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순 없잖아. 내가 산 흔적일랑 남겨둬야지.”
1985년 조용필의 명곡 「킬리만자로의 표범」(양인자 작사·김희갑 작곡)의 가사는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이들의 고독과 야망을 대변해 왔다. 1994년 방송대 경영학과에 입학해 2000년에 졸업한 천성실 동문에게도 이 노래는 단순한 유행가를 넘어 어린 날부터 가슴 깊이 품어왔던 오래된 소망의 상징이었다. 현재 인테리어 디자인 회사에 다니는 평범한 직장인인 그가, 50대에 접어들어 마침내 향한 곳은 ‘아프리카의 지붕’이라 불리는 킬리만자로산 최고봉, 우후루 피크(5,895m)였다. 2025년 10월 10일, 해발 5,895m의 정상에서 푸른 하늘과 구름이 빚어낸 경이로운 바다를 바라보며 그는 지난 수십 년간 자신을 괴롭혔던 내면의 그림자와 마주했다. 천 동문을 만나 그의 등반 이야기를 들었다.
최익현 선임기자 bukhak@knou.ac.kr
10대에 시작된 소망이 50대에 마침표를 찍는,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다.
정상에 올라 바라본 풍경은 일생일대의 장관이었다.
푸른 하늘 아래 구름이 마치 거대한 ‘푸른 바다’처럼 일렁였고,
영겁의 시간을 견딘 거대한 빙하는
그곳에 직접 가야만 볼 수 있는 자연의 ‘작품’이었다.
그는 홀로 고독하게 올랐지만,
결국 ‘사람과의 소통과 연대’가 그의 등정을 완성했음을 깨닫고,
여행의 진정한 절정을 맞이했다.
고독과 대화하는 법을 배운 방송대
고등학교 시절, 천 동문은 자신이 자폐 스펙트럼을 가졌다는 사실을 뒤늦게 눈치챘다. 이것은 그의 삶에 큰 장애물이었다. 사람들 앞에 서거나 낯선 환경에 놓이면 심장이 과도하게 뛰고, 다리가 후들거렸으며, 입안에서만 말이 맴도는 말더듬 현상도 심했다. 일상적인 소통마저도 심적 부담과 피로로 다가왔다. 그는 자신의 이 기질을 ‘반드시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며 스스로를 몰아세웠다.
1994년, 직장을 그만두고 삶의 방황을 겪던 시기에 선택한 방송대 경영학과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그는 학과 스터디 모임 등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사람들과의 지속적인 교류와 소통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방송대는 그에게 ‘실패해도 괜찮은 연습의 장(場)’이 되어주었다.
끊임없는 시도와 대화를 통해, 그는 마침내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깨달음을 얻었다. “지금의 내 모습 모두가 천성실이다. 나는 이렇게 태어났고, 이 모든 특성이 나 자신이다.” 그가 그토록 극복하려 했던 자폐 스펙트럼과 말더듬을 ‘함께 살아가야 할 친구’로 껴안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이제 심적 부담이 느껴질 때마다 심호흡하며 스스로에게 긍정의 주문을 건다. “그래, 부담스럽구나. 그래도 천천히 해보자. 잘할 수 있어.”
이러한 적응과 자기 수용의 과정이야말로 그가 킬리만자로 정상에 오르기 위해 준비한 가장 중요한 ‘정신적 장비’였다. 방송대는 방황하던 그에게 새로운 삶의 의미를 찾아줬고, 이 과정에서 다양한 학우들과의 만남이 이어지면서 쌓인 추억은 그를 자극해 결국 킬리만자로 등반이라는 오랜 꿈을 현실화하는 데 일조했다.
오래된 소망, ‘지금 아니면 안 될 이유’
천 동문에게 킬리만자로는 10대 시절부터 품어온 ‘오래된 소망’이었다. 그의 가슴속에 새겨진 아프리카 최고봉의 이미지는 고독한 내면과 야망을 대변하는 상징이었다. 산악인 고미영 대장의 일기에서 얻은 “인생이란 내가 좋아하지도 않은 일에 관련돼 살아가기엔 너무 짧다”라는 울림은 50대에 접어든 그에게 ‘지금이 아니면 안 될 이유’가 됐다.
그는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더 시간이 흐르면 체력 때문에 시도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계속 건강할 수 있을까?” 결국 2025년 4월, 그는 항공권을 예매하며 ‘반드시 출발해야만 하는 환경’을 조성했다. 이 강력한 심리적 구속은 모든 준비를 필연적으로 만들었다.
등반을 위한 준비 과정은 치밀하고 실질적이었고, 긴 시간 동안 추진됐다. 2022년 6월부터 약 넉 달간, 그는 주말마다 관악산(약 11㎞ 코스)을 6시간씩 오르내리며 고된 체력 훈련을 감행했다. 이 반복적인 산행은 킬리만자로 등반에 필요한 지구력과 고도 적응력을 키우는 실질적인 연습이었다. 또한, 킬리만자로 등반의 성공을 좌우하는 고산병 대처 루틴, 즉 ‘천천히 걷기(Pole Pole)’, ‘물 많이 마시기(하루 4~5리터)’, ‘다이아목스(고산병 약) 복용법’ 등 필수 지식을 빠짐없이 수첩에 기록하고 암기했다. ‘나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표범이고 싶다’는 내면의 외침은 킬리만자로 등반을 점점 더 현실로 구체화했다.
고독한 순례길, 5,895m의 대장정
2022년 10월 5일, 탄자니아로 출발한 그는 7일 마랑구 게이트(Marangu Gate, 약 1,980m)에서 등반을 시작했다. 킬리만자로의 ‘마랑구 코스’는 산장에서 숙식을 해결할 수 있어 비교적 접근성이 좋지만, 고도의 험난함은 여전했다.
산행 내내 천 동문을 지탱한 것은 가이드 존(John)의 외침이자 현지 스와힐리어인 ‘뽈레뽈레(Pole Pole)’, 즉 ‘천천히, 천천히’였다. 급격히 고도를 높이는 등반에서 고산병은 가장 큰 적이었다. 해발 5,000m 지점에서는 고통을 호소하며 하산하는 한국인 등반객들을 목격했다. 키보 산장(Kibo Hut, 4,700m)에 도착했을 때는 1초에 한 걸음씩 느릿하게 움직여야 하는 극한의 고도에 적응해야 했다.
그는 고산병의 두통과 메스꺼움을 ‘뽈레뽈레’의 주문과 엄격한 수분 섭취로 이겨냈다. 자신의 판단과 달라도 가이드의 조언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5박 6일의 등반 기간 동안, 포터와 요리사, 그리고 전문 가이드들은 그의 생명줄이자 동반자였다. 이들은 음식을 조리하고 장비를 운반하는 헌신적인 ‘움직이는 식당’이자 팀으로서 등정의 성공을 가능케 한 핵심적인 조력자들이었다.
마침내 10월 10일 새벽 4시. 어둠 속에서 헤드랜턴에 의지한 채 마지막 정상 어택이 시작됐다. 지그재그로 가파르게 이어지는 길을 8시간 이상 걸어 마침내 오후 1시 20분(현지 시간 기준), 그는 길맨스 포인트(Gilman's Point)를 지나 아프리카 최고봉인 우후루 피크(Uhuru Peak, 5,895m)에 발을 디뎠다. 천 동문은 이 순간을 이렇게 말했다.
“새벽 4시, 정상을 향해 출발했다. 정말 천천히 걸어야 했으며, 조금만 서두르면 호흡이 가빠졌다. 사진 촬영을 위해 뒤돌아보고 다시 걸음을 옮기는 것도 고역이었다. 제자리에 서서 배꼽까지 숨 들이마시기를 10~15회 해야 비로소 진정됐다. 경사가 30도를 넘는 가파른 지그재그 길을 밀쳐내고 길맨스 포인트(5,681)에 오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스틱을 높이 쳐들고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고 다시금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여기서부터는 소리를 내며 깊은 숨쉬기를 해야만 했다. 그렇게 2시간 30분을 걸어 2.5㎞ 거리인 우후루 피크에 도착했다.”
10대에 시작된 소망이 50대에 마침표를 찍는,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다. 정상에 올라 바라본 풍경은 일생일대의 장관이었다. 푸른 하늘 아래 구름이 마치 거대한 ‘푸른 바다’처럼 일렁였고, 영겁의 시간을 견딘 거대한 빙하는 그곳에 직접 가야만 볼 수 있는 자연의 ‘작품’이었다. 그는 홀로 고독하게 올랐지만, 결국 ‘사람과의 소통과 연대’가 그의 등정을 완성했음을 깨닫고, 여행의 진정한 절정을 맞이했다.
천성실 동문은 이 성취를 방송대와의 깊은 인연 덕분으로 돌렸다. 킬리만자로 등반 경험이 있는 황의송 관광학과 동문회장은 물심양면으로 그를 지원했다. “그 정도 체력이면 충분히 정상에 올라갈 수 있다”라는 확신과 함께 카고백을 건네줬고, 동문 모임인 ‘술방사람들’은 경제적 지원뿐만 아니라 ‘우후루 피크까지 가야 하는 강력한 동기’를 제공했다.
‘표범’이 된 남자의 흔적, 그리고 다음 여정
킬리만자로 등정을 끝낸 천 동문은 이제 쉴 법도 한데 도대체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미 지난해 파미르고원을 홀로 등정했던 그에게 여행은 계속돼야 하는 그 무엇이었다. 그에게 파미르고원과 킬리만자로 등반 여정이 어떻게 다른지 물었더니 이런 대답을 들려줬다.
“파미르고원은 자동차로 사람이 살아가는 마을과 마을을 찾아가는 방식의 여행이다. 가이드 겸 운전자와 차량만 있으면 여행할 수 있으며, 다른 교통수단 이용도 문제없다. 대부분 3,000m가 넘는 고지대여서 차량 이동이 가능한 6월에서 10월까지만 여행할 수 있다. 킬리만자로 등반은 비가 내리거나 눈이 와도 가능하다. 도보로 시작해 도보로 끝난다. 5~6일간 산장이나 텐트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음식을 조리하기 위한 도구와 재료를 모두 들고 숙식 장소로 이동해야 한다. 포터와 요리사, 전문 가이드를 반드시 대동해야 산행이 가능하다.”
그의 다음 목표는 더욱 광활하다. 당장 내년에는 카라코람 하이웨이를 달려 파키스탄의 낭가파르밧을 볼 수 있는 타리싱을 거쳐 중국과 중앙아시아를 횡단할 계획이며, 2027년에는 히말라야의 3대 고갯길인 ‘3 pass’ 트레킹에 도전한다고 밝혔다. 3패스는 콩마라 패스(5,356m), 촐라 패스(5,357m), 렌조라 패스(5,415m)를 말한다.
“지금이 아니면 새로운 곳에 갈 수 있는 체력이나 의지가 보장될까?”라는 현실적인 자기 질문은 그를 계속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동력이다. 그는 자연이 만들어낸 작품은 직접 그곳에 가야만 볼 수 있으며, 지금 나서지 않으면 어쩌면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고 강조했다.
인터뷰를 마무리할 즈음 그는 자신의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동행’에 있었다고 밝히면서 이렇게 말했다.
“제가 선택한 프로젝트에서 목적 달성이라는 화려한 순간을 맞이했지만, 어쩌면 킬리만자로산 등반의 꽃은 함께한 요리사와 포터, 그들이 아닐까? 등반객이 정상 등반에 성공할 수 있도록 적절한 안내를 해주고, 4,700m의 고지에서도 따뜻한 음식을 제공해 주고, 그곳까지 짐을 가져다주는 사람들. 그들과의 동행 덕분에 가능했다. 방송대 역시 동료 학우들과 함께할 때 더 빛나는 것 같다.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동행을 완주했으면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