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이승환 고려대 교수

동양의 문화 전통에서 인간이 걷는 ‘인생의 회로’는 사계절이 순환하는 ‘자연의 회로’와 동형 구조(isomorphism)로 파악됐다. 자연이 춘-하-추-동의 궤적을 그리며 순환하듯 인간의 삶도 태어나서-자라나고-결실을 맺고-안식하는 네 과정으로 간주한다. B.C. 200년경에 성립된 자연철학서 겸 의학서인 『황제내경』에서는 자연의 순환 과정을 생·장·수·장(生長收藏)이라는 네 가지 패턴으로 파악하고, 여기에 춘하추동의 네 계절을 조응시킨다.
발달심리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인 에릭슨(1902~1994)의 인생 회로 8단계 이론을 『황제내경』에 나오는 자연계의 순환 과정에 맞추어 재정리해보아도 재미있을 것 같다. 유아기에서 아동기에 이르는 기간은 춘생(春生)에 해당하고, 유희기에서 시작해 학령기와 청소년기에 이르는 기간은 하장(夏長)에 해당할 것이며, 초기 성인기에서 본격 성인기에 이르는 기간은 추수(秋收)에 해당하고, 마지막으로 완숙한 성인기는 동장(冬藏)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인생 회로의 각 단계에서 성취되는 긍정적 힘을 자연의 순환 과정에 비추어 재정리해 보아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희망과 의지력은 춘생(春生)의 단계에서 필요한 덕목이고, 목표지 향성과 능숙성 그리고 충실성은 하장(夏長)의 단계에서 요청되는 덕목이며, 사랑과 돌봄은 추수(秋收)의 단계에서,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혜는 동장(冬藏)의 단계에서 특징적으로 발견되는 덕목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동양의 문화 전통에서도 생·장·수·장의 순환 과정에서 자아의 성장을 위해 어떤 노력과 공부가 필요하다고 여겼으며 이를 뒷받침하는 사회 시스템과 문화적 환경이 작동했다. 서양의 인생 회로와 달리, 동양에서는 태어나기 이전 단계에서 행해지는 ‘출생 이전의 교육(胎敎)’을 출생 후의 교육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보았고, 죽음을 향해가는 생물학적 노쇠의 과정을 오히려 지혜와 덕행이 무르익는 의미론적 완결의 단계라고 보았다.
처음과 마침을 하나의 완결된 의미 체계로 보는 이러한 가치 지향을 『주역』에서는 ‘원시요종(原始要終)’이라는 압축적인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시작을 잘 살펴서 마침을 신중하게 하라는 뜻 이다. 이러한 문화적 지향은 세상사의 ‘본’과 ‘말’을 거두절미한 채 오직 단기적이고 일회적인 효율성만 추구하는 현대 사회에서 다시한번 되새겨볼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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