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세기에 일어난 종교개혁은 유럽의 종교적 변화에 관한 이야기지만, 종교와 무관하더라도 유럽의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종교개혁의 대략적 서사는 16세기 초 마르틴 루터(1483~1546)와 장 칼뱅(1509~1564)이 주도한 종교개혁이 성직자의 부패와 교회의 타락으로 권위를 상실한 가톨릭 교회로부터 신흥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탄생을 선도했고, 개혁 선구자들의 확고한 신념과 노력으로 새로운 그리스도교 종파가 정립되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종교개혁을 중세의 미신적 요소를 벗어버리고 성서 텍스트에 기반하여 합리적 신앙관을 낳은 근대적 현상으로 인식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종교개혁이 근대 유럽을 만들어내고 진보와 자유의 씨앗을 낳은 힘이라고 규정하는 해석도 이러한 인식과 궤를 같이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야기는 종교개혁의 본질을 설명해주지 못한다. 최근 학계에서는 종교개혁과 근대성의 상관관계에 대해 다양한 측면에서 재고하고 있으며 종교개혁의 성취를 역사적 맥락에서 파악하려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19세기 후반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1864~1920)의『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핵심 주장, 즉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이 서양의 자본주의 정신을 낳았다는 이론은 이제 학자들에게 설득력을 잃고 있다.

종교개혁은 어떤 의미에서는 신화화되어 있다. 가장 대표적인 신화는 가톨릭 교회가 자력으로는 갱신할 수 없을 정도로 타락했기 때문에 종교개혁이 일어났으며, 루터와 칼뱅이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두 날개였다는 인식이다. 우리는 종교개혁이 무엇이었는지를 설명함으로써 종교개혁에 대한 기존 인식들을 재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종교개혁의 배경에 대한 재인식
흔히 종교개혁의 가장 큰 이유로 가톨릭 교회의 부패와 세속적 종교 관행을 꼽는다. 1517년 루터가 면벌부 판매를 비판할 목적으로『95개 논제』를 쓴 장면이 중세 이후 교회 내에 만연한 부패를 극적으로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사실 루터 이전부터 면벌부 판매를 비롯한 교회의 세속적인 행태에 대한 내부 비판은 줄기차게 있었다. 루터는 교회의 오랜 잘못된 행태에 맞서 신앙과 신학의 갱신을 촉구하기 위해 자신의 글을 세상에 공개했고, 그의 행동은 나름대로 명분이 있었다. 그런데, 이후 종교개혁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루터의 행동을 ‘개혁’으로 규정하며 프로테스탄트 종교 갱신 운동을 그 이전의 타락과 부패가 만연한 상황에서 필연적으로 벌어질 수밖에 없었던 사건으로 인식하고, 개혁의 대상인 교황과 교회의 지배층은 부패의 온상으로 묘사했다.
종교개혁의 원인을
중세 가톨릭 교회의 부패에서만
찾으려는 시도는 역사적 실상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다.
… 여러 종교개혁의 존재가
주목받고 있는 시점에서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다양성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물론 15세기부터 16세기 초반 교회의 상황을 ‘부패’라는 한 단어로 묘사하는 것은 적절치 못하다. 오히려 가톨릭 교회는 대체로 진지한 신앙의 열정을 보여주고 있었고, 성직자들의 기도는 경건했으며, 교회의 전례는 신에 대한 경배를 속인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했다. 새로 건립된 교회와 부속 예배당의 숫자가 증가하고 성인과 순례자를 위한 전례 행사의 인기는 여전했다. 이 시기의 교회가 부패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이겠으나, 전후 시기에 비해 타락의 정도가 심했다고 볼 이유는 없다. 따라서 종교개혁의 원인을 중세 가톨릭 교회의 부패에서만 찾으려는 시도는 역사적 실상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다.
오히려 당시 교황과 교회의 권위가 약화된 요인으로 교회 내의 문제들 못지않게 외부의 환경적 변화도 한몫했다. 중세 말기 이후 세속 통치자들이 꾸준히 이루어 온 정치권력의 강화는 유럽을 개별적인 주권국가 혹은 영토 집단으로 바꾸었다. 교황의 권위가 약화된 잉글랜드와 프랑스를 시작으로 유럽 곳곳에서 중세적 이상이었던 보편교회의 개념은 들어설 자리를 잃었다.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가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당한 루터를 적극 보호해준 것은 단지 교황의 부패 때문만은 아니었다. 루터와 프리드리히의 제휴는 종교개혁이 세속권력의 정치적 이해관계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다수의 프로테스탄트 ‘개혁들’
종교개혁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을 꼽자면 루터와 칼뱅을 들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종교개혁의 초기 국면에서 두 사람이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했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종교개혁이 자칫 16세기 전반 독일과 스위스 일부 지역에서 일부 개혁가들에 의해 일어난 단발적 사건으로 이해될 소지가 있다.

역사가들이 대문자 ‘R’로 표기하는 종교개혁(Reformation)은 16세기 이후 프로테스탄트 신앙의 출현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지만, 개혁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교회의 개혁 운동은 일찍이 중세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이러한 개혁 운동은 멀리는 10~11세기 클뤼니 수도원을 중심으로 교회의 세속화를 숙청하고 혁신을 부르짖은 개혁의 목소리부터 14세기 잉글랜드 신학자 존 위클리프(1328?~1384)와 보헤미아 사제 얀 후스(1369?~1415)의 급진 운동을 망라한다.
이제 여러 종교개혁의 존재가 주목받고 있는 시점에서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의 다양성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독일에서 루터의 명성이 퍼지고 있던 시기에 스위스 취리히에서는 울리히 츠빙글리(1484~1531)가 칼뱅보다 앞서 종교 운동을 이끌었다. 츠빙글리 역시 루터와 유사한 신학적 입장을 제시했다. 진리의 유일한 토대는 성서라고 본 그는 교황과 공의회의 권력을 무시했다. 츠빙글리의 개혁 운동은 취리히 교회 내 성상과 미사의 폐지와 수도원 몰수 등 일련의 성과를 거두었다.
한편, 바다 건너 잉글랜드에서는 종교개혁 운동의 양상이 대륙과 사뭇 달랐다. 개혁의 시발점이 바로 왕실이었기 때문이었다. 국왕 헨리 8세(1491~1547)는 첫째 왕비와의 혼인을 무효로 할 목적으로 잉글랜드 교회를 가톨릭과 분리하고 자신을 수장으로 삼는 수장령을 내세워 교회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이로써 잉글랜드 국교회(the Church of England)가 역사 속에 등장했다. 이 과정에서 잉글랜드 국교회는 가톨릭적 전례와 제도를 유지하면서도 칼뱅을 비롯한 프로테스탄트 신학을 받아들이는 중도적 입장을 취해 대륙의 프로테스탄트 교회와 상당히 다른 색채를 띠었다. 잉글랜드 국교회가 잉글랜드에서 자리를 잡아가는 동안 북쪽 스코틀랜드에서는 존 녹스(1514?~1572)가 칼뱅주의를 전파했다. 이후 스코틀랜드 교회는 ‘장로교’ 제도를 수립하여 칼뱅주의를 확연히 표방했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은 다양한 소수 분리주의 개혁 운동을 낳기도 했다. 중세 교회를 부정한 급진 개혁파는 루터와 츠빙글리의 신학에서 더 나아가 급진적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대표적인 급진파는 재세례파였다. 재세례파를 조직한 콘라트 그레벨(1498?~1526)은 츠빙글리의 교리, 특히 유아 세례 허용 태도를 비판하여 성숙하고 동의 가능한 성인의 세례를 주장했다. 재세례파 외에도 개인적 경험과 믿음의 내면화를 중시한 영성주의자나 반삼위일체론을 부르짖은 소치니파 등 다양한 분리주의 급진 운동이 프로테스탄트 진영 내에 산재했다.
가톨릭의 대응과 쇄신
종교개혁의 불꽃을 피운 이들이 가톨릭 교회의 교리와 관행에 대항했기 때문에 종교개혁을 곧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탄생으로 이해하는 경향은 오랫동안 이어져 왔다. 19세기 프로테스탄트 역사가들은 가톨릭의 대응을 소극적이고 어떤 면에서는 반동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의미에서 ‘반종교개혁(Counter-Reformation)’이라 불렀다. 한때 이 관점이 역사학계의 지배적 해석으로 자리하면서 교황청과 가톨릭 교회의 활동이 무시되거나 소략하게 다루어졌다.
가톨릭 교회가 만약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반대할 목적으로 무력을 포함한 각종 수단을 모색하고 프로테스탄트 개혁가들을 박해할 수단을 고안하는 데 그쳤다면, 그것은 아마도 반종교개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교회는 검사성성을 동원하여 금서 목록을 지정하고 종교재판을 벌이거나 세속 군주의 무력행사를 장려하기도 했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는 무력에만 의존하지 않았다. 가톨릭 교회 스스로 쇄신을 위한 개혁안을 내놓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가 트리엔트 공의회였다. 이탈리아 북부 트리엔트에서 소집된 공의회는 1545년 12월 13일 처음 열려 1563년까지 18년간 산발적으로 소집되었다. 공의회는 가톨릭의 교리와 성사를 공식화하고 사제를 중심으로 한 위계질서를 강조함과 동시에 사제들의 교구 상주 의무를 강화하고 사제 양성을 위한 신학교를 설립할 것을 요청했다. 공의회의 결정 사항들은 교회의 전통과 권위를 강화하고 악폐의 원인이었던 사제의 행실 단속을 권장함으로써 교황의 권위를 높이려는 자구책이었다.
가톨릭 교회 내의 대응과 더불어 이냐시오 데 로욜라(1491~1556)가 세운 예수회의 적극적인 선교 활동은 가톨릭 교회가 프로테스탄트의 성장에 소극적이고 강압적인 방식으로만 대응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가톨릭 종교개혁(Catholic Reformation)’으로 불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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