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로: 길상사 → 수연산방(상허 고택)
혜화동에서 북악산 방향으로 올라가다 보면 만나게 되는 넓은 지역이 있다. 현재 이곳을 우리들은 성북동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성북동의 역사는 그리 단순하지 않다. 1390년대 한양도성의 축조 당시에 이 공간은 자연 그대로의 산림 녹지였다. 시간이 훨씬 지난 170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여기에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했다. 당시 군사 요충지에 주둔한 군대가 농사를 지으며 살게 했던 둔전(屯田) 제도에 따라 이 공간에 성북둔(城北屯)이 설치됐고, 병사들과 가족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 이르자 경성에 살던 부자들과 권세가들이 유행처럼 이 지역에 별장을 지었다고 한다. 이를 전후로 문화예술인이 이곳에 많이 들어와 자리를 잡게 된다.
예를 들어 지금부터 살펴볼 길상사(吉祥寺), 백양당(白楊堂) 출판사의 사장인 인곡 배정국의 승설암(勝雪庵), 상허 이태준의 수연산방(壽硯山房), 만해 한용운의 심우장(尋牛莊) 등이 세워졌다. 이렇듯 이 지역은 근대로 접어드는 시기, 경성으로 대표되는 공간의 변화를 알 수 있는 또 다른 프리즘이자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유명한 문화예술인들의 그윽한 향기가 물씬 새겨져 있는 역사문화 공간이다. 
김자야와 백석 그리고 법정 스님
성북동 답사길에서 처음 들르는 곳은 바로 길상사다. 4호선 한성대입구역 6번 출구에서 마을버스를 탔다. 몇 정거장 지나지 않아 이내 좁다란 길로 접어들고 버스 역시 헐떡이며 올라간다. 거의 끝까지 다다르자 목적지인 길상사가 나타났다. 길상사 출입구 앞에 서자 도심 한복판에 뜬금없이 세워진 절이라는 이색적인 느낌, 동시에 그렇게 크거나 화려하지 않아 방문객을 편하게 환대해 준다는 느낌이 교차한다.
절 중앙에 있는 극락전(極樂殿)은 여타 절에 비해 작은 규모다. 특히 건물 자체가 전통 한옥이기에 다른 절의 건물들에 비해 소박하면서도 절제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낮은 높이의 극락전 한옥에는 다른 절의 법당들처럼 화려한 단청은 없지만 나무의 고유한 색을 간직한 처마의 풍만한 곡선이 유려하게 펼쳐져 있다. 바라볼수록 아름답다는 속마음이 절로 드는 건물이다.
길상사는 본래 1970년대까지 삼청각, 오진암과 함께 서울 3대 요정으로 불리던 대원각(大苑閣)을 1997년에 사찰로 재탄생시킨 곳이다. 이곳의 주인이었던 김영한(金英韓, 1916~1999)은 17세 때 조선 권번(券番)에 들어가 가곡과 궁중무를 익혀 유명한 기생이 된 인물이다. 길상사의 주인이라는 것 이외에 김영한을 유명하게 만든 사연이 바로 시인 백석(白石, 1912~1996)과의 관계다. 일설에 따르면 김영한은 1936년 함흥에서 시인 백석을 만나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또한 김영한은 백석에게서 ‘자야(子夜)’라는 이름을 받아 이내 자신의 이름을 김자야라고 고쳤고 그때부터 둘은 연인이 됐다는 이야기다.

물론 철저하게 확인된 이야기는 아니지만 결국 북쪽에 남아 일생을 보낸 시인 백석과 남쪽에 남아 부자가 된 여인의 사랑 이야기는 한반도의 분단이라는 상황과 맞물리면서 많은 이들에게 알려졌다. 1939년 만주로 떠나 다시는 남쪽으로 내려오지 못한 백석과 달리 김자야는 해방 이후에 남쪽에 남아 대학을 졸업했다. 그리고 1955년 성북동 땅을 매입해 한옥을 짓고 대원각을 열었다.
1980년대에 접어들어 대원각도 고급 음식점으로 바뀌었다. 1987년 김자야는 법정 스님(1932~2010)의『무소유』를 읽고는 깨달은 바가 있어 대원각을 절로 만들겠다고 결심한다. 그길로 법정 스님을 찾아가 대원각을 맡아 달라고 부탁하지만 법정 스님은 청을 거절했다. 이후 10여 년에 걸친 끈질긴 제안 끝에 1997년 마침내 법정 스님이 대원각을 조계종 송광사의 말사이자 ‘맑고 향기롭게’ 운동의 근본 도량으로 삼기로 하고, 이름을 길상사로 바꿔 절을 창건하게 된다. 이때 김자야는 길상화라는 법명을 받는다.
길상사는 넓지도 크지도 않다. 경내에는 극락전, 지장전(地藏殿), 설법전(說法殿) 등의 법당과 스님들의 처소가 있다. 그중에는 법정 스님이 기거했으며 그의 입적 이후 영정과 생전 입던 옷을 전시하고 있는 진영각(影閣)도 있다. 진영각은 평소 법정 스님의 가르침대로 소박한 공간이자 절의 제일 안쪽에 조용히 자리잡고 있는 공간이다.
마음을 가다듬고 다시금 극락전 쪽으로 내려오면 이곳의 원래 주인이었던 김영한, 김자야, 길상화를 기리는 사당이 있다. 사당 앞에는 작은 공덕비와 함께 백석 시인과의 인연을 적은 표지판도 놓여 있다. “내가 죽으면 화장해서 길상사에 눈 많이 내리는 날 뿌려 달라”라는 유언처럼 한국 근현대사의 아픈 길을 걸었던 길상화는 1999년 하얀 눈의 성대한 환대를 받으며 이 세상을 떠났다. 오늘날까지 길상사는 여러 이야기를 간직한 채 시민들에게 편안한 삶의 휴식터이자 경건한 삶을 반추하는 도량으로 남아 있다. 허전한 마음을 뒤로하고 다시 길을 나선다. 
오늘날 분단 속에서 가려졌던 이태준의 문학 작품들도
복원돼 널리 읽히고 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분단과 함께 기록도 없이 사라져 간
그의 생생한 삶의 모습들이다.
수연산방으로만 이태준을 추억하기엔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너무도 부족하다.
정지용, 이상, 김유정이 찾던 그곳
길상사에서 수연산방으로 가는 길은 쉽지 않다. 길상사에서 나와 다시 아래쪽으로 조금 내려오면 자그마한 슈퍼마켓이 보인다. 그 옆으로 난 좁은 골목길이 바로 수연산방(壽硯山房)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자그마한 언덕을 오르는 길머리에 ‘심우장 가는 길’이라는 표시가 달려 있다. 이 길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언덕을 내려와 다시금 큰길을 마주한다. 눈앞에 나타난 큰길은 성북천이 흐르는 성북동의 중심 길이다. 큰길에서 우측으로 조금 오르다 보면 주위 건물들과는 달리 이색적인 석축으로 둘러싸인 한옥 건물을 볼 수 있다. 이곳이 바로 소설가 상허 이태준(尙虛 李泰俊, 1904~?)이 지은 것으로 알려진 수연산방이다.
소설가 이태준은 한국 단편소설의 완성자로 평가받았지만 월북이라는 이력으로 인해 오랜 기간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시에 정지용이 있다면 소설에는 이태준이 있다”라는 세간의 평가만큼 그의 소설은 매우 아름다운 필체를 자랑한다. 그의 아름다운 글은 1988년 이른바 해금 조치와 함께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었다.
불우한 어린 시절과 달리 그의 문장은 아름답다. 1904년 철원에서 태어난 그는 5세인 1909년 아버지를 따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했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다시 철원으로 돌아온다(2012년 11월 20일에 개통된 경원선의 백마고지역이 이태준의 생가터―철원읍 율이리 소재―와 비교적 인접해 있다). 이후 외할머니 손에서 자라면서 매우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21년 휘문고보에 입학해 어렵게 배움을 이어가다 동맹휴교 주도자로 몰려 퇴학 당했다. 1927년 일본 유학에 올라 조치대학(上智大學) 예과에 입학했지만 1년 6개월 만에 자퇴할 정도로 그의 삶은 언제나 가난과 함께였다. 그의 삶에서 가난이 조금 사라진 것은 귀국 후 본격적으로 문학가 활동을 할 때였다. 바로 그때 이곳 수연산방을 지었다.
수연산방 앞에 서자 우선 기다랗게 놓인 석축과 담장 그리고 그 중간에 뚫린 직사각형 모양의 대문이 방문객을 맞이한다. 대문은 생각보다 아담하다. 안으로 들어서면 아담한 문과는 달리 넓게 펼쳐진 건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 넓지 않은 마당의 오른쪽에 본채, 왼쪽에 별채가 세워져 있다.
ㄱ 자 모양의 본채에 들어가려 면 돌계단을 올라야 한다. 넓게 열린 대청마루도 시원해 보인다. 지금은 수연산방이라는 전통찻집으로 쓰이고 있기에 모두 방처럼 보이나 돌계단을 기점으로 오른쪽에는 안방과 부엌의 살림 공간이, 왼쪽에는 서재를 겸했던 건넌방이 있다. 건넌방 앞에는 문향루(聞香樓)라는 자그마한 현판이 걸려 있다. ‘향기를 맡는 누대’라는 뜻처럼 그 앞에 서서 마당과 방안을 살펴보니 맑은 향기가 나는 것만 같다. 건넌방으로 들어가면 이태준을 비롯해 그가 주도적으로 결성했던 문학동인 구인회(九人會) 회원들의 사진들이 걸려 있다.
이태준은 1933년 이 집을 지은 후 월북하는 1946년까지 이곳을 수연산방이라 이름 짓고 살았다. 이 시기 그는 단편으로는「달밤」,「고향」,「돌다리」등과 장편으로는『황진이』,『왕자 호동』등 을 썼다. 김기림, 정지용, 이상, 김유정 등의 문인들이 이곳을 자주 찾았다. 수연산방에서 수연(壽硯)은 ‘오래된 벼루’를 뜻한다. 오래된 벼루가 있는 산방이라는 이름을 떠올리니 다른 무엇보다 오래된 벼루에서 풍기는 묵 냄새가 먼저 연상된다. 문향루도 아마 이러한 의미와 연관된 이름이 아닐까 싶다. 이태준은 이처럼 향기를 꿈꿨고 그 마음처럼 향기 나는 글을 평생토록 지으며 살았다. 이태준 소설의 핵심을 글에 담긴 서정성이라고 평가하듯이 그의 글에는 서정성이 마치 고향에서 풍기는 향기처럼 배어 있다. 하지만 그토록 아름다운 이태준의 글은 한반도 근현대사의 급격한 변화에 따라 이내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해방이 이태준의 문학 세계를 더욱 열어 줄 것이라 기대했지만 그 기대는 차가운 한반도 분단 속에서 금세 와해하고 말았다.
1946년 이태준은 월북하면서 이 집을 누이에게 넘겨준다. 1998년부터 수연산방은 전통찻집으로 변모했다. 여전히 그 찻집에서 이태준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무엇보다 다른 곳들에 비해 원형의 보존 상태가 좋고 기념탑 같은 이태준의 흔적들이 어느 정도 보존돼 있어 그를 기억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좋은 사색의 공간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분단 속에서 가려졌던 이태준의 문학 작품들도 복원돼 널리 읽히고 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분단과 함께 기록도 없이 사라져 간 그의 생생한 삶의 모습들이다. 수연산방으로만 이태준을 추억하기엔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너무도 부족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