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서구지성사와 만나다

중세는 단순히 종교가 이성을 억압한 암흑기가 아니다.

다양한 조직들 간의 분쟁, 다양한 사상조류와 지식체계가 얽히면서

복합적인 무늬를 만들어냈고

여기서 등장한 국가의 권위와 조직 및 공동체와

그 구성원의 권리와 의무에 대한 논의는

이후 근대 정치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중세는 대략 500년부터 1500년까지, 로마제국의 몰락과 근대 국가의 부상 사이의 약 1천 년간을 일컫는다. 오랫동안 중세는 ‘종교적 권위가 이성과 합리적 토론을 억압한 암흑기’로 묘사돼 왔다. 근대의 이성과 합리성은 중세와의 단절, 즉 중세가 당연하게 여긴 모든 것의 거부를 통해서만 가능했다고 여겨졌다. 그러나 이 시기는 단순히 ‘암흑기’로만 규정될 수 없는 복합적인 시대였다.
중세를 이해하려면 로마제국의 붕괴 이후의 정치·사회적으로 중부와 서부 유럽이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를 알아야 한다. 우선 중앙 권력이 붕괴하면서 국가의 존재가 거의 유명무실해졌다는 것을 지적해야 한다. 로마를 비롯한 속주의 곳곳에 게르만 왕국들이 들어섰지만 이들은 대부분 아주 단명했으며 혼란을 수습할 정치·군사적 능력이 없었다. 계속되는 정치적 혼란 속에서 점점 지방 귀족과 유력자들의 힘이 커졌다. 더불어 교회가 정치와 문화, 사회 전반에 걸쳐 이전과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교회는 단순히 신앙의 중심이 아니라, 고위 성직자들이 토지를 소유하고 군대를 거느린 대영주이자, 귀족 가문의 일원으로서 정치에 깊이 관여했다. 군주들 또한 자신의 통치와 국가의 존재, 역할을 교회의 가르침과 밀접하게 연결해 이해했다.
당연히 중세의 정치·사회적 시각은 교회와 성경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았다. 성경에 근거한 종교적 주장이 정치와 사회를 바라보는 기본 틀이었다는 말을 모두가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살았다는 말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절대로 중세는 단순히 신앙심에 불타는 군주와 성직자만의 시대가 아니었다. 혼란 속에서 사람들이 살아남기 위해 더 영악해지고 교활해지는 것은 결코 오늘날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양한 이해관계와 권력 다툼, 폭력과 권모술수가 난무하던 시대가 중세였으며, 중세 후기라고 일컫는 13세기 이후에는 도시를 중심으로 힘을 키운 부유한 상인과 농민층까지 얽혀 들었다.

중세문화의 다면성
성경과 종교적 가르침이 정치 현실을 이해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 가장 중요한 참고점이었지만 이 때문에 중세사회의 지적 폐쇄성을 너무 과장해서도 안 된다. 알려진 바와 달리 중세의 지식인들은 새로운 지적 움직임과 자극에 비교적 개방적이었으며, 주장 전개에 있어서도 대담했다. 중세의 지식인들이 고대나 아랍 세계를 통해 전해진 문헌들을 일방적으로 터부시했다는 것은 널리 퍼진 오해다. 그런 문헌들에는 지식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지식과 주장이 담겨 있었고, 여기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 문헌들을 연구하는 것에 굳이 시비를 걸려면 걸 수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런 시비를 빠져나가는 법도 다양했다.
이것은 중세의 정치문화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하다. 성경이 정치와 사회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다 보니 중세에 등장한 정치 문헌들은 그 영향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성경에 등장하는 군주와 폭군, 예수와 사도의 이야기는 곧 현시대 군주가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알려주는 지침으로 여겨졌다. 8세기 후반에 쓰인『샤를마뉴의 서』에서는 “여기에서 우리는 어떻게 높은 자가 낮은 자에게,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종해야 하는지, 세상사를 현명하게 판단하고 국가를 잘 다스릴지에 대한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중세 지식인들은 성경만이 아니라 고대 저작들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는 점도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년~기원전 322년)의 정치이론이 큰 영향을 끼쳤다. 아리스토텔레스의『정치학』이 라틴어로 번역돼 사람들에게 두루 읽히기 시작한 것은 13세기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읽음으로써 사람들이 고대 정치관을 받아들여 군주의 지배가 아닌 시민들이 아래로부터 참여하는 정치체제를 이해하고 꿈꾸기 시작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과 전혀 맞지 않은 이야기다. 중세의 지식인들은 아리스토텔레스를 그들 나름의 ‘중세적’ 방식으로 읽었으며, 성경이나 교부들의 가르침과 조화시키려고 애를 썼다.
로마법 연구와 교회법 발전 역시 중세 정치이론에 큰 영향을 미쳤다. 12세기 이후 서서히 국가들과 대귀족들이 권력을 공고히 하면서 행정수요가 증가했다. 이 무렵부터 도시들이 서서히 발전하고 상업이 부활하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은 법률가들에 대한 수요 증가로 이어졌다. 12세기 볼로냐대학을 중심으로 시작된 로마법 연구는 그런 수요와 맞물려 성황을 이뤘다. 로마법에 영향받은 교회법 역시 중요한 연구 분야였다. 앞서 이야기했듯 교회는 단순한 종교 조직을 넘어섰다. 교회의 조직과 행정, 경제적 영향력이 커지면서 여기서도 법률 수요가 증가했다. 법률 지식의 확산은 정치이론에도 영향을 끼쳤다. 특히 14세기 이후 로마법과 교회법의 여러 이론은 정치문헌들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제국, 국가, 교회
흔히 중세를 제국의 시대로 이해하지만 이것은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먼 판타지다.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742~814)가 800년 교황 레오 3세(재위 795~816)에 의해 황제에 대관되면서 제국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거대 정치체제가 탄생한 것은 사실이다. 샤를마뉴의 제국은 그 이전의 게르만족 국가들과 달리 규모가 컸다. 그러나 그의 제국은 로마제국과 비견될 만한 행정의 효율성과 통일성을 갖지 못했다. 샤를마뉴 제국이 손자 대에 이르러 서프랑크, 중프랑크, 동프랑크 왕국으로 나뉘면서 얼마 안 가 원래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만큼 해체된 이후, 작센 왕조의 오토 1세(912~973)가 962년 황제로 대관되면서 공식적으로 스스로를 제국이라고 부르는 정치체제가 등장했다. 그러나 오토의 제국은 샤를마뉴 제국보다도 훨씬 더 ‘제국’스럽지 못했다.
황제들은 자신들이 기독교 세계를 대표하는 ‘보편군주’라는 주장을 내세웠지만, 이런 생각을 교회가 언제나 환영했던 것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교회는 때로는 종교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때로는 교황과 교회 성직자들의 세속적 권력욕 때문에 세속 군주들을 적당한 선에서는 이용하되 일정한 선을 넘으면 적극적으로 견제하려 했다. 그 탓에 중세 동안 황제와 로마 가톨릭교회는 종종 갈등을 일으켰고 심지어 무력 충돌로 나아가는 경우도 있었다.
황제 하인리히 4세(1050~1106)와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1015~1085)가 성직자 임명권을 두고 벌인 분쟁은 그중 가장 잘 알려진 사건이다. 1077년 ‘카노사의 굴욕(Road to Canossa)’으로 알려진 이 사건에서, 황제의 간섭에 반발한 그레고리우스는 하인리히를 파문하고 귀족들의 반란을 부추겼다. 코너에 몰린 황제는 겨울 알프스산을 넘어 카노사성까지 찾아가 교황에게 용서를 빌어야 했다. 이후 하인리히가 독일로 돌아가 반대파를 격파하고 다시 군사를 일으켜 그레고리우스를 공격함으로써 이 사건은 마무리됐다. 그레고리우스는 결국 시칠리아로 물러나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1230~1303)는 재임 중 유럽의 주요 군주들과 쉴 새 없이 분쟁을 일으켰으며, 그중에서도 프랑스 왕 필립 4세(1268~1314)와의 충돌이 유명하다. 특히 프랑스 성직자에 대한 과세권을 두고 벌인 분쟁에서, 교황은 필립 4세가 교회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에 분개해 그를 시동처럼 내칠 수 있다고 위협했다. 이에 필립 4세는 1303년 교황이 머물고 있던 아냐니에 한 무리의 하급 귀족과 깡패들을 보내 교황을 납치했다. 보니파키우스는 곧 풀려나기는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이처럼 국가와 교회는 끊임없는 긴장 관계에 있었으며 이는 국가의 본질과 권력의 임무, 교회와의 올바른 관계 설정에 대한 다양한 정치이론이 발전하는 계기가 됐다.
중세 역사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흔히 던지는 질문이 ‘이 당시 사람들도 민주주의를 알았는가?’ 하는 것이다. 물론 민주주의를 알기는 했다. 아리스토텔레스가『정치학』에서 민주주의에 대해 토론했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를 읽는 사람들도 민주주의를 모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중세의 지식인들은 어떤 정치체제가 옳고 좋은가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어차피 현실에서는 군주정이 지배적인 통치 양식이었고, 게다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황과 전통에 맞게 유연하게 나름의 정치체제를 갖추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바르톨루스(Bartolus de Saxoferrato, 1313~1357) 같은 법률가는 “작은 공동체에는 민주주의, 중간 규모에는 귀족정, 큰 규모에는 군주정이 어울린다”라고 주장했다.

암흑기를 넘어서
중세는 단순히 종교가 이성을 억압한 암흑기가 아니다. 앞서 이야기했듯 다양한 조직들 간의 분쟁, 다양한 사상조류와 지식체계가 얽히면서 복합적인 무늬를 만들어냈고 여기서 등장한 국가의 권위와 조직 및 공동체와 그 구성원의 권리와 의무에 대한 논의는 이후 근대 정치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런 점에서 중세 정치사상의 흐름을 이해하는 것은 근대 이후 서구의 정치제도적, 이념적 발전을 깊이 있게 고찰하는 데도 중요하다.
중세는 단순히 종교가 이성을 억압한 암흑기가 아니다. 다양한 조직들 간의 분쟁, 다양한 사상조류와 지식체계가 얽히면서 복합적인 무늬를 만들어냈고 여기서 등장한 국가의 권위와 조직 및 공동체와 그 구성원의 권리와 의무에 대한 논의는 이후 근대 정치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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