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늘 먹고 사람 된 곰의 자손이라서 그럴까? 한국인의 마늘 사랑은 유별나다. 마늘을 향신료보다 채소로 소비하는 데 자부심을 느끼고 한국의 1인당 마늘 소비량이 세계 1위라는 거짓 정보에 열광한다(중국이 압도적 1위다). 20여 년 전,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이 세계적으로 확산할 때 한국을 거의 비껴간 것을 두고 한국인의 ‘마늘 신화’가 세계적으로 주목받았고, 불과 몇 년 전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유행이 한창일 때도 마늘이 감염을 예방한다는 인포데믹(infodemic)이 지구를 휩쓴 바 있다. 이런 기류에 편승해 검증되지 않은 속설을 스스럼없이 내뱉는 전문가와 위정자도 적지 않았다. 이처럼 한국 사회상의 일면을 표상하는 ‘마늘 신화’는 언제 어떻게 형성됐을까?

식민 지배와 마늘 혐오
마늘은 냄새를 동반한다. 타자화와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주요 감각은 후각이며, “이민족의 체취는 꼭 동물이 다른 동물의 체취에 본능적으로 어금니를 드러내는 것과 비슷한 작용”을 한다. 조선을 ‘야만국’으로 규정한 메이지(明治) 일본이 지각한 조선인의 체취는 ‘마늘 냄새’였다. 그들에게 조선인은 “음식물도 가옥에 준해 불결한 것을 먹고 특히 부추, 마늘처럼 악취가 나는 것을 즐기므로” “코를 막고 달아나고 싶을 정도”였다. 소위 ‘지식인’이라는 우스다 잔운(薄田斬雲, 1877~1956)은 문명과 야만을 냄새로 가를 수 있다며 조선인의 냄새는 “단지 마늘 냄새만이 아니라 불결함이 따라다니는 쓰레기통의 냄새”라고 폄훼했다. 또 다른 ‘지식인’ 야마지 아이잔(山路愛山, 1865~1917)은 마늘과 고추를 좋아하는 조선인은 “미개의 본색을 드러낸” 것이라며 ‘확인 사살’을 잊지 않았다. 이처럼 조선인의 ‘야만적인’ 마늘 섭취는 식민 지배의 좋은 구실이었다.
대한제국을 병탄한 일본은 위생과 방역을 내세우며 식민 통치의 정당성을 주장했지만, 일제강점기 내내 조선은 전염병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법정전염병의 조선인 환자 수 집계는 누락을 넘어 포기에 가까웠다. 이런 엉터리 통계를 두고 식민지 위생 당국자는 ‘불결한’ 조선인이 ‘위생적인’ 일본인보다 전염병에 훨씬 덜 걸리는 이유를 설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 거주 일본인의 폭발적인 전염병 발병률은 풍토와 기후에 적응하지 못한 탓이라고 적당히 둘러대면 그만이었지만, 조선인의 발병률이 일본 본토의 일본인보다도 크게 낮은 것은 조선인의 신고 누락만으로는 해명하기 어려웠다. 궁지에 몰린 그들이 눈을 번뜩인 것은 조선인이 즐겨 먹는 마늘, 고추, 소주였다. ‘초심’으로 돌아간 것이다.
방역 책임 회피에 동원된 일본 학자들
1924년, 경성부 위생기사 가토 사토시(加藤賢)는 “조선사람이 ‘고추’를 많이 먹는 까닭에 전염병에 덜 걸린다는 것은 아직 연구해볼 여지가 있지만, ‘마늘’은 확실히 관계가 있는 줄로 생각”한다며 세간을 현혹시켰다. 이에 언론은 즉각 “조선인이 고추와 마늘을 많이 먹는 것은 미개해서 그렇다”더니 “그렇게 배척받고 학대받던 고추와 마늘도 시절 맛날 때가 있나”라며 냉소적으로 반응했다. 1926년, 경성제국대학 초대 의학부장으로 조선 의학계를 이끌던 ‘세계적인 의학자’ 시가 기요시(志賀潔, 1871~1957)가 쐐기를 박았다. “조선에 결핵병자가 적다는 것은 마늘을 많이 먹는 까닭으로 균에 대한 저항력이 왕성한 까닭이다.” 그는 경성의학전문학교 교장이었던 1921년에도 인플루엔자 환자의 “통계를 본즉 술을 많이 먹는 사람들은 별로 걸리지 않는 모양인데, 이것은 추울 때 술을 먹으면 열이 발하여 체온을 보존하는 다소간의 효과를 얻은 것인 줄로 생각”한다고 발언한 ‘전적’이 있었다.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약물학교실 강사 이시도야 츠토무(石戶谷勉)는 “현재 마늘을 식용으로 쓰고 있는 것은 조선, 지나[중국] 외에 인도, 아라비아 지방으로, 모두 전염병의 유행지”라며 거들었다. 마늘 하나로 방역 책임도 회피하고 조선인의 ‘야만성’도 드러낼 수 있으니 그야말로 ‘일석이조’가 아니겠는가! 위생 당국과 의학계의 이런 발언은 영향력이 클 수밖에 없었고, 전염병에 대한 마늘의 ‘효능’은 대중의 상식으로 정착해갔다. “날것이나 익힌 것[마늘]을 평시에 먹으면 전염병을 예방할 수 있다.” “살균력이 있어 전염병 특히 이질 같은 데는 상당한 예방이 된다.” “소주 5홉 병 3분의 1쯤 마늘을 갈아 넣은 것을 하루에 한 잔씩 상당히 오랫동안 먹으면 몸에 현저한 효과가 나타난다.” 소주와 고추가 위장을 소독해 조선인이 전염병에 잘 걸리지 않는다는 설도 퍼졌다.
지금도 회자되는 ‘감염병
민간요법’에는 제국주의와
민족주의, 학대와 원한으로
점철된 한국 근현대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다.
마늘은 정말 전염병 예방에
효과가 없었나?
참고로 식민지 조선의 ‘마늘 전도사’
시가 기요시는 일본 본토에
돌아간 후 공개 석상이나
지면을 통해 마늘의
‘마’ 자도 꺼내지 않았다.
다른 한편으로 의학적 근거가 없다며 신중론도 대두했지만, ‘대세’를 뒤집기엔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마늘의 ‘효능’에 고무된 조선인은 식민자의 차별적인 시선과 책임 회피의 구실을 긍정적으로 체화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위생시설이 많지 못하고 위생사상이 보급되지 못한 현재의 우리들로서는 비교적 전염병의 위협을 덜 받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 원인의 하나로서 마늘을 들 수가 없지 않습니다. 서양사람이 안 먹는 마늘이라고 천대할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오히려 그 은혜를 감사해야 합니다.” 마치 돌 맞은 새가 웃는 형국이었다. 이처럼 ‘마늘 신화’는 일제강점기에 식민 당국이 만들어낸 ‘작품’이었다.
광복 이후에도 ‘마늘 신화’는 계속됐다. 1946년, 전재민(戰災民)의 대이동에 동반해 남한 전역에 콜레라가 유행했을 때, 민간에서는 “마늘에 소주 먹는 소란을 피웠”고, 의학계에서는 콜레라균이 김치에서는 10~15시간 후, 마늘즙에서는 3시간 만에 사멸한다고 발표함으로써 ‘마늘 신화’에 날개를 달았다. ‘소주’도 지지 않았다. 1949년, 뇌염이 유행하자 “소주가 뇌염 예방에 좋다는 바람에 개성에는 소줏값이 껑충” 올랐고,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소주 먹는 것이 유행”이었다. ‘소주 열풍’은 홍역을 앓는 어린이에게도 번졌다. “소주를 먹여 아이가 취하도록 하는 것은 그만둬야” 한다는 볼멘소리가 나올 정도였다.
‘식민지 문화 유산’이 된 마늘 신화
1963년, 다시 콜레라가 유행하자 소환된 ‘마늘 신화’와 ‘소주 열풍’이 결합해 전국을 휩쓸었다. “콜레라 예방 및 치료에 마늘과 소주가 특효라는 소문이 퍼져 요정, 바, 대폿집 등에서 마늘 안주에 소주만을 찾아 날개가 돋친 듯이 팔린” 것이다. 속설에 불과하다는 전문가들의 일축에도 언론은 꿋꿋했다. “소주를 마시는 사람이 많아지고 날마늘 먹는 사람이 적지 않다고. (……) 예전에 한국인과 일본인이 전염병에 걸리면, 한국인의 경우 그 사망률이 일본인보다 훨씬 적었다. (……) 한국인은 자기의 위에 웬만큼 자신을 가져도 무방하리라.”
1969년에도 콜레라가 유행하고 여전히 마늘과 소주가 불티나게 팔리자 “불결한 곳에서 생선, 낙지를 고추장과 마늘만 찍어 먹으면 소독이 다 되는 줄 아는 이 어리석은 백성들이 괘씸하”다는 비난조의 언론도 있었지만, 1970년대에 일본에서 마늘의 인기가 치솟자 ‘마늘 신화’는 민족주의적 색채를 띠고 부활하게 된다. “마늘 냄새 난다고 한국 사람을 마치 하등동물이나 되는 것처럼 멸시하고 구박하던 일인들이 마늘을 갑자기 즐겨 먹”는 현상에 대해 “이질에 맥 못 추는 일본 사람에 비겨 이질 따위는 감기 정도로 여기는 한국인의 우성 체질도 이 마늘의 비력(秘力) 때문”이라고 과시하고 일본인이 개발한 “냄새 없는 마늘은 개마늘이지 참마늘이 아니”라고 헐뜯는 식이었다.
1980년대 이후 ‘마늘 신화’는 민족적 르상티망의 표출과 더불어 민족적 우위성의 과시로 이어지며 더욱 강화된다. “마늘 냄새만 나면 ‘조센진 냄새 난다’고 상을 찡그”리고 “드라큘라처럼 유난히도 마늘 냄새라면 질색을” 한 일본인들이 김치를 맛있게 먹는 세태를 비꼬면서도 우월감을 감추지 못한 것이다. “우리가 먹고 있는 이 마늘이 인체의 중금속 오염을 막아주는 놀라운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국제 영양학회에서 인류에게 권장하는 보건 식품 베스트 10에 마늘이 상위에 랭킹되기도 했다.” “또 1백 50종의 식물 향균력을 조사했더니 가장 우수한 것이 마늘과 양파 등 훈채였다 한다. 훈채 민족의 훈채 만세다.”
이처럼 조선인에 대한 일본인의 혐오와 핍박에서 비롯돼 식민 당국의 입맛에 맞게 날조된 ‘마늘 신화’는 광복 후에도 식민 통치의 ‘잔상’과 그 반동을 통해 더욱 견고해졌으니 끈질긴 ‘식민지 문화 유산’이라 할 만하다. 소주로 위장을 소독한다는 우스갯소리도 마냥 우스운 것만은 아니다. 지금도 회자되는 ‘감염병 민간요법’에는 제국주의와 민족주의, 학대와 원한으로 점철된 한국 근현대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다. 마늘은 정말 전염병 예방에 효과가 없었나? 참고로 식민지 조선의 ‘마늘 전도사’ 시가 기요시는 일본 본토에 돌아간 후 공개 석상이나 지면을 통해 마늘의 ‘마’ 자도 꺼내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