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학 덕후’로 숙명여대에서 불문학을 공부한 뒤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에서 번역을 전공했다면, 그의 길은 전문 번역가에 있을 것이다. 희소한 탓에 귀하게 대접받는 불어권 번역도, 수요에 반해 공급이 부족한 영어권 번역도 ‘이게 딱 나의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그는 어떤 길을 가고 싶어하는 것일까? 23년째 번역을 주업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주영 동문은 번역을 ‘일본학’에 이르는 한 과정으로 여기는 사람이다. 그는 불어, 영어 번역 일을 하던 중, 중학교 때부터 꽂혔던 일본 문화에 관한 관심이 폭발해 일본을 폭넓게 공부하고 싶어 고르고 골라 방송대 일본학과 1학년에 입학했다. 4년 뒤 졸업과 동시에 대학원 일본언어문화학과에 진학해 석사학위까지 받았다.
스스로를 자포니즘 연구자이자 ‘일본학도(日本學徒) 번역가’라고 소개하는 그를 20일 서울 시내 한 카페에서 만났다.
최익현 선임기자 bukhak@knou.ac.kr
제게 외국어는 일본학을 하기 위한 소중한 도구예요.
영어 공부와 번역은 ‘영어로 하는 일본학’,
불어 공부와 번역은 ‘불어로 하는 일본학’,
일본어 공부와 번역은 ‘일본어로 하는 일본학’이고요.
마지막 퍼즐을 방송대 일본학과가 준 셈이네요.
이주영 동문은 2023년, 2024년에는 두 권의 불어권 책을 번역, 소개해 화제가 됐다. 철학과 삶, 바다라는 테마를 한데 녹여 프랑스 현지 언론에서 극찬을 받은, 철학자 로랑스 드빌레르의『모든 삶은 흐른다』와 리샤르 콜라스의 문제적인 장편소설『할복(Seppuku)』이다.
프랑스 국적으로 일본에서 30년 이상 생활하며 ‘일본통’으로 불릴 정도로 일본과 일본 문화에 깊은 애정을 품고 있는 리샤르 콜라스의『할복』은 두 가지 점에서 특이하다. 하나는 프랑스 신문기자인 에밀 몽루아라는 실존 인물의 삶을 소설화했다는 것, 다른 하나는 이 신문기자가 취재한 한국전쟁 부분을 소설 속에 그려냈다는 것이다.
이주영 동문이 이 작품을 번역한 것은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일본 문화’에 대한 끌림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사무라이를 동경했던 에밀 몽루아는, 소설『금각사』의 작가 미시마 유키오(1925~1970)보다 5년 앞선 1965년 1월 1일, 일본 도쿄에서 할복으로 생을 마감했다. 대상어가 불어였기에 번역했지만, 거기에는 한국과 일본이라는 객체가 깊이 스며들어 있었다.
NHK ‘하나카페’와의 인연
그는 최근 일본 ‘NHK 100분 명저’ 시리즈의 하나인 모리야 아쓰시의『시부사와 에이이치의 윤리경영 리더십』이란 책을 첫 일본어 번역서로 내놨다. 이 책을 번역하게 된 계기는『알면 다르게 보이는 일본 문화』시리즈와 NHK 월드 재팬 한국어 라디오 ‘하나카페’와의 인연이 한몫한다. 2023년 ‘하나카페’에 출연한 그는 관계자들의 안내로 ‘NHK 100분 명저 시리즈’를 처음 실물로 보게 됐다. 시부사와 에이이치를 알고 있었던 그는 여기서 관련 책을 먼저 만났다. 지난 5월 11일, 18일에도 ‘하나카페’에 출연해 ‘신자포니즘’에 관한 이야기와 번역 이야기를 시청자들에게 들려주기도 했다.
이 동문이 중학교를 다니던 1990년대 초반만 해도 일본 문화가 금기시되던 때였다. 그렇기에 미국 영화나 프랑스 영화 등에 등장하는 일본 문화를 우회적으로 만나야 했다. 미국 영화를 보면서 영어 번역가가 되겠다는 생각을 키워간 그는 주변에서 ‘영어 덕후’로 불릴 정도로 독해와 회화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그때의 꿈은 영어 번역가가 되는 것이었다.
수능 영어 만점을 받은 그는 원래 지망하던 영문과 대신 제2지망이었던 불문과에 진학했다. ‘어학 덕후’ 기질이 농후한 그는 이왕 불문과에 입학한 이상 ‘불어 덕후’가 되겠노라고 결심했다.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에 진학한 후 본격적인 불어 통번역가로서의 훈련을 받기 시작했어요. 그 무렵, 가장 많이 읽은 프랑스 소설은, 일본에서 유년기를 보내고 프랑스에서 활동하던 벨기에 작가 아멜리 노통브의『두려움과 떨림』이었는데요. 일본 문화가 등장하면 ‘괴력’을 발산하는 성격 탓에 이 소설을 어찌나 많이 읽었던지 책은 금세 누렇게 변했을 정도로 닳았더라고요. 덤으로 작품 속 불어를 거의 암기하는 수준에 이르기도 했고요.”

자포니즘 연구로 이끈 운명적인 순간
이 동문은 대학원 졸업 후 로펌 회사의 프랑스 법률팀 비서로 취업해 실전으로 법률과 비즈니스 관련 불어, 영어 그리고 모국어인 한국어를 익혔다. 2년 뒤 프리랜서로 활동해도 되겠다는 확신이 들면서 회사 생활을 정리했다. 이 시기 출판 번역으로 처음 손을 댄 책은 일본의 ‘가구야히메’ 이야기를 미국인 작가와 일본계 일러스트레이터가 각색한 영어 동화책이었다.
누구나 운명적인 순간 앞에 설 때가 있다고 한다면, 바로 이 시기가 이 동문에게는 운명적인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한번은 불어책을 하나 번역했는데, 이 책에서 일본 판화(우키요에)에 매료된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의 이야기를 알게 됐다. 마침내 ‘자포니즘’을 번역 일에서 본격적으로 만난 것이다.
이후 다양한 영어권과 불어권 기사와 도서 번역을 하면서 자포니즘이라는 테마가 방대하다는 것을 알게 돼 좀 더 연구하고 싶어서 혼자 데이터베이스를 만들면서 독학하기 시작했다. 기모노, 다도, 후로시키(일본식 보자기 예술), 사무라이, 도자기, 쥘부채 등 일본 전통 문화에 관한 책이라면 영어권이나 불어권 도서를 가리지 않고 사서 읽었다. 영어나 불어로 소통하던 일본인 지인들에게 배움을 청하기도 했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일본 소설은 거의 다 구입해 읽었고, 한국 독서계에 번역되지 않은 일본 전통 문화 테마의 일본 소설은 영어나 불어 번역본으로 사서 읽었다.
이쯤 되면 ‘어학 덕후’인 이 동문이 왜 일본어 공부에 주저하고 있지? 하고 의문을 가질 법하다. 사실 그는 청소년 시절 ‘한자 포기자’였다. 수학이나 과학만큼 한자 공부를 어려워했다. 2014년 6주간의 도쿄 단기 연수에서 북미, 남미, 유럽 출신의 학생들과 ‘자포니즘’을 주제로 금방 친해졌는데, 이탈리아나 브라질 학생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일본어를 구사하는 걸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때 정말 놀랐어요. 그들을 보면서 더는 핑계를 댈 수 없게 된 거죠. 한자를 공부해 일본학 전공자라는 졸업장을 갖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어요. 6주 후 서울로 돌아와 다양한 경로를 알아보다가 방송대 일본학과가 제가 찾던 학과임을 알았죠. 국립대라는 점(해외에서는 국립대를 선호), 일하면서 공부할 수 있는 대학이라는 점, 졸업은 어려워도 수능 없이 입학할 수 있는 대학이라는 점, 교수진이 훌륭하다는 점이 바로 눈에 들어왔죠. 제가 찾던 완벽한 조건을 갖춘 대학이었어요.”
2016년 마침내 1학년 신입생으로 일본학과에 입학한 그는 버킷 리스트였던 일본학 전공자의 길에 처음으로 발을 디뎠다. 학사와 석사과정을 거쳐 방송대를 졸업했을 때, 이 동문의 손에는 그렇게 원했던 일본학과 졸업장(학부), 일본언어문화학과 졸업장(대학원), 석사학위 논문「시부사와 에이이치의 미일인형교류에 관한 연구」가 쥐어져 있었다.
“방송대 일본학과는 정말 훌륭한 곳”
“실제로 제가 다녀보니 방송대 일본학과는 생각보다 더 훌륭한 곳이었어요. 제게 외국어(영어, 불어, 일어)는 일본학을 하기 위한 소중한 도구예요. 영어 공부와 번역은 ‘영어로 하는 일본학’, 불어 공부와 번역은 ‘불어로 하는 일본학’, 일본어 공부와 번역은 ‘일본어로 하는 일본학’이고요. 마지막 퍼즐을 방송대 일본학과가 준 셈이네요. 물론 이를 구체적인 결과물로 만드는 가장 소중한 도구는 모국어인 한국어죠. 번역이라는 틀만 놓고 보면, 저는 다언어를 구사하는 일본학도 번역가를 지향해왔고, 앞으로도 지향하려 합니다.”
이 동문은 요즘도 번역 일을 하는 틈틈이 자포니즘과 관련된 강연을 하기도 한다. 5월 22일에는 부천 범박고등학교에서 일본어 전공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특강을 진행했다. 주제는「신자포니즘―교실 안에서 떠나는 도쿄여행」이었다.
일반적인 번역가와는 결이 다른 이주영 동문. 그가 지향하는 ‘일본학도 번역가’의 길은, 어쩌면 즐거운 공부의 길이면서 동시에 한국인의 눈으로 일본 문화의 안쪽을 깊숙하게 응시하려는 타자의 정치학일지도 모른다. 그가 일궈낼 풍성한 ‘번역’ 성과들이 기대되는 이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