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5일 오후 3시, 인천에 거주하는 박종창 동문과 안숙희 20·21대 인천총동문회장, 이병호 22대 인천총동문회장, 이규항 인천지역대학 행정실장 등이 고성환 총장을 찾아왔다. 찾아온 이유는 간단했다. 발전기금 2천만 원을 기탁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날 기탁식은 여느 때와 달랐고, 시종일관 숙연했다. 사연이 있었다.

고 이태승 동문이 남긴 유지인 대학 발전기금 기탁이 가족들에 의해 이뤄졌다.
인천지역대학과 인청총동문회 행사에 빠지지 않고 참여
학보 KNOU위클리 동문통신원으로 적극 활동
방송대 권유해 60여 명 넘게 입학하기도
1년간 암투병, 타계 전 유지로 대학 발전기금 2천만 원 기탁 밝혀
인천총동문회 장학위원회에도 1천만 원 기부
생전에 ‘발전기금 기탁’ 뜻 밝혀
1991년 방송대 행정학과를 시작으로 영어영문학과(2000~2014), 관광학과(2018~2020), 중어중문학과(2021~2024)를 졸업하고, 2020년 11월부터 방송대학보 〈KNOU위클리〉 인천 동문통신원으로 활동하다 지난 2024년 10월 7일 소천한 고 이태승 동문이 이날의 진짜 주인공이다. 외종숙인 이 동문을 대신해 기탁식에 참석한 박종창 동문은 “고인께서는 방송대와 관련된 일이라면 빠지지 않았다. 1년간 투병 생활을 하면서도 방송대 행사가 있으면 병원에서 나와 참석하시곤 했다. 집에서 막 뭐라 그러는데도 그렇게 하셨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학교에 깊은 애정을 보이셨다”라고 말했다.
기탁식에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이태승 동문의 누이동생도 기자에게 “오빠는 암 진단을 받았을 때부터 얼마 못 살 거라고 생각했다. 학교에 기부하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다. 고인의 뜻을 받들어 가족들 모두가 발전기금 기탁에 동의했다”라고 사정을 전했다.
고인의 생전 모습을 뚜렷하게 기억하는 안숙희 회장은 “이태승 동문은 20대 후반부터 방송대와 인연을 맺어 인천지역대학이나 동문회와 관련된 일이라면 늘 빠지지 않았다. 인천총동문회에 장학위원회를 만들 때 자문위원으로 모셨는데, 정말이지 역할을 잘해 주셨다. 방송대에 대한 사랑이 굉장히 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고인께서 발전기금 기탁 유지를 남기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생전에도 학교 사랑이 컸는데, 돌아가시면서도 고결한 뜻을 남겨 주셨다”라고 말했다.
이병호 회장도 “원체 성격도 조용하고 앞에 나서기보다 뒤에서 묵묵히 일하는 스타일이었다. 여러 학과를 거치면서 주변 이들에게도 방송대 입학을 적극 권유해 60여 명 넘게 신·편입한 걸로 알고 있다. 이번에 학교에도 기부했지만, 저희 인천총동문회 장학위원회에도 1천만 원을 후원했다. 고인의 뜻을 후배들에게 잘 전달할 계획이다”라고 전했다.
29세에 만난 방송대와 33년 동행
사실 박종창 동문은 외종숙인 이태승 동문과는 ‘관광학과’에서 같이 공부한 ‘동학’이다. 조카는 인천지역대학 행사에서 우연히 삼촌을 만났다. 박 동문은 그 순간을 이렇게 회상했다.
“깜짝 놀라서 여기 웬일이냐고 물었더니, ‘나 방송대 또 다녀’ 이렇게 말씀하셨다. 졸업하신 걸로 알았는데, 관광학과에 편입한 줄은 몰랐다. 그 후로는 같이 행사나 답사를 다녔다. 그때마다 사진도 찍어주시고, 공부도 챙겨주셨다. 관광학과를 제가 먼저 졸업했는데, 외종숙께서는 졸업 후 다시 다른 학과에 도전하셨다. 언제나 방송대가 1순위였다.”
그렇다면 이태승 동문의 방송대 인연은 언제 시작됐을까? 그가 남긴 글과 주변 지인들의 이야기를 모아보면 이렇다. 1981년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 입시와 공무원 시험 등을 준비하며 몇 년간 도서관 생활을 할 때 방송대 존재를 알게 됐지만, 당시에는 인연이 이어지지 않았다. 그는 이 시기를 “부친의 타계와 미취업으로 혼란하던 시절”이라고 불렀다.
대학 진학 대신 직장생활을 시작했지만, “30세 이전에 방송대를 들어가지 못하면 영원히 대학 근처도 못 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어머니를 통해 고등학교 졸업 증명서를 떼고, 직장 동료에게 대신 원서 접수를 부탁해 마침내 1991년 행정학과에 입학했다. 1991년 행정학과 입학은 이태승 동문을 뼛속 깊이 방송대 사람으로 만드는 계기가 됐다.
집이 인천이어서 출석수업은 인천에서 했지만, 주말마다 대학본부와 중앙도서관이 있는 동숭동을 찾았다. 학과 사무실도 방문하고, 학교 주변 서점도 둘러보고, 특강도 들었다. 이 시기에 그는 본인의 공부는 물론 다른 학우들의 학습을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가 공부하던 무렵 행정학과는 5년제였는데, 8년 만에 힘들게 졸업할 수 있었다. 새벽까지 책을 보며 공부하는 날이 허다했고, 지사 발령으로 휴일 근무 조정이 힘들어서 주말에 치뤄지는 시험을 제대로 볼 수 없었고, 경쟁사와의 경쟁이 치열해져 직장생활로 하루가 빠듯했다.
이태승 동문은 방송대를 다니면서 한 가지 더 꿈을 꾸게 됐다. 대학원을 졸업한 후 방송대 외부강사(겸임교수)로 후배들을 가르치고 싶다는 꿈이었다. 그러나 직장생활의 어려움이 커 결국은 대학원 진학을 포기하고 말았다. 그 대신 다양한 공부로 눈을 돌렸다. 그가 4개 학과를 공부한 배경이다.

2020년 11월 전국동문통신원 발대식에서 통신원 위촉장을 받은 고 이태승 동문. 지난 3월 5일, 그와 관광학과에서 같이 공부했던 조카인 박종창 동문이 학교를 찾아 발전기금 기탁식을 가졌다.
삶은 훨씬 더 고결하다!
2022년 11월, 중어중문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그는 학보 위클리의 ‘마로니에’ 칼럼에 이렇게 썼다.
“기억이 흐릿하나 주변의 지인들 수십 명에게 방송대 입학을 권유하고 졸업할 수 있게 안내한 것 같다. 올해도 인천시민대학에 다니며 여러 강좌를 수강하고, 시니어모델 과정도 수료했다. 같이 수강하는 분들에게도 방송대를 홍보하고 다니고 있다. 올해 환갑, 인생의 반을 방송대와 함께했다. 방송대는 나의 삶에서 한 축을 이루고 있다. 그다음 도전도 기대된다.”(「20대 후반부터 이어진 나의 도전」, 마로니에, 〈KNOU위클리〉, 제149호, 2022.11.14.)
동문통신원으로 활동하던 그가 학보에 송고한 마지막 기사는 2023년 10월 9일(인터넷판 기준)의「인천총동문회, 재학생들에게 장학금 지급」이란 기사였다. 그의 손길이 닿은 기사는 실제로는 더욱 많다. 다른 동문통신원에게 기회를 주고 자신은 뒤에서 조용히 도왔다.
고성환 총장은 “생전에 학교 사랑을 실천한 고인의 뜻을 깊게 받아들인다. 고인의 유지를 실천해 주신 유족분들에게 감사드린다”라고 말했다.
기자는 2020년 11월 7일 동문통신원단 발대식에서 이태승 동문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데이터박스를 한참 뒤지다가 간신히 그의 사진을 찾아낼 수 있었다. 흐릿한 사진 속에서 그는 빙긋 웃고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이기철 시인의「봄밤」이란 시가 겹쳤다.
잊혀지지 않은 것들은 모두 슬픈 빛깔을 띠고 있다
숟가락으로 되질해온 생이 나이테 없어
이제 제 나이 헤는 것도 형벌인 세월
낫에 잘린 봄풀이 작년의 그루터기 위에
또 푸르게 돋는다
여기에 우리는 잠시 주소를 적어두려 왔다
어느 집인들 한 오라기 근심 없는 집이 있으랴
군불 때는 연기들은 한 가정의 고통을 태우며 타오르고
근심이 쌓여 추녀가 낮아지는 집들
여기에 우리는 한 줌의 삶을 기탁하려 왔다
―이기철, 「봄밤」 중에서
그렇다. 형벌 같은 불행 속에 있다고 해도, 그래서 한 오라기 근심 가득한 삶의 길목 위에서 비틀거릴지라도, 삶은 그것들보다 훨씬 더 고결한 것임을 이태승 동문의 종생기가 보여주고 있다.
최익현 선임기자 bukhak@kno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