어 있었습니다. 해방이 되어 조선인으로 되돌려진 사실에 아연했던 내 입에서 무의식적으로 흘러나온 노래는, 조선어로 된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미국민요)이었습니다.내 사랑아, 내 사랑아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 늙은 애비 혼자 두고영영 아주 갔느냐어린 시절, 제주항 제방에서 낚싯줄을 드리우던 아버지 무릎에서 듣던 노랫말이 나의 살과 피 속에 깃들어 있었습니다. 조선이 내 안에 되살아난 것입니다. 이윽고 식민지 통치의 가혹함을 알게 되면서, 나

0좋아요 URL복사 공유
현재 댓글 0
댓글쓰기
0/300

사람과 삶

영상으로 보는 KNOU

  • banner01
  • banner01
  • banner01
  • banner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