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COM의 뮤지엄 정의는 완결된 문장이 지닌 권위보다도,
합의 과정에서 서로 다른 이질적인 목소리가 충돌하고,
동시대 미술관과 박물관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공동의 사유를 요청한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지난해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은 관람객 수가 378만 명으로 집계됐다. 이는 전 세계 박물관과 미술관을 찾은 관람객 순위로 8위에 해당할 정도라고 하니, 박물관이 대중적으로 높은 관심을 받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한다. 국립현대미술관에도 지난해 165만 명이 방문했고, 특히 20~30대의 관람객 비중이 높아지면서 젊은 세대가 미술관을 매력적인 여가 장소로 인식하는 변화도 감지된다. 이 글은 우리의 삶에 더욱 가까워진 미술관과 박물관이 고정된 공간이 아니라 사회적 책임을 수행하며 변화해 왔다는 관점에서, 국제박물관협의회(International Council Of Museums, 이하 ICOM)가 발표해 온 뮤지엄 정의의 변천사를 살펴본다.
박물관과 미술관 아우르는 ‘뮤지엄’
그런데 본론에 들어가기 앞서 ‘뮤지엄(museum)’이라는 단어의 번역어를 정리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미 혼란을 느낀 독자도 있겠지만, 뮤지엄은 박물관과 미술관, 두 기관을 모두 아우르는 말이기 때문에 한국어로 옮길 때 난점이 있다. 유럽과 북미에서는 뮤지엄이라는 단어가 애초에 다양한 분야의 자료를 수집·연구·전시하는 기관 전체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발전했기 때문에, 런던의 대영박물관(The British Museum)이나 뉴욕현대미술관(The Museum of Modern Art)을 모두 ‘뮤지엄’으로 지칭한다. 그러나 한국은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에 의해 박물관과 미술관을 제도적으로 명확히 구분하고 있다.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에 따르면 박물관과 미술관은 ‘문화 예술의 발전과 일반 공중의 문화향유 및 평생교육 증진에 이바지하기 위한’ 기관이지만, 박물관은 ‘역사, 고고(考古), 인류, 민속, 예술, 동물, 식물, 광물, 과학, 기술, 산업’을 대상으로 하고, 미술관은 ‘서화, 조각, 공예, 건축, 사진’ 등을 다루는 기관으로 명시돼 있다. 국내에서 박물관과 미술관의 구분은 ‘미술(美術)’이 일본을 거쳐 번역되며 고착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번역의 과정을 되짚는 것은 흥미로운 주제이지만 이 글의 범위를 벗어나는 일이다. 이 글에서 다루는 주제는 박물관과 미술관을 포괄하고 있으므로 ‘뮤지엄’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는 점을 밝혀둔다.
1946년에 루브르박물관에서 출범한 ICOM은, 2023년 기준 120여 개 국가의 미술관·박물관 관련 종사자 5만7천여 명이 활동하는 비영리 국제기구로 성장했다. ICOM은 회원 기반의 협의체로서 세계 각국의 전문가들과 광범위한 논의를 통해 뮤지엄 분야의 국제적인 기준을 수립하고 윤리 강령을 제정해 왔으며, 시대의 변화에 따라 이를 지속적으로 개정하고 있다. ICOM이 발표하는 뮤지엄 관련 표준과 권고안은 각국의 박물관법 제정이나 문화 정책 수립에 참조 기준으로 쓰이고 있다는 점에서 그 영향력을 알 수 있다.
국내의 경우,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 제6조(박물관·미술관 학예사)에서 ‘학예사는 국제박물관협의회의 윤리 강령과 국제 협약을 지켜야 한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따라서 ICOM의 뮤지엄 정의를 검토하는 일은 동시대 미술관과 박물관의 역할과 기능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핵심적인 출발점이 된다. 우선 ICOM 창설 당시 발표된 뮤지엄의 첫 정의를 살펴보자.
“‘뮤지엄’이라는 단어는 예술·기술·과학·역사·고고학에 관한 자료로 구성된 일반에 공개되는 모든 컬렉션을 의미하며, 동물원과 식물원도 이에 포함된다. 단, 도서관은 영구 전시실을 유지하는 경우에만 포함된다.” (ICOM, 1946)

1946년 당시에는 ‘컬렉션’으로 지칭돼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1946년의 이 정의는 다소 낯설게 느껴진다. 뮤지엄을 기관이 아닌 ‘컬렉션’으로 지칭하고 있고, 동물원과 식물원까지 그 범주에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당시 창립총회에 공식적으로 참여한 나라는 14개국(호주, 벨기에, 브라질, 캐나다, 체코슬로바키아, 덴마크, 프랑스, 네덜란드, 뉴질랜드, 노르웨이, 스웨덴, 스위스, 영국, 미국 등 14개국에서 참여했다. 아르헨티나, 칠레, 중국, 이집트, 핀란드, 그리스, 아이티, 인도, 니카라과, 페루, 필리핀, 남아프리카공화국, 튀르키예에서 ICOM 결성을 지지하는 서한을 보냈다)이었다. 국제기구 차원에서 처음으로 공식화된 이 정의는, 다양한 제도적·문화적 맥락에서 운영해 온 각국의 뮤지엄들을 아우르기 위해 포괄적 기준이 필요했음을 시사한다.
또한 ICOM의 창립을 주도적으로 이끈 미국과 프랑스에서 뮤지엄이라는 제도가 탄생한 방식이 서로 상이하다는 점도 중요하다. 태생부터 상반된 두 국가의 제도적 토대는 ‘뮤지엄’을 규정할 때 무엇을 핵심으로 삼을 것인가에 대한 시각 차이를 낳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왕실 컬렉션을 기반으로 한 국립 박물관이 국가 권위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던 반면, 독립 이후의 미국에서는 자선가와 민간 재단의 기부로 대형 박물관이 설립되는 경우가 많았다. 예컨대 루브르박물관은 프랑스 혁명 이후 왕실의 소장품을 국민에게 개방하면서 탄생한 기관이고, 스미소니언 재단은 영국 과학자 제임스 스미스슨(James Smithson)이 지식의 확산과 증진을 위해 미국에 전 재산을 기부한 것을 계기로 설립됐다.
이러한 문화적 배경의 차이를 고려하면 ICOM이 제시한 첫 뮤지엄 정의가 ‘무엇을 일반에 공개하는가’를 우선적으로 규정한 배경을 이해할 수 있다. 더불어 ICOM이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전쟁으로 파괴된 문화유산을 복원하려는 긴급한 시대적 요구 속에서 설립된 조직이라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유네스코와 협력하며 ICOM은 피해를 겪은 뮤지엄과 문화재에 대한 국제 조사를 시작했고, 이때 당면한 시급한 과제는 각지의 뮤지엄이 소장한 컬렉션을 파악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뮤지엄은 사회와 그 발전에 봉사하는 비영리 영구기관으로서,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으며, 연구·교육·즐거움을 목적으로 인간과 그 환경의 물질적 증거를 수집·보존·연구·전시·소통한다.” (ICOM, 1974)
ICOM은 뮤지엄이 ‘무엇을 소장할 것인가’에 대한 합의를 넘어, 소장품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그리고 변화하는 시대에 뮤지엄이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에 대한 국제적 기준과 윤리적 책임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 첫걸음으로 1951년 ICOM의 정관에는 뮤지엄의 ‘지속성, 공공성, 교육적 역할’을 강조하는 문구가 추가됐고, 1968년 뮌헨 총회에서는 정의에 ‘즐거움’이라는 단어가 포함되며 이용자 중심의 기능과 역할을 검토해 나갔다. 이후 1974년 코펜하겐 총회에서는 뮤지엄이 ‘비영리’ 기관이자 ‘사회에 봉사’하는 기관으로서, ‘수집·보존·연구·전시·소통’을 수행한다는 점을 명시한 안을 채택했고, 이 정의는 오늘날까지도 큰 틀에서 유지되고 있다.
“뮤지엄은 유무형 유산을 연구·수집·보존·해석·전시하여 사회에 봉사하는 비영리 영구기관이다. 뮤지엄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어 이용하기 쉽고 포용적이어서 다양한 지속 가능성을 촉진한다. 뮤지엄은 공동체의 참여로 윤리적·전문적으로 운영하고 소통하며, 교육, 향유, 성찰, 지식 공유를 위한 다양한 경험을 제공한다.” (ICOM, 2022)

2022년 ICOM 프라하 총회의 의미
ICOM이 사용 중인 현행 정의는 126개 위원회가 참여해 18개월의 협의 과정을 거쳐 2022년 프라하 총회에서 최종 승인됐다. 프라하 총회에서 투표에 부쳐진 뮤지엄 정의는 총 4단계의 협의 과정을 거쳐 도출됐다. ① ICOM 위원회에서 뮤지엄 정의와 관련된 활동 보고서를 수집하고, ② 회원들에게 새로운 정의에 포함돼야 할 핵심 용어와 개념에 대한 의견을 수렴했고, ③ 이를 바탕으로 핵심 용어를 검토하고, ④ ICOM 위원회가 다섯 개의 초안을 마련한 뒤 평가를 거쳐 최종 두 개의 안을 도출했다. 그 결과, 프라하 총회에서 92.41%의 찬성으로 현재의 정의를 채택할 수 있었다. 1946년 이후 약 50년 동안 수정을 거듭해 오며, 뮤지엄은 물질적인 대상뿐만 아니라 무형의 유산까지 수집하고, 단지 개방된 공간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이용하기 쉽고 포용적이며, 지속 가능성을 촉진할 의무가 있다는 점을 명시했다.
국내에서도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에 장애인의 편의성 보장과 관련된 조항을 2022년에 신설했고,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두에게 열린 공간으로 거듭나기 위한 프로그램과 시설 개편이 이어지고 있다. 이렇듯 ICOM의 뮤지엄 정의는 공허한 선언에 머물지 않고 구체적인 변화를 촉진하는 동력이 되어 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런데 합의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과 더불어 주목해야 할 것은 정의를 만들어 가는 협의의 과정이다. 2019년 교토 총회에서 전면 개정안이 부결된 사건은, 비록 채택에는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과정에서 뮤지엄의 사회적 역할, 문화재 약탈과 학살의 역사 등을 둘러싼 생산적인 논쟁을 촉발했다.
ICOM의 뮤지엄 정의는 완결된 문장이 지닌 권위보다도, 합의 과정에서 서로 다른 이질적인 목소리가 충돌하고, 동시대 미술관과 박물관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공동의 사유를 요청한다는 점에서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류혜민 서울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대학에서 문화연구를 공부했다. 2018년부터 현대미술의 자료를 수집·보존·연구하는 서울시립 미술아카이브의 건립 과정에 참여했다.「이력서: 박미나와 Sasa[44]」전을 기획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