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서구지성사를 만나다

계몽 시대는 전쟁으로 시작해서 전쟁으로 끝났다. 18세기를 개시한 것은 태양왕 루이 14세가 일으킨 일련의 전쟁이었고, 18세기를 마감한 것은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이었다. 계몽 시대는 폭력과 무질서 그리고 전쟁에 영원히 마침표를 찍고자 열망했으나, 그 끝은 전례 없는 혼란과 유혈이었다. 개혁과 진보 그리고 개선으로 상징되는 시대가 계속된 전쟁으로 이토록 상처를 입은 까닭은 도대체 무엇인가?

생피에르 신부가 예견했듯,
한 세기에 걸친 계몽 사상가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유럽 국가는 여전히 서로를 ‘야만족의 우두머리’처럼

대하고 있었다. 이에 임마누엘 칸트는

 『세계시민적 관점에서 본 보편사의 이념』(1784)에서

위트레흐트 계몽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해결책을 내놓았다.

 

 

국가 간의 관계 관리하는 최적의 방법
계몽 시대 유럽에서 국가 간의 관계를 관리하기 위한 최적의 방법으로 여겨진 것은 세력균형의 확립과 유지였다. 유럽 각국의 정치인과 지식인이 세력균형의 확보를 대외 정책의 최우선 순위에 두기 시작한 시점은 17세기 중반이라고 할 수 있다. 30년 전쟁(1618~1648)을 승리로 마무리한 프랑스는 동쪽으로는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의 성장을 저지했으며, 서쪽으로는 피레네 조약을 통해 에스파냐 합스부르크의 팽창을 막고 향후 발전의 발판을 확고히 다졌다. 재상인 추기경 쥘 마자랭의 사망 이후 실권을 장악한 태양왕 루이 14세는 태양을 중심으로 태양계의 모든 행성이 도는 것처럼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의 모든 국가가 움직여야 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루이 14세의 프랑스를 경험하면서 유럽의 정치인과 사상가는 평화로운 질서의 지속 여부는 세력균형의 보존에 달려 있다고 믿게 된다.
대표적으로 독일의 법학자 사무엘 푸펜도르프는『주요 유럽 왕국과 국가의 역사에 대한 개설』(1682)에서 수많은 희생 끝에 어렵게 세워진 베스트팔렌 체제가 루이 14세의 프랑스에 의해 무너질 가능성을 우려했다. 루이 14세가 일으킨 첫 두 전쟁인 상속 전쟁(1667~1668)과 네덜란드 전쟁(1672~1678)을 배경으로 집필된 이 책에서 푸펜도르프는 유럽 각 국가가 처한 상황에 비춰 볼 때 프랑스의 위협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경고했다. 푸펜도르프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이들 국가는 눈앞의 이해타산을 먼저 따졌다. 단적으로, 영국의 찰스 2세는 1668년 네덜란드 공화국 그리고 스웨덴과 함께 삼국 동맹을 결성해 프랑스를 제어했으나, 불과 2년 뒤 네덜란드 공화국의 무역 독점을 깨뜨릴 심산으로 루이 14세와 밀약을 맺었다.     
이후 세력균형에 대한 유럽의 논의에서 핵심적인 주제는 패권을 추구하는 국가를 견제하기 위한 적절한 시점을 어떻게 파악할 것이냐에 있었다. 논쟁이 가장 격렬하게 벌어진 곳은 의회가 큰 힘을 발휘하던 영국이었다. 지리적으로도 영국은 균형자의 역할을 하기에 최상의 국가였다. 유럽의 세력균형을 복구할 중심축으로서 영국의 능력은 명예혁명을 통해 확정됐다.
윌리엄 3세는 의회의 권한 증대 요청을 수용하는 조건으로 영국이 네덜란드 공화국 등과 힘을 합쳐 루이 14세가 무너뜨린 세력균형을 되살리는 데 앞장서줄 것을 요구했다. 여론도 많이 늦었지만 영국이 이제라도 유럽의 안정과 번영의 기반인 세력균형을 복원하는 데 전력을 쏟아야 할 것이라 봤다. 역으로, 프랑스에 편승해 에스파냐와 네덜란드 공화국을 공격했던 올리버 크롬웰과 찰스 2세는 프랑스의 성장을 도운 주범으로 비판을 받았다.
영국이 천문학적인 공적 자금을 투입하며 9년 동안 싸울 수밖에 없었던 것은 찰스 2세와 크롬웰이 프랑스의 국력과 세력균형의 구도를 잘못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세금은 물론이거니와 9년 전쟁(1689~1697) 와중에 전쟁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다급하게 설립한 잉글랜드 은행의 부채도 가파르게 올라갔다. 설상가상, 국왕의 지휘를 받는 군대도 규모만 커진 것이 아니라 평시에도 해산하지 않고 계속 운영돼 영국이 어렵게 수립한 의회 주권 체제를 다시금 위태롭게 만들었다.
강경파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1713년 에스파냐 왕위 계승을 둘러싼 프랑스와의 전쟁을 종식시킨 볼링브로크 자작도 이와 유사한 주장을 개진했다. 볼링브로크는 반패권 연합을 형성할 적기를 아는 것만큼 반패권 연합을 해체할 적기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크롬웰과 찰스 2세가 에스파냐와 네덜란드 공화국의 국력을 과대평가해 프랑스 측에 섰던 것처럼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에서 영국도 프랑스의 국력을 과대평가하고 있다는 문제 제기였다. 게다가 영국의 도움을 받아 에스파냐 왕위에 오르고자 했던 카를 대공이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직위까지 물려받아야 하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오스트리아 제국이 보편 군주정이 되지 않도록 영국의 노선을 속히 수정할 필요가 있었다. 세력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변화를 미리 감지하고 신속하게 대처하는 능력이 필요했다.
“평화를 원한다면 국가 연합 만들어야”
지정학적 이유 등으로 영국이 세력균형을 지키기 위한 비용 문제에 집중하고 있을 무렵, 프랑스에서는 세력균형을 통한 평화 수립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이 이뤄지고 있었다. 먼저, 생피에르 신부는 프랑스 정부 관계자로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의 종결 과정을 지켜보며『유럽의 영구 평화를 위한 제언』(1713)을 써내려갔다. 생피에르 신부는 세력균형에 입각한 질서는 본질적으로 불안정할 수밖에 없고 진정으로 평화를 원한다면 국가 연합을 만들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루이 14세의 손자 부르고뉴 공의 교육을 책임지기도 했던 프랑수아 페늘롱은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을 통해 세력균형이 대체로 되돌아왔으니 이를 지속시킬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페늘롱은 이미 9년 전쟁 기간에 『텔레마코스의 모험』(1699)이라는 당대 널리 읽혔던 소설에서 세력균형의 원칙에 의거한 평화 질서의 청사진을 제시한 바 있었다.
부르고뉴 공은 요절했으나 에스파냐 왕위 계승 전쟁을 끝낸 위트레흐트 조약 체결 이후 유럽은 안정을 되찾았다. 역설적이게도 오랜 전쟁과 영국·프랑스의 왕위 교체 덕분이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1740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문제로 다시 격돌하기 전까지 긴장 속에서 협력을 이어갔다. 이 시기, 유럽을 각자의 생존을 위해 서로 견제하면서 또한 각자의 이익을 위해 서로 교역하는 여러 국가로 구성된 하나의 유기적인 사회로 이해하고 묘사하는 지적인 흐름이 나타났다. 18세기 유럽 지성사가 J. G. A. 포칵은 이를 ‘위트레흐트 계몽’이라 명명했다. 스코틀랜드의 사상가 데이비드 흄은 이러한 경향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한 명이었다.
흄은「예술과 과학의 발전과 진보」(1742)라는 시평에서 “상업을 통해, 또 정책을 통해 서로 연결돼 있는 다수의 주권 국가가 서로 이웃하는 것만큼 예의와 지식의 발전을 촉진하는 것은 없다”라고 단언했다. 페늘롱과 마찬가지로 흄은 이의 원인을 루이 14세 이후 프랑스의 개혁에서 찾았다. 프랑스가 ‘문명화된 군주정’으로 거듭나면서 유럽이 변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몽테스키외도 흄과 의견을 같이 했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날 무렵 출판된『법의 정신』(1748)에서 몽테스키외는 프랑스가 국왕의 변덕이 아니라 법에 의거해 통치되는 ‘절제된 군주정’이 됐다고 기뻐했다. 몽테스키외는 상업이 평화로운 분위기를 조성하는 효과를 발생시킨다는 견해에도 동의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을 촉발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가 또다시 오스트리아를 침공하며 유럽 대륙에서 7년 전쟁(1756~1763)이 개시될 무렵, 유럽의 대다수 지식인과 정치인은 위트레흐트 조약에 의해 구축된 평화로운 세력균형 체제가 붕괴했다고 낙심했다.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제국이 독일에서의 패권을 두고 싸우고 있었다면, 영국과 프랑스는 북아메리카와 서인도 제도 그리고 인도에서 싸우고 있었다. 1752년 흄은 “서로를 질투하며 어떻게든 상대방을 굴복시키고자 모방하는 고대 그리스의 정신에 더 물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라고 적으며 이전의 입장을 버렸다. 7년 뒤 흄은「무역의 질투에 대하여」란 제목의 또 다른 시평에서 상업이 평화를 촉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통적인 국가 간 쟁투를 악화시키고 또 확대하고 있다고 탄식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장-자크 루소는『사회계약론』(1762)에서 프랑스나 영국이 아니라 러시아가 유럽의 몰락의 대미를 장식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계몽 사상가들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18세기 후반, 미국 독립 전쟁(1775~1783)과 프랑스 혁명(1789~1799)이 닥쳐올 때까지, 유럽이 제국의 각축장이 됐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이는 없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서로에 대한 시기와 분노 그리고 이로 인한 갈등은 어느 한쪽이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기 전에는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동유럽에서는 영토 제국 러시아가 기존의 질서를 허물고 있었다.
생피에르 신부가 예견했듯, 한 세기에 걸친 계몽 사상가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유럽 국가는 여전히 서로를 ‘야만족의 우두머리’처럼 대하고 있었다. 이에 임마누엘 칸트는『세계시민적 관점에서 본 보편사의 이념』(1784)에서 위트레흐트 계몽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해결책을 내놓았다. 항구적인 평화의 수립이 가능하다는 칸트의 논변 기저에 놓인 ‘반사회적 사회성’ 개념, 즉 유럽 각국이 서로 싸우고 죽이면서 서로의 존재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는 토머스 홉스적인 발상은 위안보다는 절망에 훨씬 더 가까운 것이었다. 보편 군주정의 등장을 저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세력균형은 평화의 체제가 아니라 전쟁의 체제라는 비극적인 사실을 다시 한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연세대를 졸업하고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외교사를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다.『역사학 선언』『전쟁과 자유주의 양심』『유럽사 속의 전쟁』등을 번역했으며,『정치학 방법론』등의 편저를 냈다. 국제관계사, 국제정치경제사상 등을 가르치고 있다.


2좋아요 URL복사 공유
현재 댓글 0
댓글쓰기
0/300

사람과 삶

영상으로 보는 KNOU

  • banner01
  • banner01
  • banner01
  • banner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