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의 김 이사는 건실한 중견기업에서 일한다. 대기업에 입사했던 대학 동기들이 명예퇴직해 ‘뒷방 늙은이’로 전락한 것과는 달리 승승장구하고 있다. 몇 해 전에는 한 학기 등록금이 천만 원에 육박하는 유명 대학의 EMBA(Executive-Master of Business Administration) 과정을 졸업하기도 했다. 물론, 시간과 학비는 회사의 후원을 받았기에 가능한 결과였다. 배움 덕분인지 직원들의 존경을 받는 그의 성품 덕인지 프로젝트는 대성공을 거뒀다.
이로 인해 부장에서 이사로 승진했을 뿐만 아니라 회사의 사활을 건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하게 됐다. 몇 번의 위기를 극복하고 무사히 사업을 이끈 김 이사는 한 가지 중요한 생각에 도달했다. 새로운 상품기획이나 시장의 변화 요인 등을 넓고 깊은 시각으로 파악하려면 인문학적 지식이 꼭 필요하다는 것. 공대를 졸업한 김 이사는 여러 평생교육기관을 알아보다가 먼저 졸업한 와이프의 권유로 방송대에 입학했다.
인문학에 대한 열정과 재미, 다양한 계층과 직업 그리고 배경을 가진 학우들이 스터디를 꾸려 하는 대학 공부는 색다른 즐거움이었다. 한 학기가 지나자 친한 학우의 교재를 빌려 스캔한 후 태블릿 PC에 저장해 들고 다니며 자투리 시간에 틈틈이 공부하는 선배들을 벤치마킹했다. 그 결과 졸업할 때는 성적 우수로 총장상을 받는 영광을 꿰차기도 했다. 그는 이제 회사의 총괄부사장 승진을 목전에 두고 있다.
‘옥’과 같이 아름다운 김 이사의 이야기에 ‘티’를 발견한 이는 누구인가? 필자는 지난 10월 26일부터 2박 3일 동안 한국대학출판협회의 연수에 다녀왔다. 여러 프로그램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강연은 단연코 저작권에 관한 것이었다. 책을 기획하고 편집하는 나에게는 당연히 흥미로웠다. 그러나 이 주제는 나뿐만이 아니라 방송대 학우들에게도 중요한 문제여야만 한다. 사람들은 왜 책 복제를 영화나 미술 같은 예술작품 복제보다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일까?
책에 ‘아우라(aura)’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우라는 종교화에서 볼 수 있는 성인의 후광을 의미한다. 독일 철학자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복제품의 대량생산이 전통을 뒤흔들고 있다고 분석했다. 즉, 진품(원본)의 고유성이 내포된 아우라만이 그 어떤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예술작품의 정체성이라는 것이다.
책은 초판은 있어도 진품은 없다. 예술작품은 작가가 창조한 단 하나의 제작물을 토대로 사진, 기념품 등 다양한 방식으로 대량 복제된다. 그러나 책은 작가의 원고를 편집자가 가공한 이후부터, 말하자면 처음부터 대량 복제(인쇄)로 생산된다. 그래서 예술작품보다 복제하는 게 양심에 덜 찔린다고? 공부를 중요시하는 우리나라에 오죽하면 ‘책 도둑은 도둑이 아니다’라는 말도 있다고? 종이책을 스캔해 태블릿 PC에 저장하는 행위는 얼마든지 용서할 수 있는 일이라고?
책에도 예술작품 못지않
장빛나 출판문화원 교양출판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