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서구지성사와 만나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는 대략 14세기 중반부터 16세기 초반까지 이어지는 시기를 가리킨다. 우리는 이 시기의 회화와 건축에 열광한다. 지오토, 브루넬레스키, 보티첼리,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의 예술가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 설레는 우리에게 르네상스는 우아함과 아름다움의 시대로 여겨진다.
르네상스가 이탈리아에만 국한됐던 것은 아니다. 이미 19세기부터 르네상스라는 말은 유럽사의 한 단계를 가리키는 개념으로서 광범위하게 사용됐다. 그래서 야코프 부르크하르트는 1860년 출간한 그의 책에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문화’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외에 북유럽 르네상스, 독일 르네상스, 프랑스 르네상스, 영국 르네상스에 대한 문헌들도 저술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르네상스의 대명사는 ‘이탈리아의 르네상스’였고, 사람들은 유럽사에 등장한 모든 르네상스의 뿌리가 궁극적으로는 이탈리아에 닿아있다는 것에 대해 깊이 공감했다. 부르크하르트가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를 규정한 요소들, 즉 개인주의자로서 인간의 발견, 지리적 발견을 포함한 세계의 발견, 민족적 전통을 포함한 민족의식의 발전 등은 다른 지역의 르네상스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기본 틀이 됐다.
사진 출처=wikipedia.org

사람들은 흔히 르네상스를 인문주의와 연결시킨다.

신의 시대가 중세였다면, 그것에 반기를 든 르네상스는

인간의 시대였다는 단순한 도식화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주의는

사랑, 박애, 인간애를 의미하는

현대적 의미의 휴머니즘과는 거리가 멀다.

 

 

오만과 편견 그리고 클리셰
필자는 30년이 넘게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시대를 연구해왔지만, 파면 팔수록 이 단어에 대한 거부감을 갖게 된다. 이 르네상스라는 시대 구분은 서부와 중부 유럽사의 흐름에 대한 서부와 중부 유럽인들(이들이 19세기 이후 학문 발달을 주도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의 온갖 오만과 편견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는 ‘재생’을 의미한다. 죽은 어떤 것을 살렸다는 것이다. 무엇이 죽었다는 것일까? 이성이다. 언제 죽었다는 것일까? 앞선 시대, 곧 교회와 종교가 지배하던 중세에 죽었다. 중세가 신이 인간을 압도하던 시대였다면, 르네상스는 신의 지배에 맞서 인간과 그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이성을 되살린 시대였다. 어둠에 스러져가던 유럽을 빛으로 다시 돌려세우고, 17세기부터 펼쳐질 계몽의 시대를 향해 다리를 놓은 시대였다.
방금 필자가 한 이야기가 너무나 익숙하고 당연하게 느껴진다면 ‘아 내가 클리셰에 너무 중독됐구나!’ 하고 생각해야 한다. 자책할 필요는 없다. 여전히 그렇게 생각하는 학자들이 적지 않고, 요즘 유행하는 온갖 팟캐스트와 유튜브 채널에도 이런 ‘낡은 이야기들’이 그야말로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중세를 단순히 ‘암흑의 시기’로 정의해서는 안 된다. 전문가들이 매일매일 새로이 밝혀내듯, 르네상스 역시 우리가 상상하는 것만큼 그렇게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우리가 ‘중세적’이라고 부르는 것들 중 상당수는 르네상스 시대 인간들의 사고와 행동, 제도 안에도 남아있었다.
사람들은 흔히 르네상스를 인문주의와 연결시킨다. 신의 시대가 중세였다면, 그것에 반기를 든 르네상스는 인간의 시대였다는 단순한 도식화다. 도그마와 교회의 권위를 인간의 가치에 대한 믿음으로 뒤집은 사회, 그것이 르네상스였다는 주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문주의는 인간중심주의와는 별 상관이 없다. 쉽게 말해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주의는 사랑, 박애, 인간애를 의미하는 현대적 의미의 휴머니즘과는 거리가 멀다.
여러 학자들이 동의하듯, 인문주의는 결코 세계관이나 철학의 변화를 낳지 못했다. 인문주의자들을 하나로 묶는 고대에 대한 (과장된) 동경심을 넘어 이들로부터 참신한 세계관이나 역사관을 발견하고자 한다면 결국 실망할 것이다. 별 아이디어도 없이 폼만 재는 B급 철학자들이었다고 인문주의자들을 힐난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들이 뛰어난 고대 문헌 편집자였을지는 몰라도 뛰어난 철학자가 아님은 분명하다. 오늘날 훌륭한 고대 문헌학자가 반드시 고대 철학의 전문가가 아닌 것과 같다.
인문주의와 관련된 뿌리 깊은 오해 중 하나는 인문주의자들이 공화주의자였다는 것이다. 이런 오해의 근원을 사상사적으로 풀어내려면 책 한 권이 필요하다. 어쨌든 인문주의자들은 고대 문헌을 통해 아테네와 로마의 공화정에 대해 알았을 것이고, 마침 이탈리아반도에 도시공화국이 번성하던 시기였으므로 당연히 여기에 주목했을 것이며, 마침내 상당수는 공화주의자가 됐을 것이라는 생각이 그러한 오해의 본질이다.

르네상스의 또 다른 주역, 시뇨레
하지만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들은 고대 문헌 못지않게 여전히 성경에도 빠져있었고 교황과 로마교회의 권위를 옹호하는 데 누구보다 열심이었다. 그들은 고대 공화정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로마 제정에 대해서도 읽었고, 공화정을 무너뜨린 시저를 숭배하기도 했다.
이탈리아의 인문주의가 절정에 이른 15세기는 이미 이탈리아 공화정의 황혼기 혹은 암흑기였고, 인문주의의 성장기인 14세기 말과 15세기는 시뇨레(signre)들의 전성시대였다. 시뇨레는 상업이나 용병업으로 부와 권력을 쌓고 마침내 도시 정부를 손에 넣어 주무른 일종의 전제군주들이다. 작위를 돈으로 사들여 그 이름 앞에 거창하게 백작이나 공작의 칭호를 붙이고 거드름을 피우기도 한 이들의 주무기는 깡패 같은 용병들과 가신들, 돈, 협잡 그리고 권력에 빌붙어 이익을 챙기려는 시민들이었다.
시뇨레들이야말로 인문주의자들을 먹여살린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지배와 통치는 문서작업을 요구한다. 특히 시뇨레 같은 벼락출세자들은 지식의 힘으로 손에 묻은 피와 돈의 냄새를 지우려 한다. 따라서 인문주의자들의 문필력은 교황을 비롯한 지도자들뿐 아니라 시뇨레에게도 값을 쳐줄 만한 상품이었다. 인문주의자들은 배가 고팠고, 대학의 일자리나 가정교사 자리는 한정돼 있었다. 자신들의 밑천인 고전에 대한 지식과 글솜씨를 사주기만 한다면 고용주가 교황인지, 도시의 공화정부인지, 혹은 전제군주인지를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사진 출처=wikipedia.org
인문주의자들을 돈만 주면 누구든 찬양할 수도 있고 어디로든 창끝을 기꺼이 돌릴 수도 있는 양심 없고 줏대 없는 프리랜서로 평가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그러나 그들이 다양한 정치지도자, 다양한 형태의 정부에 고용돼 일했던 만큼 ‘인문주의는 곧 공화주의다’라고 주장하는 것 또한 잘못이다. 인문주의자들은 공화정을 위해 필봉을 휘두를 수도 있었고, ‘군주 아래의 삶이 아니면 죽음뿐이다’ 식으로 군주정을 옹호하며 열변을 토할 수도 있었다. 심지어 한 사람의 인문주의자가 어떤 글에서는 공화주의를 치켜세우고, 다른 글에서는 군주정을 최고의 정치체제로 찬양한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르네상스란 존재하기는 한 것인가? 역사가들이 만들어낸 신기루가 아니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내 대답은 ‘존재한다’이다. 다만 ‘서양사 내지 인류사의 새로운 단계였다’거나 ‘중세와의 깨끗한 단절이었다’는 식의 과장된 수사는 빼야 한다. 르네상스는 십자군 전쟁 이래 상업으로 크게 성공한 이탈리아 도시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일종의 지역적 문화였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돈이 쌓이면서 자의식도 높아졌다. 화공과 문사를 고용해 그림을 그리게 하고 글을 짓게 할 수 있는 것이 왕과 고위 귀족, 교회뿐이었던 과거와 달리, 상업으로 도시가 부유해지면서 성공한 상인들 혹은 상인으로 직업을 바꾼 귀족들이 문화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글도 그림도 물주의 입맛을 따르기 마련이니, 세속적 모티브의 글이 쓰여지고 그림이 그려졌다.
초보적인 이탈리아 애국주의도 르네상스에서 무시 못 할 요인이다. 중세 이탈리아는 알프스 이북의 강국들의 힘에 좌우되고 있었고, 정치적 독립국가를 이루지도 못했다. 북부와 중부 이탈리아의 상당부분은 신성로마제국의 영토였고 신성로마제국의 쇠퇴기에는 이런저런 도시들이 할거하며 혼란을 일으켰다. 이탈리아의 도시들, 시뇨레들, 로마 교회는 알프스 이북의 정치세력들과 합종연횡하여 이익을 챙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런 상황을 불편해했다.
이런저런 요인이 복잡하게 얽히면서 ‘우리가 옛 로마 시절에는 제일 잘 나갔어’ 식의 자기 위안이 힘을 얻고 이어 ‘과거 로마의 전통을 되살려 오늘을 다시 빛나게 하자’라는 서사로 번졌다. 중세에도 결코 사라져본 적이 없던 고대에 대한 존경이 이탈리아의 현실 속에서 급진화된 것이다. 게다가 중세의 오래된 관행대로 도시들은 서로 자신들이 로마제국의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일종의 족보 위조에 나섰다. 피렌체는 시저가 세웠고 로마의 전통이 도시 전체에 줄줄 흐른다는 식이었다.

고대 숭배의 빛과 어둠
무슨 이유였든 간에 일단 시작된 고대 숭배가 진지한 비즈니스로 변하면서 새로운 문화적 성과를 낳기 시작했다. 고문헌학이 발달했고, 고대의 문헌들을 새롭게 편찬하고 번역하려는 시도가 줄을 이었다. 사실 인문주의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나 콜루치오 살루타티조차 그리스어를 독해할 줄 몰랐다. 그들이 부활시켰다는 고대 라틴어 문헌만 해도 실제로 읽어보면 중세 라틴어의 티가 줄줄 흐른다. 읽기도 상당히 까다로운데, 이는 고대 라틴어의 멋지고 복잡한 온갖 문구들을 복제해서 중세 라틴어적 상상력에 구겨 넣었기 때문이다.

고대 공공연설문의 전통을 되살려 그 안에 키케로 스타일의 라틴어를 구현해 낸 레오나르도 브루니(Leonardo Bruni, 1370~1444) 같은 인물이 출현했을 뿐 아니라 동방의 비잔틴제국이 무너지면서 저명한 지식인들이 이탈리아로 넘어옴에 따라 그리스어에 관한 지식이 퍼지고 그리스 철학을 제대로 연구해 보려는 노력이 일어났다. 마르실리오 피치노가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아 설립한 피렌체의 플라톤 아카데미가 그 예다. 돈이 있는 곳에 재능이 모이듯 뛰어난 화가, 조각가, 건축가들이 이탈리아로 모여들었고 이들로부터 뛰어난 제자들이 등장했다. 물론 그 배후에는 부와 권력으로 이들을 후원해 줄 집단이 있었다. 앞서 말한 대로 이들은 경쟁적으로 재사들을 후원함으로써 자신들의 권좌에 분칠을 하고 광을 내고 싶어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역사를 알고 싶다면 바로 이들의 등장과 성장과 몰락을 알아야 한다. 다음 글에서는 이 중에서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메디치 집안의 이야기를 피렌체 공화정의 역사와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과 엮어 이야기하려 한다.

서울대를 졸업하고 베를린 훔볼트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학계에서 21세기 가장 혁신적인 마키아벨리 연구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위험한 국가의 위대한 민주주의: 국가의 미래, 어떻게 만들 것인가』, 『정치사상사 속 제국』(공저) 등 다수의 저서를 썼다.


4좋아요 URL복사 공유
현재 댓글 0
댓글쓰기
0/300

사람과 삶

영상으로 보는 KNOU

  • banner01
  • banner01
  • banner01
  • banner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