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편에서도 이야기했듯 르네상스 이탈리아를 도시공화국 전성시대로 그리는 것은 착각이다. 시뇨레라는 전제군주들이 권력을 독점한 사례는 물론이고, 공화정의 껍데기나마 유지한 도시들에서도 소수 엘리트들이 파당을 이루어 권력을 휘두르는 일은 일상이었다. 한국인들에게 가장 친숙한 이탈리아 도시 중 하나인 피렌체는 후자에 속한다. 이미 1293년 피렌체의 정치권력은 대형 길드들이 장악했고, 시민들의 광범위한 참여는 불가능했다. 1378년부터 4년간 지속된 축융공들의 치옴피 반란은 길드들의 노예와 다름없던 피렌체 하층민들의 불만이 터져나온 사건이었다.
권력과 문화예술의 결탁
대개의 과두정이 그렇듯 누가 우두머리가 될 것인가를 두고 권력 다툼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우리가 피렌체 하면 떠올리는 메디치 가문은 그렇게 우두머리의 자리에 오른 세력이다. 메디치 가문은 은행업으로 부를 축적하여 14세기 후반 이후 피렌체의 유력자로 떠올랐으며 1434년에는 알비치 가문을 밀어내고 피렌체 정치를 쥐락펴락하게 됐다. 특히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에서는 메디치 가문을 문화와 예술의 후원자로 기억하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메디치 가문이 인문주의와 예술을 후원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후함’은 이 가문이 추구했던 교활하고 잔인한 권력정치와 떼어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메디치 가문은 경쟁자의 추방, 재산몰수, 공화정 요인들에 대한 협박과 압력, 관리선출에서 선거조작까지 전형적인 독재자들이 행하는 모든 추잡한 짓을 서슴지 않았고, 궁극적 목적은 상업적 이익을 지키는 것이었다. 메디치 가문은 피렌체 시민들을 위해 돈을 푼 만큼, 어쩌면 그 이상의(‘어쩌면’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은 권력이 주는 이익에는 무형의 것도 있기 때문이다) 이익을 챙겼다.
이들의 후원을 받은 인문주의자들은 기꺼이 메디치 가문의 나팔수가 되었다. 레오나르도 브루니는 피렌체가 자유롭고 능력에 따라 기회가 골고루 분배되는 도시로서 모든 기독교 세계를 비추는 문명의 빛이라는 내용의「피렌체 찬가」라는 라틴어 산문을 지었다. 그는 난니 스트로치라는 피렌체 귀족의 장례 연설문에서 피렌체의 정치체제를 ‘민주정’으로 칭송하며 인민 지배야말로 진정한 자유의 형태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인문주의자들이 공화정을 옹호한 이유
여기까지만 읽으면 브루니가 뼛속까지 공화주의적 자유와 평등에 경도된 인물이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실제로 여러 세대의 학자들이 근대 공화주의의 출발을 브루니와 그의 시대로부터 찾기 위해 노력했다. 문제는 이런 학자들이 오늘날의 공화주의의 상(像)을 여과 없이 그 주변의 인문주의자들에게 투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힘없는 민중은 안중에도 없었던 브루니를 비롯한 이들 피렌체 ‘공화주의자’들은 지배 엘리트들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고 철저히 그들의 시각에서 모든 것을 판단했다. 피렌체 공화주의자들이 내세운 기회의 평등 역시 재력과 신분에 상관없이 동일한 정치적, 사회적 권리를 인정하는 평등은 아니었다.
피렌체의 인문주의자들이 공화정과 그 제도에 구현된 시민의 자유라는 이념을 내세운 것은 국제정치적 이해관계와 관련이 있다. 피렌체는 14세기 후반 이후 비스콘티 가문이 지배하는 밀라노와 분쟁 중이었다. 피렌체의 이데올로그(idologues)들은 피렌체를 치켜세우고 밀라노를 깎아내릴 근거를 찾느라 혈안이었고, 두 도시 간 정치체제상의 차이는 프로파간다의 소재로 적절했다. ‘군주정의 예속에 맞선 공화정의 자유’라는 이분법은 피렌체 시민들에게도 설득력 있게 들렸을 것이다. 피렌체의 공화주의가 허상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지만, 그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 공화주의는 아니라는 점은 염두에 두어야 한다. 역사적으로 거대한 정치이념의 시작은 ‘모호’하고 ‘불순’했던 경우가 많고, 공화주의 역시 그러했을 뿐이다.
유럽의 격변과 메디치 가문의 부활
피렌체 공화주의의 전기를 마련한 것은 국제정치적 격변이다. 나폴리의 왕위계승권이 자신에게 있다는 명분으로 1494년 이탈리아를 침공한 샤를 8세는 나폴리로 가는 길을 내놓으라며 이탈리아 도시들을 압박했다. 이에 무기력하게 대응한 메디치 가문을 향해 시민들의 좌절과 분노가 쏟아졌고 반대파들은 이를 적절히 이용했다.

이 시기에 권력의 공백을 메꾼 도미니크파 수도사 지롤라모 사보나롤라는 피렌체의 정치적 위기가 메디치 가문이 부추긴 시민들의 윤리적 타락에서 비롯되었다고 설파했다. 시민들이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며 신심 위에 하나가 되는 참된 공동체를 이룬다면 신은 그들이 다시 번영하도록 도울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정치체제 개혁을 제안하고 실행에 옮긴 사보나롤라는 5천 명 규모의 시민들이 참여하는 대회의체(Consiglio Grande)를 설립하여 공화국의 기반을 넓혔다. 하지만 급진성과 친프랑스적 태도로 교황 알렉산더 6세와 권문세가들의 반발을 사고 지나친 엄격주의로 시민들의 염증을 자아낸 끝에 사보나롤라는 1498년 화형주에 매달려 생을 마감했다.
그의 사후에 피렌체를 이끈 것은 피에로 소데리니를 수반으로 한 공화정부였다. 이 무렵 또 하나의 중요한 정치적 개혁이 있었는데, 바로 1503년 도입된 종신통령 제도이다. 원래 피렌체 시민들은 권력 독점에 대해 부정적이었으나 16세기 들어 온갖 정치적 골칫거리에 시달리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샤를의 침공 기간에 잃어버린 피사에 대한 지배권은 여전히 회복되지 않고 있었다. 피사를 잃는다는 것은 해양 접근권의 제한을 의미했다. 뿐만 아니라 교황 알렉산더 6세의 서자인 체자레 보르지아가 중부 이탈리아에서 군사활동을 강화하며 피렌체를 압박하고 있었다. 샤를의 침공 이후로 이탈리아는 프랑스, 스페인과 신성로마제국의 세력이 경합하는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이런 녹록지 않은 상황은 피렌체인들에게 ‘우리에게도 강한 구심력과 지도력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부추겼고 이는 종신통령 제도의 도입으로 이어졌다.
몇 가지 제도개혁에도 불구하고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소데리니 정부는 내부 과두세력의 반발과 외부세력의 압박 속에 고전하다가 1512년 스페인을 등에 업은 메디치 가문에 의해 무너졌다. 권좌에 돌아온 메디치 가문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사보나롤라와 소데리니 정부가 이룩한 제도개혁을 무로 돌리는 것이었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 창조적 오독
재미있는 반전은 공화정이 몰락한 이 시기에 피렌체 공화주의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이론적 업적이 등장했다는 것이다. 그 업적은 소데리니 아래에서 일하다가 메디치 가문이 돌아온 후 관직을 잃었던 니콜로 마키아벨리라는 인물의 손에서 나왔다. 그는 정부로 복귀할 기회를 마련하기 위해 『군주론』이라는 저술을 메디치 가문에 바쳤다. 유럽 정치사에서 손꼽히는 문제작인 이 책에서 그는 정치지도자는 강한 의지와 실천력을 갖추되 상황이 요구한다면 윤리규범을 초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피렌체의 공화주의가 허상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지만,
그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 공화주의는
아니라는 점은 염두에 두어야 한다.
역사적으로 거대한 정치이념의 시작은
‘모호’하고 ‘불순’했던 경우가 많고,
공화주의 역시 그러했을 뿐이다.
권력욕만을 추구하는 정치지도자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마키아벨리는 정치가 윤리 교과서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군주론』에서 알리고자 했지만, 옳고 그름의 가치판단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는 아무리 현명한 지도자라 할지라도 그 목적이 잘못되었다면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믿었다. 혹자는 그런 마키아벨리가 왜 필생의 역작을 공화국의 파괴자인 메디치 가문에 바쳤는지 의구심을 느낄 것이다. 사실 이 문제는 오랫동안 학자들을 괴롭혔다. 마키아벨리가 여러 저작에서 남긴 언급들은 그가 메디치 가문의 전횡과 협잡에 대해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었다.
한 가지 답은 마키아벨리가 자신이 추구한 정치개혁을 밀어붙일 세력을 메디치 가문 이외에는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소데리니 정부 치하에서 일하면서 피렌체가 바뀌어야 한다는 일종의 ‘시대정신’에 깊이 공감했던 인물이었다. 특히 그가 담당한 분야가 외교와 군사였기 때문에 정책결정의 우유부단함과 비효율성 같은 피렌체 공화국의 약점에 대해 우려하고 있었다.
소데리니 정부의 전복 후 기댈 곳이 없어진 마키아벨리는 메디치 가문에 기대를 걸었다. 메디치 가문은 반공화국적으로 행동해 왔지만 공화정이라는 외피를 완전히 벗어던지지는 않았다. 마키아벨리는 나름의 분석을 통해 피렌체에 군주정이 들어선다면 메디치 가문에도 큰 위협이 될 것이므로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메디치 가문이 공화국 개혁에 나설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키아벨리에게는 이런 기대를 갖는 것 외에 딱히 뾰족한 대안도 없었다.
마키아벨리는 공화국 재건에 있어 메디치 가문이 참조해야 할 주된 논거를 『군주론』과 비슷한 시기에 집필한 『로마사론』에서 상세하게 다뤘다. 그가 그린 이상적 공화정은 광범위한 시민 참여가 허용되는 혼합정치체제라고 할 수 있다. 혼합정치체제는 군주정, 귀족정, 인민정의 요소가 조화롭게 공존하는 정치질서를 말한다. 완전히 새로운 주장은 아니었지만, 마키아벨리의 강한 친민중적 경향에서 독창성을 찾을 수 있다. 그는 인민에 대한 정치적 문호 개방이 분쟁과 불안을 야기하는 요인인 동시에 강한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는 감수해야 할 기회비용이라고 여겼고, 호민관 제도를 통해 인민에게 널찍한 활동공간을 마련해준 로마 공화정을 이상적인 정치체제로 평가했다.
마키아벨리가 메디치 가문 출신 교황 레오 10세의 위임을 받아 작성한 ‘피렌체 공화국 개혁안’을 보면 그의 이런 생각이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무엇보다 그는 사보나롤라가 도입한 대회의체의 복원을 제안함으로써 자신이 꿈꾸는 공화정의 이상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마키아벨리에게 공화정은 모든 정치체제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니라, 특정한 전통과 지역 안에서 통용될 수 있는 정치적 삶의 형식이었다. 또 다른 전통을 가진 또 다른 지역에서는 공화정보다 군주정이나 귀족정이 바람직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의 공화주의는 지역의 전통과 특색에 맞게 군주정이든 공화정이든 적절한 정치체제를 택하면 된다는 중세 후기의 정치관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그럼에도 (상당 부분은 오해 때문에) 마키아벨리는 이후 영국과 다른 유럽 지역의 근대 공화주의자들에게 중요한 이론적 준거점으로서 읽히고 토론됐다. 마키아벨리 정치이론의 수용이 이처럼 ‘자의적’이었다고 해서 놀랄 필요는 없다. 이런 ‘창조적 오독’은 하나의 정치 이데올로기가 성장하고 발전하는 과정에서 그리 낯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