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추를 하루 앞둔 일요일, 「교육철학」 출석 수업을 6시간 받았다. 나는 맨 앞줄에 앉았다. 시력도 청력도 약하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어떤 교수님이 공부 잘하기 위해서는 앞자리에 앉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귀띔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수업이나 평가 때나 관성처럼 나는 항상 앞자리에 앉았다.
철학 교수님은 영상 매체를 아예 접고 칠판에 분필로 목차를 써가며 강의했다. 동서 좌우로 고전을 끌어다가 철학 이론을 폭넓게 짚어 냈다. 소크라테스가 40년 동안 현명한 사람을 찾아 다녔다는 이야기로부터 장자에 나오는 절름발이 왕태 이야기까지 맛깔스러운 강의였다. 나는 졸림도 잊고 귀를 쫑긋 세워 경청했다. 시계가 남쪽 벽에 걸려 있건만 그는 휴대전화에 끝종 알람을 저장해 교탁 위에 놓고 수업에 열중했다.수업은 ‘장님과 코끼리’ 우화로부터 시작했다. 동기유발이 호기심을 자극하고 강렬했다. 장님들의 설명이다. 코끼리 몸뚱이를 만진 사람은 벽이라고, 다리를 만진 사람은 기둥이라고, 꼬리를 만진 사람은 끈이라고 대답했다. 올바른 인식이라 말 할 수 없다. 내가 왜 장님이냐 이처럼 제마다 사물에 대한 견해가 다를 수 있다.
인간은 편견을 떨치고 보편적 판단을 가지도록 배우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철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올바른 인식을 갖기 위해서 배우는 것이다. 굽은 나무가 도끼에 잘리지 않고 오래 살아 남아 사람들에게 큰 그늘을 만들어 주는 ‘무용지용(無用之用)’처럼, 철학은 우리에게 삶에 직접적인 필요가 없는 학문 같지만, 올바르게 인식하는 데 쓸모 있는 학문이라는 설명이었다. 교수님은 이렇게 교육철학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암기교육의 중요성에 관해서도 대학원 시절의 경험을 빌려 실감 있게 들려줬다. 글쓰기를 못한다고 교수로부터 핀잔을 듣고, 그의 벌충으로 『대학』 『중용』에 나오는 문장들을 줄줄이 암기했다고 한다. 소리꾼이 심청전을 완창 하듯 교수 앞에서 1시간 20분을 소요하며 『대학』의 문장을 암송했다는 것이다. 그 후부터 문리가 터지고 글쓰기에 전이가 되어 술술 잘 쓸 수 있게 됐다고 덧붙였다. 그 『대학』의 첫 문장이다. “大學之道는 在明明德하고 在新民하며 在止於至善이니라(대학의 도는 밝은 덕을 밝힘에 있고, 백성을 새롭게 함에 있으며, 지극한 선에 이르러 그침에 있다).” 대학의 배움은 지극한 선에 이르는 공부다. 교수님은 이렇게 간간이 『대학』과 『중용』에 나오는 좋은 문장들을 인용하면서 농밀하게 수업을 진행했다.
20세기 현대 교육철학의 종류에 대해 진보주의 교육철학, 본질주의 교육철학, 항존주의 교육철학, 실존주의 교육철학의 갈래를 터 주었고, 후기 포스트모던 교육철학에 대해서도 설명을 이어갔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사르트의 실존주의 철학에 방점을 찍으면서, 빅토르 위고의 명저인 『레미제라블』을 예를 들면서 교육에서 만남의 의미를 중요시 했다. 그는 청산유수의 열정적인 강의에 목도 안 아픈지, 호명하면 대답과 동시에 손을 들어 달라고 했다. 매시간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의 시구처럼, 22명의 이름을 한 사람 한 사람 불러주었다.
『중용』을 다 암기했다는 교수에게 나는 엉뚱한 심기가 슬며시 발동했다. “교수님, 수강생 22명의 이름을 다 외우셨지요 ” 물었다. 학우들은 뜬금없는 나의 조크에 “와~ ”하고 한바탕 폭소했다. 교수는 빙그레 웃으며 “그것은 아니고요”라고 대답했다. 매시간 출석 체크를 하게끔 한 수업규범 조항이 있는 것 같았다.수업이 끝나고 나는 교수 앞에 나가 허리를 굽혀 “교수님, 고맙습니다.” 인사를 올렸다. 인사말 속에는 좋은 수업을 받았다는 함축이 있다. 집에 돌아오는 발걸음이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즐거웠다. 델포이 신전에 새겨진 ‘너 자신을 알라’는 명구처럼 나는 모르는 것이 너무도 많다. 남은 시간이 얼마 안 되는 몽당연필이지만,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팔순의 나이에도 방송대학에 다니고 있다. 이 출석수업 하루의 학습 소묘(素描)도 분명 내가 교육 받은 하나의 만남이다.
철학 교수님은 영상 매체를 아예 접고 칠판에 분필로 목차를 써가며 강의했다. 동서 좌우로 고전을 끌어다가 철학 이론을 폭넓게 짚어 냈다. 소크라테스가 40년 동안 현명한 사람을 찾아 다녔다는 이야기로부터 장자에 나오는 절름발이 왕태 이야기까지 맛깔스러운 강의였다. 나는 졸림도 잊고 귀를 쫑긋 세워 경청했다. 시계가 남쪽 벽에 걸려 있건만 그는 휴대전화에 끝종 알람을 저장해 교탁 위에 놓고 수업에 열중했다.수업은 ‘장님과 코끼리’ 우화로부터 시작했다. 동기유발이 호기심을 자극하고 강렬했다. 장님들의 설명이다. 코끼리 몸뚱이를 만진 사람은 벽이라고, 다리를 만진 사람은 기둥이라고, 꼬리를 만진 사람은 끈이라고 대답했다. 올바른 인식이라 말 할 수 없다. 내가 왜 장님이냐 이처럼 제마다 사물에 대한 견해가 다를 수 있다.
인간은 편견을 떨치고 보편적 판단을 가지도록 배우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철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올바른 인식을 갖기 위해서 배우는 것이다. 굽은 나무가 도끼에 잘리지 않고 오래 살아 남아 사람들에게 큰 그늘을 만들어 주는 ‘무용지용(無用之用)’처럼, 철학은 우리에게 삶에 직접적인 필요가 없는 학문 같지만, 올바르게 인식하는 데 쓸모 있는 학문이라는 설명이었다. 교수님은 이렇게 교육철학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암기교육의 중요성에 관해서도 대학원 시절의 경험을 빌려 실감 있게 들려줬다. 글쓰기를 못한다고 교수로부터 핀잔을 듣고, 그의 벌충으로 『대학』 『중용』에 나오는 문장들을 줄줄이 암기했다고 한다. 소리꾼이 심청전을 완창 하듯 교수 앞에서 1시간 20분을 소요하며 『대학』의 문장을 암송했다는 것이다. 그 후부터 문리가 터지고 글쓰기에 전이가 되어 술술 잘 쓸 수 있게 됐다고 덧붙였다. 그 『대학』의 첫 문장이다. “大學之道는 在明明德하고 在新民하며 在止於至善이니라(대학의 도는 밝은 덕을 밝힘에 있고, 백성을 새롭게 함에 있으며, 지극한 선에 이르러 그침에 있다).” 대학의 배움은 지극한 선에 이르는 공부다. 교수님은 이렇게 간간이 『대학』과 『중용』에 나오는 좋은 문장들을 인용하면서 농밀하게 수업을 진행했다.
20세기 현대 교육철학의 종류에 대해 진보주의 교육철학, 본질주의 교육철학, 항존주의 교육철학, 실존주의 교육철학의 갈래를 터 주었고, 후기 포스트모던 교육철학에 대해서도 설명을 이어갔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사르트의 실존주의 철학에 방점을 찍으면서, 빅토르 위고의 명저인 『레미제라블』을 예를 들면서 교육에서 만남의 의미를 중요시 했다. 그는 청산유수의 열정적인 강의에 목도 안 아픈지, 호명하면 대답과 동시에 손을 들어 달라고 했다. 매시간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의 시구처럼, 22명의 이름을 한 사람 한 사람 불러주었다.
『중용』을 다 암기했다는 교수에게 나는 엉뚱한 심기가 슬며시 발동했다. “교수님, 수강생 22명의 이름을 다 외우셨지요 ” 물었다. 학우들은 뜬금없는 나의 조크에 “와~ ”하고 한바탕 폭소했다. 교수는 빙그레 웃으며 “그것은 아니고요”라고 대답했다. 매시간 출석 체크를 하게끔 한 수업규범 조항이 있는 것 같았다.수업이 끝나고 나는 교수 앞에 나가 허리를 굽혀 “교수님, 고맙습니다.” 인사를 올렸다. 인사말 속에는 좋은 수업을 받았다는 함축이 있다. 집에 돌아오는 발걸음이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즐거웠다. 델포이 신전에 새겨진 ‘너 자신을 알라’는 명구처럼 나는 모르는 것이 너무도 많다. 남은 시간이 얼마 안 되는 몽당연필이지만,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팔순의 나이에도 방송대학에 다니고 있다. 이 출석수업 하루의 학습 소묘(素描)도 분명 내가 교육 받은 하나의 만남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