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서구지성사와 만나다

서양사상사가들은 오랫동안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독일 등 서유럽이라고 불리는 특정 지역에 시선을 집중해 왔다. 약간 과장을 보탠다면 마치 서유럽이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다른 곳과 분리된 섬인 것처럼 여긴 것이다. 당연히 사고의 변화와 혁신도 서유럽 자체의 요인에서 기인하는 것처럼 여겨왔다. 그러나 혼자만의 힘으로 커가는 문화나 문명은 단연코 세계사에 없다. 실제로 서유럽은 결코 고립돼 있지 않았으며 주변 세계와 쉼 없이 교류하는 가운데 성장했다.
이는 중세에도 고스란히 해당하는 이야기다. 중세 동안의 서유럽(사실 오늘날의 서유럽 국가들만 포괄한 것이 아니며, 로마 가톨릭교회의 권위를 인정했다는 측면에서 차라리 라틴 기독교 세계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하겠지만, 여기서는 우리에게 익숙한 서유럽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다)은 비잔틴 제국이나 이슬람 세계와 꾸준히 교류하며 지식과 문물을 주고받았다는 사실이 여러 연구를 통해 밝혀지고 있다. 따라서 중세 정치사회사상의 발전을 이해하려면 이런 외부 세계와의 교통이 끼친 영향에도 충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롱쏘프 벽화에 나타난 『세크레툼 세크레토룸』의 영향은

중세 유럽이 문화 간 전파로부터 자유롭지 않았으며,

정치 이론의 언어, 소재, 상징을

다른 문화 및 문명권으로부터 받아들이고 소화해 가고 있었다는

뚜렷한 증거를 제공한다. 이는 중세 서유럽의 지성사를

타 지역과 문화로부터 고립시켜 이해하는

기존의 사고방식을 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14세기 초에 그려진 롱쏘프 벽화
이를 뒷받침하는 구체적인 증거가 하나 있다. 그것은 14세기 초 영국 남부 케임브리지셔의 피터버러에 있는 롱쏘프(Longthorpe) 탑에 그려진 프레스코화들이다. 이 벽화들은 1300년경 지어진 탑의 거실 네 벽과 천장에 그려져 있는데, 탑이 지어지고 30여 년이 경과한 1330년 전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벽화들은 오랜 시간 글자 그대로 ‘가려져’ 있었다. 벽화가 그려지고 시간이 흐른 후 정확히 알 수 없는 언젠가에 누군가 덧칠을 해 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방 안에 그런 그림들이 그려져있다는 사실을 알 수가 없었다. 벽화가 발견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탑을 수리하는 과정에서였다. 5년에 걸친 복원작업 후 마침내 네 벽과 천장을 덮고 있던 어마어마한 양의 벽화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모든 것을 복원하지는 못했다. 일단 형체들이 불완전하다. 온갖 현대기술을 동원했음에도 벽화의 색이나 내용을 알려주는 여러 글자들은 모두 사라졌다.
학자들은 이 벽화의 내용을 해독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일부 중요한 힌트들이 발견됐다. 그럼에도 벽화의 내용을 설명해 줄 설득력 있는 해석은 제시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필자는 2007년 영국에서 발간되는 예술사와 지성사 분야의 학술지를 통해 벽화의 중요한 부분들을 해석하고 그 문헌적 근거를 제시했다(필자는 그 후 추가적인 논문을 통해 벽화 전부를 해석하고 그 의미구조를 밝혔다). 필자와 필자를 지지하는 해외 여러 전문가들이 틀리지 않았다면, 롱쏘프 벽화는 14세기 영국의 정치 논의가 이슬람 정치 철학으로부터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뚜렷한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먼저 롱쏘프 탑 서쪽 벽에 그려진, 중세 복장을 한 나이 든 인물과 젊은 인물이 대화하는 그림을 보자(그림 ①).이 두 인물이 누군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가설이 등장했지만 설득력 있는 답은 제시하지 못했다. 필자는 이 두 인물을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제자 알렉산더 대왕으로 해석했다. 이러한 해석은 단지 아리스토텔레스가 알렉산더 대왕을 가르친 일이 있다는 사실로부터 무작위적으로 추론된 것이 아니라 명백한 문헌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당시 영국에서 널리 읽히던 『세크레툼 세크레토룸』(번역하면 ‘비밀중의 비밀’이라는 뜻이다)이라는 제목의 군주교육서다.
이 문서는 통치자가 알아야 할 온갖 중요한 지식을 다루고 있는데,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글 전체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자 알렉산더 대왕에게 강론하는 형식으로 쓰인 점이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제자에게 군왕이 알아야 할 지식과 마음가짐, 몸가짐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한다. 『세크레툼 세크레토룸』을 주목하는 이유는 이 문서가 중세 유럽에서 12세기 이래 오랫동안 ‘베스트셀러’의 지위를 누렸으며, 특히 당시 영국에서 국왕의 공적인 책임과 의무에 대해 논의할 때 제일 먼저 손에 쥐는 책이었다는 사실 때문이다. 롱쏘프 탑이 지어졌을 때 이 방은 지역의 귀족들이 모여 왕국과 지역의 문제를 두고 회의를 하는 공간으로 쓰였다. 따라서 『세크레툼 세크레토룸』을 모티브로 한 그림들로 벽을 장식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없다.

‘세크레툼 세크레토룸’의 기원은 아랍 세계
흥미로운 사실은 『세크레툼 세크레토룸』의 기원이 아랍 세계에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연구에 의하면, 이 문서는 10세기 무렵 아랍에서 일종의 백과사전으로 처음 만들어졌다. 이 아랍어 문헌이 지중해를 돌아 12세기 이후 라틴어로 번역돼 서유럽인들의 시야에 들어왔다. 사람들은 이 문서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라고 믿어버렸으며, 곧 이를 프랑스어, 영어, 독일어 등 여러 유럽 언어로 번역하여 퍼뜨리기 시작했다. 영국의 롱쏘프 벽화는 이런 장기간의 문화 전이의 한가운데에서 탄생한 것이다.
롱쏘프 탑 동쪽 벽의 그림은 『세크레툼 세크레토룸』이 당시 영국의 국가사상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를 더욱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이 벽화에는 커다란 바퀴와 그 주변에 원숭이, 매, 거미, 산돼지, 암탉(혹은 상상의 괴물 바실리스크) 등 다섯 동물이 배열돼 있다. 바퀴 뒤에는 머리에 왕관을 쓴 국왕이 서 있고 그의 한쪽 손은 바퀴살에 닿아있다(그림 ②).
중세의 상징 체계에서 이 다섯 동물들은 인간의 다섯 감각을 상징했다. 원숭이는 미각, 매는 후각, 거미는 촉각, 산돼지는 청각, 암탉(바실리스크)은 시각을 상징한다(오감과 연결되는 동물이나 그 관계는 경우에 따라 달라지기도 했다).

학자들은 이 벽화를 이렇게 해석했다. ‘행운의 여신의 수레바퀴에서 보이듯 중세에는 바퀴가 위태로움과 의미 없음을 상징한다. 바퀴는 언제 어느 방향으로 굴러갈지 모른다. 일단 바퀴가 굴러가기 시작하면 맨 위에 서 있던 사람은 순식간에 바퀴 아래로 떨어져 깔리게 된다. 따라서 바퀴 위의 삶은 불안하고 그 위에서 누리는 부귀와 영화는 덧없다. 이런 맥락을 고려할 때 인간의 오감을 바퀴 위에 올려놓았다는 것은 인간의 오감이 주는 감정과 정보가 믿을 수 없고 별 가치가 없다는 생각을 표현할 것이다.’
이런 해석의 연장선상에서 바퀴 뒤에 서 있는 왕의 모습도 다음과 같이 설명되었다. ‘인간의 감각과 감각이 주는 감정, 정보는 중요하다. 그러나 이것을 그대로 따라서는 안된다. 인간은 이성으로서 이들 감정과 정보를 검토해 걸러야 한다. 바퀴 뒤에 서 있는 왕은 바로 이러한 이성을 상징한다. 이성은 왕이고 왕은 곧 이성이다.’
이렇게 본다면 동쪽 벽의 벽화는 이성과 감각 간의 관계에 대한 생리학적·윤리학적 지혜를 그리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한 『세크레툼 세크레토룸』에서는 이와 다른 해석의 여지가 발견된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더에게 군왕이 독불장군식이 아니라 신하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과 긴밀히 협력해 나라를 다스릴 필요를 설명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이 인간을 창조해 만물 중 가장 고귀한 존재로 삼고 그에게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지시하고 상벌을 분명히 함에 있어 그는 인간의 몸을 마치 한 나라처럼 만들었다. 신은 인간의 판단력을 이 나라의 왕으로 삼아 가장 고결하고 높은 자리인 머리에 두었고 이어 다섯의 통치 책임자들을 임명해 왕이 필요로 하는 일을 하고 그를 해로운 일로부터 보호함으로써 왕을 돕게 했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군왕을 판단력에, 행정 책임자를 감각(기관)에 비유한다. 국가는 이들이 이루는 하나의 신체다. 국가와 인간 신체를 상징적인 동일물로 보는 이런 비유는 중세 정치사상의 맥락에서 결코 낯설지 않다. 국가가 일종의 신체라는 상징은 12세기 이후 중세 내내 크게 유행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롱쏘프 탑 거실 동쪽 벽에 그려진 벽화는 이성으로 감각을 통제하라는 수준의 일반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이상적인 군왕과 신하들의 관계 그리고 그들이 이루는 조화로운 통치를 그리고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해석을 뒷받침하는 것은 벽화의 전체적인 구도다. 중세 상징 체계에서 바퀴나 원은 단순히 덧없음뿐만 아니라 세계나 우주를 지배하는 조화와 완성을 상징하기도 했다. 다양한 중세 삽화나 지도에서 우주, 세계, 창조와 역사를 바퀴나 원의 형태로 묘사하곤 했다. 이러한 그림에서 바퀴나 원은 종종 신의 몸에 겹쳐 그려지거나 아예 신의 몸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인간의 생각은 행동으로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신의 의도는 신이 창조하고 움직이는 우주 안에 구현돼 있다. 따라서 우주는 곧 신의 몸이다. 피사의 공동묘지인 캄포산토에 그려진 여러 벽화들 가운데에는 신의 머리를 그리고 그 몸을 우주를 이루는 원들로 표현한 그림이 있는데, 이것은 이런 생각을 표현하는 많은 사례들 중 한 예다(그림 ③).

문화·문명 간 전파와 영향의 의미
군왕의 머리가 보이고 그 아래에 수레바퀴를 겹쳐놓은 동쪽 벽화의 구도는 신과 우주의 관계를 표상한 이런 예들과 매우 흡사하다. 이런 유사성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다. 중세에 군왕은 신을 대리하는 존재, 곧 지상의 신처럼 여겨졌으며, 군왕이 다스리는 국가는 바로 그런 군왕의 몸으로 간주됐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군왕과 그가 다스리는 국가는 신과 우주의 관계와 같은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졌다. 그런 의미에서 신과 우주의 관계를 나타내는 구도가 군왕과 국가의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었다.

이에 비춰 본다면 이 벽화의 의미는 다음과 같이 새길 수 있을 것이다. ‘군왕은 머리이고 국가는 그 신체와 같다. 군왕은 그 신체를 잘 유지하기 위해서 훌륭한 행정장관들을 뽑아 그들과 조화롭게 협력하여야 할 것이다.’ 즉, 롱쏘프의 화공은 국왕을 그리고, 그의 몸 위에 국가를 상징하는 수레바퀴를 그린 후, 그 주변에 오감의 상징을 배치함으로써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이상적인 정부와 국가를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롱쏘프 벽화에 나타난 『세크레툼 세크레토룸』의 영향은 중세 유럽이 문화 간 전파로부터 자유롭지 않았으며, 정치 이론의 언어, 소재, 상징을 다른 문화 및 문명권으로부터 받아들이고 소화해 가고 있었다는 뚜렷한 증거를 제공한다. 이는 중세 서유럽의 지성사를 타 지역과 문화로부터 고립시켜 이해하는 기존의 사고방식을 버려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서양 중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좁은 서유럽의 경계를 넘어 시야를 넓혀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우리는 이야기할 수 있다. 인간과 마찬가지로 문명도 외부와의 끊임없는 교류 속에 성장하고 무르익는 것이라는 사실은 중세의 사상을 볼 때도 기억해야 할 역사의 교훈이다.

서울대를 졸업하고 베를린 훔볼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학계에서 21세기 가장 혁신적인 마키아벨리 연구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위험한 국가의 위대한 민주주의: 국가의 미래, 어떻게 만들 것인가』, 『정치사상사 속 제국』(공저) 등 다수의 저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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