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서구지성사와 만나다

10회까지 연재 목차
① 도입: 왜 서구지성사인가?
② 플라톤의『국가』: (1) 고대 그리스의 맥락
③ 플라톤의『국가』: (2) 정의와 공동체
④ 중세 정치사상: (1) 중세란 무엇인가
⑤ 중세 정치사상: (2) 중세 정치사상의 변화
⑥ 르네상스와 정치이론의 변동: (1) 르네상스 인문주의
⑦ 르네상스와 정치이론의 변동: (2) 마키아벨리와 그의 시대
⑧ 16세기 종교개혁과 그 이후
⑨ 17~18세기 유럽 공화주의와 자연법: (1) 공화주의 정치 언어
⑩ 17~18세기 유럽 공화주의와 자연법: (2) 자연법 전통

 

 

근원에서 시작하자.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다양한 답변이 가능하겠지만, 인간이 말을 통해 살아가는 존재, 조금 더 나아가자면 언어를 통해 생각하고 소통하는 존재라는 규정에는 대체로 동의할 것이다. 나는 여기에 시간과 역사라는 요소를 덧붙이고 싶다. 역사 속의 인간들은 언어를 통해 무엇을 해왔는가? 그들은 어떤 생각을 남겼고, 무슨 대화를 나눴으며, 서로를 어떻게 설득 혹은 논박하고자 했고, 나아가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또 바꿨는가? 그러한 시도가 성공 혹은 실패한 까닭은 무엇이었나? 지성사 연구는 바로 이러한 의문에 답변하고자 하는 열망으로부터 출발한다.

이 연재는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에서 시작,

중세와 르네상스·종교개혁을 거쳐
18세기 전후의 거대한 변화를 살펴보고,

19세기와 20세기를 지나 오늘날 우리 자신이 속한
시대의 쟁점으로까지 향할 예정이다.

문명사를 아우르는 긴 여정의 나날을 가늠해 보며,
그 끝에서 우리 모두 아주 약간은

조금 더 현명한 존재가 되어있기를 소망한다.

 

지성사의 모험
앞선 이들이 남긴 말을, 특히 사상가 혹은 문인의 행적을 기록하는 시도 자체는 오랜 연원을 지니고 있다. 플라톤과 크세노폰을 비롯한 소크라테스의 제자들은 (자신의 의도를 투사해) 스승 및 당대인들의 언행을 기록했으며, 기독교 성경의 구약은 고대 유대 사회의 법과 말을 담고 있다. 기원 후 3세기경 활동한 것으로 알려진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오늘날 최초의 서양철학사 저작 중 하나로 남아있는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을 남겼다.
물론 우리는 단순히 과거사를 기록하는 일로서의 역사와 학문적인 탐구로서의 역사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유감스럽게도 아직 한국에서는 스스로를 식자층이라 생각하는 이들조차 종종 둘을 구분하지 못한다). 서구에서 단순한 과거 기록으로서의 역사만이 아닌 역사학적 접근법으로서의 지성사가 출현하는 과정은 어느 정도 설명이 필요하다.
과거의 언어와 사상을 역사적 대상으로 바라보는 태도의 출발점으로 흔히 꼽히는 것은 르네상스 인문주의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래 중세 유럽의 문인들은 고대 그리스·로마인들이 남겨놓은 문헌을 귀중한 지식의 원천으로 간주했다. 마찬가지로 고대의 저자들을 숭상했던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에겐 한 가지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과거의 자료를 문헌학적으로 엄밀하게 검토하는 문헌비평 기법의 확산이었다.
이는 과거 저자들이 속해 있던 세상이 현재 해석자들이 살고 있는 세상과 다를 수 있으며, 나아가 과거의 글을 올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어떠한 문맥에서 집필됐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는 인식, 즉 역사적 차이에 대한 인식과 닿아있었다.
물론 문헌비평 기법의 발달이 곧바로 전문적인 학문 분과로서 역사학의 등장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역사학이 ‘근대적인’ 학문으로 성립하는 과정, 단적으로 역사학이 하나의 고유한 학문 분과로 인정받기 시작하고, 연구에서는 문서고(archive)의 활용이 일상화되며, 무엇보다 스스로를 ‘역사학자’로 규정한 연구자들의 등장 등 변화가 나타난 곳은 19세기 독일의 대학이었다.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레오폴트 폰 랑케 이래 독일의 역사학자들은 실증적인 문헌비평을 주축으로 역사학의 전문화를 이끌었다. 독일 역사주의 학파의 마지막 계승자 프리드리히 마이네케가 내세운 ‘이념사(Ideengeschichte, 정신사Geistesgeschichte라고도 한다)’의 모델에서처럼 이들의 관심 범위에는 사상사가 포함돼 있었다.
마이네케 자신의 사례에서처럼 이념사적 연구는 각 시대에 따라 시대를 결정하는 어떤 원리가 존재한다는 전제를 받아들였다. 그에 따르면 사상가들은 그러한 시대적 원리를 반영하는 존재였다. 동시에 이념사 연구자들은 소수의 대표적인 사상가를 뽑아내어 그들의 작업을 통해 시대의 원리를 읽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시대마다 지배적인 원리가 존재하며, 인간의 말과 생각이 그러한 구조의 파생물이라는 믿음은 20세기 중반까지 서구의 역사학자들을 사로잡았다. 특히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을 비롯해 역사를 ‘생산양식’이나 ‘구조’와 같은 거시적인 요인으로 환원하려는 이들이 주류를 점하면서 지성사는 주변부에 머물러야 했다.
현대적인 지성사 연구의 등장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여기에 답하기 위해서는 20세기 중반 이래 서구 역사학계가 맞이했던 변화 두 가지를 지적해야 한다.
하나는 역사학계의 전문화 및 분업화다. 세계대전이 끝난 뒤 고등교육의 팽창과 함께 훈련받은 역사학자의 수가 급격히 증대했으며, 이들은 철학, 지리학, 사회학, 인류학 등 타 학문의 성과를 살펴보고 수용하기 시작했다. 이는 국가·문명 중심의 전통적인 역사학이 경제사, 문화사, 노동사, 여성·젠더사, 과학사를 비롯한 수많은 전문 역사학 분과로 나뉘는 결과로 이어졌다.
우리의 이야기에 좀 더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변화는 20세기 후반 서구 인문사회학계를 휩쓴 ‘언어적 전회(Linguistic Turn)’다. 부분적으로는 역사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예언과 달리 진행됨에 따라, 학자들은 경제적·물질적 ‘토대’ 외에 언어, 문화, 정신, 무의식과 같은 ‘상부구조’의 작용에 주목하게 됐다. 독일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론, 프랑스의 구조주의 및 미셸 푸코, 영국의 문화연구 등이 그 대표적인 예다. 역사학계에까지 충격을 준 이러한 변화의 파도 속에서 현대적인 지성사 연구, 특히 케임브리지대학교의 역사학자들을 중심으로 한 언어맥락주의(linguistic contextualism)는 마르크스주의 및 자유주의 등의 거대한 사조에 도전장을 내밀 수 있었다.

언어맥락주의와 서구 근대의 재해석
영어권 역사학계 내에서 바라볼 때 ‘케임브리지학파’의 언어맥락주의자들은 언어적 전회를 구성한 여러 흐름 중 가장 지속적이고 안정적인 성장을 이룩해왔다고 할 수 있다. 그 대표자 중 한 명인 퀜틴 스키너가 촉발한 광범위한 논쟁에서 드러나듯, 언어맥락주의자들은 분석적 언어철학과 문헌학적 교훈을 결합해 상당히 견고하고 직관적인 방법론을 구축했다. 이들의 접근법은 단순히 추상적인 논의에 머무르는 대신 17~18세기 서양 정치사상사 연구의 여러 통념을 뒤흔드는 풍부한 사례 연구로 이어졌다. 직관적인 방법론과 다양한 사례 연구의 결합은 후속 세대의 연구자들이 언어맥락주의를 큰 어려움 없이 수용하고 재생산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언어적 전회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포스트 이론들의 추상성을 상기할 때 이는 무시할 수 없는 이점이었다).
언어맥락주의자들은 가장 미시적인 검토에서 거대한 담론적 변화까지 다양한 층위의 역사 연구를 수행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기존의 해석에 도전했다. 높은 범용성 그리고 수정주의적 연구에 적합한 면모는 케임브리지학파 외부의 연구자들에게도 매력적인 것이었다. 오늘날 언어맥락주의적 접근법은 근대 초와 정치사상사를 벗어나 다양한 시대·주제를 다루는 연구자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스스로를 언어맥락주의자로 칭하지 않는 지성사·사상사가들 역시 맥락의 탐구에 깊은 주의를 기울인다.

20세기 서구 역사학의 가장 근본적인 물음 중 하나는 서구 근대를 어떻게 규정하느냐는 것이었다. 대표적으로 통속적인 자유주의는 이를 인간의 자유와 민주주의가 당연한 승리를 거두는 과정으로, 보수주의는 개인의 자유와 합리성의 지나친 발달로 인해 전통적인 공동체와 종교가 붕괴하는 흐름으로 규정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근대를 자본주의 생산양식이 패권을 잡고 착취적인 자본가와 노동계급 사이의-최종적으로는 후자가 승리할-대결이 펼쳐지는 시대로 보았다. 정치적 지향의 차이와 별개로, 다수의 역사가·사상가는 이와 같은 거대한 시대 규정에 기초해 근대의 사상을, 혹은 특정한 사상의 근대성을 이해하고는 했다.
케임브리지학파의 전성기를 이끈 역사가들, 예컨대 J. G. A. 포콕, 퀜틴 스키너, 존 던, 이슈트반 혼트, 리처드 턱, 던컨 포브스 등은 이러한 전제에 깊은 의심을 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서구의 근대/성이라는 범주 자체에 대한 문제의식은 유지하면서도, 이들은 각 시대의 행위자들이 실제로 무엇을 고민하고 어떤 목적을 지녔는지, 또 그러한 목적의 달성을 위해 어떠한 전략을 고안했는지를 그들 자신의 눈으로 살펴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연구가 축적될 때 우리는 개별 사상가들에 대한 이해를 갱신하는 것은 물론, 기존의 지배적인 통념과는 다른 근대의 복잡한 면모를 마주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그동안 축적된 지성사 연구가 바꾸어놓은 서구 근대의 풍경을 간략하게나마 소개하는 것이 「서구지성사와 만나다」 연재의 기획 의도다. 문화교양학과 「서구지성사입문」 과목의 순서를 따라 이야기는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에서 시작, 중세와 르네상스·종교개혁을 거쳐 18세기 전후의 거대한 변화를 살펴보고, 19세기와 20세기를 지나 오늘날 우리 자신이 속한 시대의 쟁점으로까지 향할 예정이다. 문명사를 아우르는 긴 여정의 나날을 가늠해 보며, 그 끝에서 우리 모두 아주 약간은 조금 더 현명한 존재가 되어있기를 소망한다.

 

서울대에서 18세기 잉글랜드의 계몽주의 등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18세기 영국의 지성사와 문학을 공부하고 있다.『지성사란 무엇인가?』를 번역했으며, 「‘서구 근대’의 위기와 한국 동아시아 담론의 기이한 여정」 등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다.

더 읽어볼 만한 글과 책
-리처드 왓모어 지음·이우창 옮김 , 『지성사란 무엇인가?』, 오월의봄, 2020.
-이우창, 「문인의 글쓰기와 지성사적 전기: 제임스 해리스, 『데이비드흄: 지성사적 전기』(2015)」, 『전기, 삶에서 글로』(교차 3호), 읻다, 2022.
-이우창, 「지성사 연구의 방법들: 담론 연구, 개념사, 언어맥락주의」, 〈역사와 현실〉 제128호,  2023.
-이우창 외 공저, 『서구지성사입문』 ,  방송대출판문화원,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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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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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0
  • nixz***
    교수님의 열정이 느껴집니다. 다음 회차가 기대 됩니다!
    2025-03-12 16:09:17
  • bang***
    서구지성사를 깊이 있게 알게 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2025-03-03 12:10:47

사람과 삶

영상으로 보는 KN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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