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음식과 권력

어떤 권력이든 인민의 배고픔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실패한 권력이다.

1925년 겨울 그리스의 문호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모스크바행 열차를 타고 있었다. 사회주의자였던 그는

혁명 러시아의 인민들이 먹을 걱정 없이

사람답게 살아가는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May the world be your oyster, and may the oysters taste good!”
사람은 누구에게나 선택의 자유가 있다. 위의 인용문에서 앞부분은 셰익스피어가 희극「윈저의 즐거운 여인들(The Merry Wives of Windsor)」에서 사용한 속담으로 “세상은 당신의 것, 무엇이고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란다”라는 의미로 읽힌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굴(oyster)은 영국인들의 인기 식품으로 상품 가치가 높았다. 인용문 후반은 점잖은 교양인의 표본인 뉴질랜드 지인 로스(Ross) 부부가 오랜 교직에서 물러나 은퇴 후의 삶을 살고 있을 필자를 위해 덧붙인 말이다. 인생에는 수많은 좋은 기회가 있으니, 희망을 잃지 말고 담대하게 살아갈 것을 당부하는 우정 어린 권고가 느껴진다. 음식과 권력을 주제로 3년여 세월 동안 칼럼 30회를 연재한 뒤의 에필로그의 도입부로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은 저마다 식성이 다르고, 좋아하는 음식도 제각각이다. 먹고는 싶은데 몸이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도 있다. 콩이나 팥은 물론 견과류를 조금이라도 섭취하면 알레르기 반응으로 호흡곤란이나 발작 증세를 보이는 사람도 있다. 사람은 하루 세 끼 식사를 꼭 해야 한다는 이가 있는가 하면, 늘 먹는 밥인데 한 끼쯤 거른다고 대수로울 게 있느냐며 여건 되는대로 음식을 먹는 사람도 있다.
‘사람은 밥심으로 산다’라는 말이 있다. ‘밥이 보약’이라고도 한다. 일정 부분, 아니 대체로 맞는 말이다. 음식을 섭취함으로써 삶을 영위할 에너지, 힘 또는 체력을 획득한다는 점에서 음식은 의당 삶의 필수 요소다. 적게 먹으면 인체가 필요로 하는 영양소 섭취가 부족해 질병에 취약하고 활력이 떨어진다. 형이상학적 차원에서 신의 존재가 절대 진리요 생명의 말씀이라면, 물리적 차원에서는 음식이 생명의 원천이자 가히 삶의 의미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그렇기에 단순히 살을 빼고 늘리는 차원의 식이요법(다이어트)이 아니라 약식동원(藥食同源, 약과 음식은 그 근본이 동일하다)의 원리적 접근을 통해 몸에 이롭고 해로운 식품을 구별해 질병에 대처하는 인간의 노력과 그 결실로서의 영양학, 의학 분야의 지혜는 숭고하기까지 하다. 인간에게 음식은 지극히 중요하다.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인류가 자연계의 피조물 중 단연 으뜸가는 만물의 영장이 되어 다른 존재들을 압도하며 군림하는 권력자가 된 것은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식량 확보에 성공한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도 지상의 인류 상당수는 식량부족으로 기아에 시달리고 있다. 물론 인류사에서 현재처럼 인간이 풍족하게 산 적은 없다. 그럼에도 전쟁은 더 자주, 더 여러 곳에서, 더 다양한 이유로, 갈수록 격렬하게 어제도 오늘도 진행 중이다. 빵이 인간을 행복하게 해주고 일시적 행복감, 잠시의 포만감을 선물할 수는 있지만, 선물의 효용적 가치는 무에 가깝다.

사람 사는 세상, 절대적 가치 지닌 것 없어
이기심이 발동하면 자신이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어떤 사사로운 약속이나, 국가 간 서약도 무시하고, 정의의 이름을 거짓 양심으로 앞세우고, 상대를 위협, 협박한다. 세간에서의 삶에 지치거나 회의가 들 때 혹은 우주의 철리(哲理)가 궁금할 때 결행력 있는 대장부는 출세간(出世間)의 사찰행을 선택한다. 오랜 공부와 수행 끝에 큰스님이 되고 법력이 높아지면, 게다가 참선 중에 깨달음을 얻었다는 소문이 돌면, 한때 그가 그랬듯 깨달음의 경지에 관심 많은 젊은 승려들이 제자 되기를 간청하며 수하에 모여든다.
이쯤 되면 발우(鉢盂: 스님들의 밥그릇) 공양(식사를 가리키는 불교 용어)에 익숙하던 진지한 얼굴에 수염이 자라고 윤기가 돈다. 뱃살도 스승을 공경하는 제자가 늘어나는 만큼 붙는다.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 최고의 깨달음)의 경지에 올라 사자후(獅子吼)를 쏟아내던 스승에게서 삼독심(三毒心, 세 가지 나쁜 마음: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되살아난다.
한 스승 밑에서 법우(法雨)를 함께 맞으며 진리의 차크라(chakra, 수레바퀴)를 함께 굴리는 도반들도 사람인지라 질시하고 화내고 한탄하는 경우가 있다. 발우에 붙은 밥 한 톨 때문에 시비가 붙을 수 있음이다. 군자라 해서 감정의 동요가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어제의 절친 이판승과 사판승이 의견이 갈라져 다투는 것도 사소한 감정의 마찰 때문이다. 인간은 절대 온전하지 않다. 사람 사는 세상에 절대적 가치를 지닌 것도 없다.
이 세상 영원한 것은 없다. 생로병사의 사고(四苦)에서 벗어나 영원한 젊음을 구가할 사람은 그 누구도 없음이다. 젊어서 막강한 권력을 쥔 누구라도 절대적인 것은 없다.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은 없다. 진리라는 것도 깨어질 것을 전제로 할 때 의미가 있다.

수행승들이 피하는 오신채
세계 4대 종교의 하나인 불교의 발상지는 인도로 알려져 있다, 정확히는 오늘날의 네팔 룸비니 동산에서 어머니 마야 왕비의 옆구리에서 태어난 카필라국의 왕자 고타마 싯다르타가 오랜 고행과 명상 끝에 보리수나무 아래서 터득한 삶의 요체가 불교다. 불교의 영어 표현 Buddhism은 다르마[達摩: 세상의 이치, 법, 진리를 깨우친 사람 즉 각자(覺者)]를 뜻하는 고대 인도어 붓다(buddha)에서 파생된 말이다. 붓다는 우리말에 들어와서는 부처로 변했다.
무엇보다 수행승들은 육식을 삼간다. 오신채(五辛菜: 마늘·파·달래·부추·흥거)는 물론 인공조미료를 사용하지 않는다. 오신채는 성정을 혼탁하게 하고 음욕을 자극해 수행에 방해가 된다고 하여 피한다. 승려들이 가장 많이 그리고 즐겨 먹는 음식은 국수다. 쫄깃한 면발의 식감과 따뜻한 국물이 최소한의 식욕을 충족시켜 주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찰에서는 국수를 승소(僧笑)라 부른다. 국수를 맛볼 생각에 미소가 저절로 지어진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불가에서는 음식의 소중함을 깨닫는 것을 중요한 일로 여긴다. 발우 공양의 기본은 한 방울의 물조차 천지의 은혜요, 한 톨의 곡식에도 만인의 공덕이 담겨 있음을 아는 것이다. 육식을 삼가는 이유는 살아있는 생명을 해하는 것을 금하는 불교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승려 집단이 육식을 안 하는 것은 아니다.
소승불교를 믿는 남방불교 국가인 태국이나 라오스, 미얀마, 캄보디아 등에서는 승려들이 아침 일찍 탁발에 나선다. 탁발은 공개적인 음식 동냥을 말하는데 음식 제공자의 선의에 모든 것을 맡기는 금욕주의적 수행의 하나다. 이런 탁발은 가톨릭의 프란체스코와 도미니코 탁발수도회, 이슬람교 수피파의 데르비시, 인도의 자이나교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슬람 신비주의인 수피파의 데르비시(dervish: darvish라고도 함)는 청빈을 서약하고 고행을 통해 수행하는 인물로 가톨릭 수도사와 다소 비슷하다. 소용돌이 춤을 추는 터키 메블레브 교단의 수피가 대표적 데르비시다.
탁발 음식을 가리지 않고 먹는 것이 수행의 방편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에, 탁발 문화가 남아 있는 남방불교에서는 오신채를 금하지 않는다. 석가모니도 탁발 중에 고기 음식이 들어오면 그걸 버리지 않고 묵묵히 먹었다. 살생을 통해서 얻은 고기는 정육이 아니라고 금했다. 그러나 수행으로 몸이 아플 때는 육식을 권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일본의 스님들은 용맹정진으로 탈진 지경에 이르면 장어 요리로 기력을 회복한다.
일찍부터 발달한 한국의 사찰음식
우리나라는 산중 사찰이 많고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음식 공양이 적기 때문에 사찰음식이 일찍부터 발달했다. 스님들의 밥상에 오르는 대표적인 음식에는 두부 요리, 산나물, 각종 장아찌, 산채 비빔밥, 해조류 등이 있다.
부처는 살생을 금할 것을 오계의 하나로 삼았다. 이는 당연히 육식 금기로 이어졌고 승려들이 고기를 대체할 음식들을 찾는 과정에서 태어난 것이 두부다. 어느 곳, 누구에게나 음식은 건강과 생존에 필요하다. 이에 따라 세속을 벗어난 수도승 사회에서도 지역과 계절, 재료 등에 따른 고유한 사찰음식이 만들어졌다. 근래에는 수입 먹거리들을 이용한 이색적인 퓨전 사찰 요리로 개발돼 일반인들은 물론 한국문화에 관심이 있는 외국인들에게 친환경 건강식품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
인간이 모여 사는 세상에는 온갖 역설이 존재한다. 경쟁에서, 전투에서 진다는 것은 죽거나 승자에게 내키지 않는 굴종이나 복속의 처지로 전락함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개체든 집단이든 다른 개체 혹은 집단과 대립 관계에 놓인 삶을 살면서 끝없이 불화와 갈등을 겪는다. 그런 와중에도 생존에 필수적인 음식의 공급과 확보를 자신의 노력보다 상위의 빅토리 그룹에 의존하려는 약삭빠른 면모를 보이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아이러니는 너그러움을 가장한 패배자의 위선을 감추고 있는 셈이다.
어떤 권력이든 인민의 배고픔을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실패한 권력이다. 1925년 겨울 그리스의 문호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모스크바행 열차를 타고 있었다. 사회주의자였던 그는 혁명 러시아의 인민들이 먹을 걱정 없이 사람답게 살아가는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2012년 겨울 저녁 나는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 서 있었다. [끝]
영어학자이지만, 뒤늦게 중앙아시아사를 공부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차와 여행을 좋아해 『茶의 고향을 찾아서』『문명의 뒤안 오지 사람들』『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 초원에서 흑해까지』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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