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삶   횡단하는 자유인, 유라시아 한국학 대모 정진원 동문(중문·일본)

“방송대는 학생으로, 또 강사로 인연이 깊은 곳이죠. 전공 공부를 하면서 1986년 중문학과에 입학해 1991년 졸업했고, 2017년엔 일본학과에 입학해 지난 2월 마쳤어요. 박사학위를 받은 뒤 1995년부터 4년간 방송대에서『언어학개론』을 강의했고요.”
‘유라시아 한국학 대모’로 불리는 정진원 교수의 방송대 인생에는 김현권 프랑스언어문화학과 명예교수와의 인연이 깊게 자리한다. 학부에서 소쉬르와 주시경을 비교 연구하는 논문을 준비하던 그에게 소쉬르 전공자인 김 교수는 가뭄 속 단비와 같은 존재였다. 언어에 관심이 많던 그는 김 교수를 통해 더 넓은 공부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지금까지도 서로 만나면 학문적 주제로 몇 시간씩 대화를 나눈다고 한다.

이제는 K-클래식이 필요한 시점
인문 고전이 K-문화의 토대

방송대는 상상하지 못한
세상을 만날 수 있는 기회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걷다
『석보상절』,『월인석보』를 전공한 국어학자인 정 동문에게 튀르키예와 한국 정부로부터 튀르키예 최초의 한국학과 설립을 위한 적임자로 선정되는 기회가 찾아왔다. 원래 한국어의 뿌리를 연구하는 계통론을 전공하고 싶었던 차에 튀르키예어는 ‘알타이제어설’의 첫 번째 나라여서 기쁘게 선택했다. 2000년 튀르키예 국립에르지예스대학교에 한국학과가 설립됐다. 그는 이 설립 과정에 깊이 참여하면서 2년간 교수 생활을 했다. 이후 20년이 지나 2021년부터 방송대 일본학과 졸업 직전까지 다시 이 학과에서 객원 교수로 근무했다. 그 사이 2010년에는 헝가리 부다페스트 엘테대학교 한국학과에서 객원 교수로 가르쳤다. 헝가리어도 언어학자인 그의 관심 대상이어서 선택한 나라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후 매년 유라시아 전역을 돌면서 현지 대학에서 특강을 했고, 국제컨퍼런스에 참여해 한국학과 관련된 발표를 해왔다. 유럽한국어교육자협의회(EAKLE), 중동유럽한국학회(CEESOK) 회원과 고문을 거쳐 지금도 현역으로 참여하고 있다. 해외 현지 체험으로 다져진 그의 한국학 시계(視界)에서 나오는 통찰은 경청할 대목이 많다.  
“2000년 한국학이라는 말이 없을 때부터 한국학을 주창하고 해외를 다녔어요. 지금 유럽 학생들이『석보상절』,『월인석보』,『삼국유사』를 더 깊이 공부하려고 한국에 오고 싶어 해요. 우리나라 학생들은 취업 공부만 하느라 이쪽 공부를 안 하고 있는데, 외국 학생들은 공부하고 싶어 하니, 참 아이러니하죠. 한국 고전의 걸작이라 부를 수 있는 이들 작품에 관한 세계적인 연구는 앞으로 해외에서 나올 거라고 확신해요.”
한번은 독일 함부르크대학교에 초대받아 갔을 때다. 이탈리아에서 온 한 여학생이 조선시대 안동 사람이 쓴 요리책인『음식디미방』을 놓고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본 그는 충격을 받았다. 나라도 시대도 언어도 문화도 모두 다른 ‘경북 안동의 요리책’을 파란 눈의 이방인이 연구하고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때 알았어요. 유럽인들에게 이제  ‘현대 한국의 K POP(ular) 콘텐츠’는 수명을 다했구나 하는 걸요. 2010년에 헝가리에 갔을 때도 비슷한 경험을 했어요. 그곳 학생이 ‘이제 우리는 너희 나라의 현대적인 K-콘텐츠는 어느 정도 다 섭렵했어, 그러니 그다음에 우리를 위해 무얼 준비하고 있냐’고 질문하더군요. 이제는 K-클래식이 필요하다고 봐요. 인문 고전이 K-모던의 바탕이니까요.”
이런 경험 속에서 정 동문은『월인석보, 훈민정음에 날개를 달다』,『월인석보, 그대 이름은 한글 대장경』,『석보상절, 훈민정음 조선 대장경의 길을 열다』,『삼국유사, 여인과 걷다』,『삼국유사, 자장과 선덕여왕의 신라불국토 프로젝트』,『삼국유사, 원효와 춤추다』등 고전에 토대를 둔 책들을 내놓기 시작했다.
튀르키예에서 가르치고 있을 때, 방송대에서 문자로 그동안 취득한 학점에 ‘2개 과목만 하면 졸업할 수 있다’라고 알려와서 일본학과 졸업을 결심했다. 객원 교수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그는 2024년 겨울 마지막 학점을 우수한 점수로 모두 채웠다.

“방송대 공부는 자신을 찾아가는 여행”
“졸업 전 마지막 학점 취득을 위해 시험을 보러 나왔는데, 태블릿으로 하더라고요. 진짜 문화충격이었어요. 1980년대 중후반에 방송대에서 알음알음 기출문제집으로 공부하던 시절과 지금을 비교하면 정말 엄청난 변화를 체감할 수 있어요. 외국 학생들이 한국학을 이런 식으로 배울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이젠 방송대가 세계적 인프라가 다 돼 있고, 수십 년의 노하우가 쌓여 있으니까요. 저는 해외 한국학과 관련해 방송대가 큰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확신해요.”
사실 그는 1986년 방송대와 인연을 맺은 뒤부터 자칭 ‘방송대 홍보대사’로 활동해 왔다. ‘국어학 전공자에게 문화의 국경이 같은 한자 문화권 중국과 일본은 반드시 공부해야 할 대상’이라고 확신하고 있던 그였기에 방송대 진학은 정해진 순서와 다름 없었다. 그랬기에 강의나 강연을 통해 만나는 학생마다 ‘등록금 저렴하고, 교수진도 우수하고, 교재도 좋은 학교다, 새로운 공부를 할 수 있는 최적의 대학이다’라고 방송대 진학을 권유할 수 있었다.
그런 그에게도 잊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다. 중문학과 재학 시절, 대학원 공부와 중국어 시험이 겹쳐 방법을 학과 조교에게 문의했더니 ‘자신 없는 과목은 F 학점을 받은 뒤 재수강하면 된다’고 해 그대로 했다. 웬걸, F 학점 대신 시들시들한 학점(C, D)만 줄줄이 받아 한동안 중문과 성적이 부끄러워 남들에게 비밀로 했던 적이 있다.
정 동문은 최근 강남문화원에서「나에게로 떠나는 여행, 글쓰기」강좌를 시작했다. 일종의 재능 나눔 형태의 강연인데, 이 강좌의 제목은 어쩌면 본인의 인생에 대한 비유일지도 모르겠다. 서른 살에 무작정 나섰던 첫 인도여행을 시작으로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등지를 떠돌았다. 이런 경험 속에서 나온 책이『여행하는 인간 놀이하는 인간』(2021)이다. ‘호모 비아토르, 호모 루덴스(Homo Viator, Homo Ludens)’만큼 인간을 특징짓는 정의는 없다고 생각하는 그는 ‘여행’을 인생과 공부의 등가(等價)로 본다.
“놀이는 내가 좋아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밤을 새우고,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리는 행위잖아요. 그것을 추구하는 유일한 존재가 인간이라고 봐요. 다른 분들도 방송대 공부가 좋아서 시작했을 거예요. 여행은 결국 자신을 재발견하고,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행위입니다. 어쩌다 보니 ‘문·사·철’을 모두 섭렵했는데, 그저 여행을 했고, 길을 걷는 놀이를 했을 뿐인데 말이죠.”
그는 인터뷰 끝에 후배들에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어 했다.
“방송대에 들어왔다는 것만으로도 본인의 세계가 확장될 수 있어요. 상상하지 못한 세상이 펼쳐질 수 있는 기회죠. 방송대 공부 역시 자신을 찾아가는 여행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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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sb9***
    한국철학도 한국 도가사상 도교나 유교 주자학이나 조선 중후기를 지나며 중국과 다른 면으로 독자적인 엄청난 발전을 이루웠는데, 이런 것도 거의 다루질 않아왔죠. 방송대에서도 한국학이나 중화권과 공통을 이르면서도 독자적 다른 색채의 한국 고전 문화에 대해 좀 더 다룰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2025-05-07 15:02:34
  • ksb9***
    한문학이나 고전 한국학 동양철학 등 심화 과정이 꼭 필요하다고 봅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외국인들이 그 나라를 이해하고 싶어서 언어와 고전 문학, 기록 등을 학습하고자 하는 욕구도 크기에 한류를 넘어 한국의 정신 문화 기록 탐구를 희망하는데, 정작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것들을 버려둔 채, 서구적인 것들에만 몰입하곤 관심을 너무 두지 않아왔죠.
    2025-05-07 14:50:19
  • ksb9***
    정작 방송대에서 삼국사기, 삼국유사, 훈민정음 발문 등을 깊게 배우진 못하죠. 중문학과나 국문학과에서 아주 맛 보기 수준으로만 부분 발췌해서 다루고 대학원 과정은 전혀 없으니 말이죠. 관심도가 높은데도 지레 인기가 없을 것이라 짐작하고 너무 트렌드 위주나 아니면 대표적인 고전 강의 개설만 반복해 하는 건 아닌가 합니다. 사실 풍수지리나 음양오행 주역 같은 마법적 관념의 사고도 사실 한국이나 중화권 범아시아적으로도 대중적으로 인기가 굉장히 많죠. 파묘 같은 영화, 드라마 이런 분야로도 관심이 뜨거운데도 말이죠.
    2025-05-07 14:50:01
  • jelo***
    요즘같은 시기에 방통대가 시대를 앞서갔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래전에는 방통대에 대한 인식이 그다지 뚜렷하지 않았는데요 확실히 코로나 이후로는 사이버 스터디가 다양성과, 희소성에서 앞서간다고 느껴집니다~ 비용과 시간면에서도 일석 이조같아요~~
    2025-04-14 11:48:11

사람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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