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질병과 세계사

황열의 역사는 모기와 바이러스의 생태만으로 설명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은 제국의 교역망, 군사전략, 노동력 관리,

그리고 식민지 공간의 위계질서가 교차하면서 만들어진
‘정치적·과학적 복합체’였다.


콜럼버스의 ‘발견’ 이후 아메리카 대륙은 두창을 위시한 수많은 감염병 세례를 맞고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었지만(<위클리> 173호 ‘콜럼버스의 비등가 교환’ 참조), 16세기 전반 아스테카 제국과 잉카 제국의 멸망 이후에도 질병의 ‘비등가 교환’은 여전히 작동했다. 백여 년이 지난 1648년, 때아닌 불청객이 서아프리카로부터 카리브해 지역인 유카탄(Yucatn)반도와 아바나(Havana)에 들이닥쳐 아바나 인구의 3분의 1을 쓰러뜨린 것이다.


황열(黃熱, yellow fever)이 다른 감염병에 비해 뒤늦게 전파된 이유는, 황열바이러스(Flavivirus속)를 옮기는 이집트숲모기(Aedes aegypti)가 새로운 환경에서 섭씨 22도 이상 유지되는 적소를 발견하고 정착하기까지 시간을 요했기 때문이다. 유럽의 감염병에 더해 아프리카의 열대성 감염병까지 강타한 지역의 원주민은 궤멸적인 피해를 봐야 했다.


황열의 전파와 제국주의

그런데 황열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은 당시 유럽인도 마찬가지였다. 인공적인 물통을 좋아하는 이집트숲모기는 수개월씩 항해하는 선박에서 오래 살아남을 수 있었고, 특히 열대 해역을 통과하는 선원에게 황열은 언제 닥칠지 모르는 공포 그 자체였다. 감염되면 고열 등의 초기 증상을 겪은 후 황달이 나타나는데, 마치 노란 옷을 입은 것처럼 보인다며 ‘옐로 재킷(Yellow Jacket)’이라 부르기도 했다. 출혈과 쇼크로 사망에 이르는 경우도 많았다.


황열이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한 이상, 대륙 내 전파는 시간문제였다. 1691년, 보스턴에서 북미 최초의 황열 유행이 발생했으며, 1793년 당시 미국 수도 필라델피아에서의 유행은 당시 인구 약 4만5천 명 가운데 약 5천 명이 목숨을 잃고 약 1만7천 명이 도주할 만큼 강력했다.


1802~1803년, 아이티 독립군 진압을 위해 생도맹그(Saint-Domingue)에 파견된 나폴레옹의 정예부대 약 3만 명이 황열로 사망한 것을 계기로 프랑스는 루이지애나를 미국에 매각하고 신대륙 지배를 포기했다.


1830년대부터 증기선의 등장으로 항해 기간이 획기적으로 단축됨으로써 기존의 황열 발병지는 다른 지역과 더욱 긴밀하게 연결됐고, 1850년대에 이르러 아메리카 대륙 전역과 유럽으로 확산하기 시작했다.


1850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는 4천160명 이상의 인명 피해가 초래되며 풍토병화가 진행됐고, 1853년 미국 뉴올리언스에서는 9천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1857년에는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5천 명가량이 숨지는 등 유럽 내 유행도 심각해졌다.


과학적 원인 규명과 미국의 패권주의

19세기 후반, 황열의 공포는 의학적 문제를 넘어 지정학적 문제로 비화했다. 특히 미국은 카리브해와 중앙아메리카의 황열 통제를 국가적 생존과 확장 전략의 핵심으로 파악했다. 1898년 발발한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은 푸에르토리코를 손에 넣고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쿠바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는데,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서 수많은 미군이 황열로 쓰러짐으로써 미국의 패권이 위협을 받게 됐다.

 

이런 상황은 미국이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전략적 요충지인 파나마 운하 건설을 재추진하는 과정에서 더욱 극명해졌다. 1880년대에 프랑스가 먼저 운하 건설을 시도한 바 있지만, 기술적 난관보다도 황열과 말라리아로 인한 노동자의 대량 사망으로 실패의 쓴맛을 봐야 했다.


미국은 카리브해의 지배력을 강화하고 태평양 진출을 가속화하기 위해 운하 건설의 필요성이 절실해졌고, 황열을 통제하지 않고서는 파나마 운하 건설은 불가능하다는 학습효과가 깊이 각인됐다.


미국의 절박함은 1900년 미 육군 군의관 월터 리드(Walter Reed, 1851~1902)가 이끄는 황열위원회(Yellow Fever Commission)의 쿠바 파견으로 구체화됐다. 황열위원회는 쿠바의 의사 카를로스 핀라이(Carlos Juan Finlay, 1833~1915)가 이미 1881년에 제기했으나 빛을 보지 못한 ‘모기 매개설’에 주목했다.


핀라이의 통찰과 그가 제공한 모기 알을 바탕으로 위원회는 목숨을 건 인체실험을 감행했고, 마침내 이집트숲모기가 황열의 주범임을 과학적으로 확증했다. 이 발견은 즉각적인 방역 조치로 이어졌다.


황열 통제와 정치적 지배의 정당화

아바나의 위생 책임자였던 미 육군 군의관 윌리엄 고거스(William Crawford Gorgas, 1854~1920)는 군사 작전을 방불케 하는 강력한 모기 통제 프로그램을 가동했다. 모기 서식지인 물웅덩이를 메우고, 가정집의 물항아리에 기름을 붓는 등 철저한 박멸 작전을 수행한 결과, 아바나는 수백 년간 시달려온 황열의 공포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질병 통제의 성공을 정치적 지배를 정당화하는 강력한 기제로 활용했다. 쿠바에 독립을 허용하는 대신, 1901년 쿠바 헌법에 ‘플랫 수정안(Platt Amendment)’을 삽입할 것을 강요한 것이다. 특히 제5항은 쿠바 정부가 미국의 기준에 부합하는 위생 계획을 실행해야 하며, 이를 이행하지 않아 감염병 유행이 재발할 경우 미국이 군사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권리를 명문화했다.


즉, 황열 통제는 단순한 보건 정책을 넘어 미국이 쿠바의 주권을 영구적으로 간섭할 수 있는 합법적 구실이자 안전장치가 된 것이다. 쿠바인에게 이는 ‘질병으로부터의 해방’인 동시에 ‘주권의 상실’을 의미하므로 반발을 불렀다.


의학계에서도 갈등은 존재했다. 쿠바 의사들은 황열 정복의 진정한 공로는 모기 매개설을 최초로 주창한 핀라이에게 있는데도 미국이 월터 리드를 위시한 미군의 업적만을 선전하며 ‘과학적 약탈’을 자행했다고 비판했다. 또 미군 위생 부대가 일반 가정에 예고 없이 들이닥쳐 가재도구를 검사하고 방역을 강제하는 방식은 쿠바 민중에게 근대화의 혜택이 아닌, 일상의 폭력이자 모욕으로 받아들여졌는데, 이는 통감부 시기 대한제국의 상황과 유사하다(<위클리> 209호 ‘1907년 한국의 콜레라 유행과 식민지 방역 체계의 형성’ 참조).


쿠바에서 확립된 미국의 ‘제국의료’ 모델은 곧바로 파나마로 이식됐다. 아바나의 방역을 지휘했던 고거스는 1904년 파나마 운하 건설 현장에 파견돼 동일한 방식의 모기 통제 작전을 수행했다.


황열과 말라리아가 잡히자, 난공불락으로 여겨지던 파나마 운하는 1914년 완공에 이르렀고, 이는 미국이 카리브해를 넘어 태평양으로 뻗어나가는 결정적인 발판이 됐다. 이 과정에서 축적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열대의학(tropical medicine)’은 미국의 전략적 학문 분야로 급부상했다.


이제 열대 지역의 질병에 대한 통제 능력은 서구 문명의 우월성을 증명하고 ‘비위생적인’ 열대 원주민에 대한 지배를 합리화하는 이데올로기적 도구로 자리 잡게 됐다. 결국 황열과의 투쟁은 과학적 진보가 제국주의적 야망과 결합했을 때 어떤 역사적 파장을 일으키는지 보여주는 극적인 사례라 할 것이다.


‘부재하는 질병’과 식민지 조선

다른 한편으로 식민지 조선은 황열의 유행권과 거리가 멀었지만, 19세기 말~20세기 초 ‘열대의학’이 만들어낸 ‘제국적 위생 체계’의 표준은 그대로 이식됐다. 조선총독부는 국제 검역 규범에 따라 황열을 콜레라, 성홍열, 페스트 등과 더불어 검역 대상 전염병으로 지정했는데, 1890년대 이후 황열 감시 체계를 구축하면서 대외 통상에서 위생 신뢰도를 확보하려 했던 일본의 정책이 조선의 항만에도 적용된 것이다.


이처럼 조선의 항만 검역은 제국 위생 외교의 최전선이자 ‘부재 속 영향(influence in absentia)’의 결정체였다. ‘열대의학’은 단순히 ‘무더운 지방의 의학’이 아니라 제국주의적 공간에서 태어난 지식이다.


황열의 역사는 모기와 바이러스의 생태만으로 설명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은 제국의 교역망, 군사전략, 노동력 관리, 그리고 식민지 공간의 위계질서가 교차하면서 만들어진 ‘정치적·과학적 복합체’였다. 감염병은 지역의 문제로 파악되기 쉽지만, 황열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위계화·인종화·정치화를 거치며 병원체의 지리학을 가로지르는 존재다.


요컨대 식민지 조선에 질병은 없었지만, 질병에 대한 ‘규율’은 존재했다. 이는 ‘제국의료’가 현지인의 필요가 아닌 ‘제국의 필요’에 따라 작동했음을 보여준다. 직접적인 통제와 충돌이 발생한 미국-쿠바의 사례와 간접적인 지식의 이식과 규율화가 이뤄진 식민지 조선의 사례는 서로 대비를 이루면서도 ‘제국적 위생 체계’가 전 지구적으로 표준화되는 과정에서는 보완적인 관계를 형성했다. 미국이 위생을 앞세워 물리적 점령의 정당성을 확보했다면, 일본은 그 위생 표준을 도입함으로써 스스로를 ‘문명국’으로 격상시키고 식민 지배를 합리화했다.


실재하지 않는 위험조차 관리의 대상으로 삼은 식민지 조선의 사례는, ‘제국의료’가 의학적 필요를 넘어선 치밀한 정치적 기획이었음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결국 황열의 역사는 질병을 제압한 의학적 성과인 동시에, 근대 의학이 어떻게 권력의 가장 효율적인 통치 언어로 진화했는지를 보여주는 서사다. ‘부재하는 질병’이 남긴 규율의 흔적은, 특정 지역에 대한 차별과 배제가 ‘보건 안보’라는 이름으로 용인되는 오늘날의 현실 속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서울대 의과대학 인문의학교실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서울의료사』등을 쓰고,『정의의 아이디어』『세계사를 바꾼 전염병 13가지』등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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