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서구지성사를 만나다

18세기 유럽의 계몽사상가들과 혁명가들은

상업사회 문명의 안정을 위해 민주주의를 경계하고

대의정부를 이상적인 정치체제로 설계했다.
다시 말해 그것은 군주정과 공화정 모두에서
직접 민주정의 위험을 차단하고

사회의 안정과 질서, 국가의 장기적 생존을 보장하기 위한

핵심적 제도적 장치로서 사상적 주류의 자리를 점했다.

18세기 유럽은 ‘상업사회’의 등장으로 큰 변화를 겪었다. 상업사회란 모든 사람이 각자 노동을 해야만 사회 전체가 생존할 수 있으며 사람들이 서로를 상인처럼 대하는 사회적 구조를 가리킨다. 이와 같은 변화에 따라 개개인의 이익과 손해가 사회의 새로운 원리로서 등장하는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상업의 발전은 국가 간 평화와 공존의 가능성을 높이는 순기능도 있었지만 동시에 사치와 같은 부작용도 낳았다. 사치는 문명의 발전을 이끄는 힘이기도 했지만 그것이 과도해지면 사회를 위태롭게 만들 수 있다는 양면성을 지녔다.

 

이런 배경에서 계몽사상가들은 상업사회의 존속을 위협하는 가장 큰 요소로 민주주의를 꼽았다. 그들은 민주정의 토대가 되는 무지한 국민, 국민주권 이론, 시민의 직접통치가 결합하면 결국 군사정권이 들어서거나 자유가 파괴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계몽사상의 역사관과 반(反)민주주의
당시 계몽사상가들과 정치 저술가들은 민주정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드롤므는 고대 민회에서 시민들의 토론과 투표가 자유를 낳았다는 생각을 환상으로 치부했다. 그는 민주정에서는 웅변에 능한 선동가들이 대중을 호도해 시민들의 선택이 쉽게 왜곡된다고 보았다. 볼테르는 민주정을 ‘악당들의 통치’라고 불렀고, 네케르는 민주정이 정념이 지배하는 다수의 폭정으로 이어진다고 주장했다. 칸트 역시 모든 민주정이 필연적으로 전제정으로 변한다고 평가했다. 즉 민주정은 ‘1명이 아니라 1,000명이 폭정을 휘두르는 체제’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지식인들은 고대 그리스의 민주국가들을 노예노동에 기반한 야만적이고 호전적인 전쟁국가로 보았고, 고대 로마의 정치체제 역시 귀족들이 민중을 억압하는 과두정으로 간주했다. 이런 인식은 민주주의가 근대 유럽인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낡은 체제라는 생각을 확산시켰다. 고대 정치사는 근대인들이 피해야 할 반면교사로 여겨졌고, 다수 국민의 권력과 제국적 팽창이 결합하면 군사정권이 들어선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으로 받아들여졌다. 실제로 로마의 민중이 진정한 위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같은 군사적 영웅을 추종해 공화정이 무너진 사례가 자주 인용됐다. 프랑스의 혁명가들도 자신들이 세운 공화정이 군사정권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며 두려워했다. 1794년 여름에 로베스피에르가 처형되고 혁명정부가 무너진 후에도 이런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다.

 

전제정과 민주정의 대안
이처럼 민주주의와 군사정권의 위협이 현실적인 문제로 대두되던 근대 상업사회에서, 유럽 문명을 안정적으로 지키고 발전시키기 위한 제도적 대안으로 대의정부가 본격적으로 논의됐다. 대의정부는 단순히 정치제도의 한 형태를 넘어 근대 상업국가들이 과거의 역사적 악순환인 무질서, 전제정, 군사적 혼란에서 벗어나 오랜 기간 생존하고 번영할 수 있게 만들 장치로 여겨졌다. 일부 사상가들은 그것을 사회 전체의 질서와 번영은 물론이고 시민 개개인의 자유와 재산권을 보호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간주했다.

 

많은 18세기 계몽사상가들은 민주정을 ‘전제정을 제외하면 최악의 정부 형태’로 보았다. 그들은 민주정을 무지하고 감정적인 다수의 지배로 간주했고, 그러한 체제는 사회 전체를 혼란과 파괴, 그리고 궁극적으로 군사정권의 등장으로까지 몰아갈 위험이 크다고 생각했다. 대의정부는 바로 이런 민중정부의 출현과 정치적 불안정을 예방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서 옹호됐다. 대의정부의 핵심 원리는 ‘우수한 자들’을 선출해 그들이 국가를 통치하게 하는 것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투표는 국민을 정치에 적극적으로 참여시키기보다는 오히려 심층적 정치참여를 제한하고, 사회적 질서를 유지하는 수단으로 활용됐다. 즉, 대의제는 국민의 직접적 정치 참여를 제한하면서도, 국민이 일정 부분 정치적 의사결정에 관여할 수 있도록 하는 통로로 작동했다.

 

1789년 프랑스혁명과 대의제 논의
이러한 대의정부의 논리와 원칙은 1789년의 혁명가들에게도 깊이 내면화돼있었다. 혁명가들 역시 투표와 대의제, 그리고 복잡한 제도적 장치를 통해 국가의 질서와 번영을 보장할 수 있다고 믿었다. 실제로 1791년 헌법의 군주정과 1793년 헌법의 공화정 모두 대의정부의 형태를 띠는 방식으로 설계됐으며, 각 체제의 지지자들은 자신들의 이념과 현실에 맞는 대의제 모델을 구체적으로 고안했다.

 

군주정 옹호자들은 1789년 혁명 초기부터 상당수의 지지를 받았다. 이들은 절대군주정과 민주정 모두를 거부하고, 권력 분립과 상호 견제를 위한 복잡한 정치구조를 설계하는 데 집중했다. 군주파는 영국의 입헌군주정을 이상적인 모델로 삼아서 몽테스키외와 드롤므의 이론을 결합했다. 몽테스키외는 강력한 귀족 집단이 지도와 견제를 담당하는 군주정을 옹호했고, 드롤므는 의회가 입법권을, 군주가 행정권을 쥐는 강력한 군주정을 주장했다. 이 사상들을 바탕으로 군주파 혁명가들은 상원과 하원으로 구성된 양원제 의회, 예산권이 없는 왕, 그리고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투표권자로 이뤄진 대의정부 체제를 구상했다. 이 체제는 왕의 권한을 제한하면서도 사회의 안정과 질서를 유지하는 데 중점을 뒀으며, 국민의 직접적인 정치 참여는 제한적으로만 허용됐다. 또한 군주정의 대의정부는 사회적 엘리트의 역할을 강조해 귀족과 부유한 시민 계층이 정치의 중심에 서도록 설계됐다.

 

공화정 역시 대의정부의 한 형태로서 적극적으로 논의됐다. 공화정 지지자들은 인구가 많고 영토가 넓은 프랑스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대의제의 원리를 국가 운영의 핵심으로 삼았다. 그들은 단순히 투표만이 아니라 국가의 모든 제도와 장치가 대의제 원리에 따라 작동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의제라는 필터를 통해 다양한 인구 집단의 이해관계와 성격을 조화롭게 통합해야만 국가가 불안정해지지 않고, 오히려 역동적인 평균값을 내며 강력해질 수 있다고 믿었다. 공화파는 국민이 직접 통치와 입법에 참여하는 민주주의를 철저히 거부했으며 엄격하게 선별된 엘리트가 통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국민을 ‘근면성실하고 부유한 국민’과 ‘게으르고 나태하며 복지에만 의존하는 가난한 국민’으로 구분하고, 전자는 사회의 복리에 기여하는 주권자로서 인정했지만 후자는 사회의 기생충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들은 가난한 국민에게 정치적 권리나 사회경제적 배려를 제공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했다.

 

공화정 지지자들은 국가의 안정과 발전을 위해서라도 무분별한 평등이나 보편적 참정권을 부여하기보다는 사회에 기여하는 능동적 시민만이 정치적 권리를 갖게 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공화정의 대의정부 역시 정치적 권리의 제한과 사회적 엘리트의 우위를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프랑스혁명의 민주파는 이런 관점의 거대한 물결에 맞서서 등장했던 것이다.

 

대의제와 근대 유럽의 정치질서
18세기 유럽의 계몽사상가들과 혁명가들은 상업사회 문명의 안정을 위해 민주주의를 경계하고 대의정부를 이상적인 정치체제로 설계했다. 다시 말해 그것은 군주정과 공화정 모두에서 직접 민주정의 위험을 차단하고 사회의 안정과 질서, 국가의 장기적 생존을 보장하기 위한 핵심적 제도적 장치로서 사상적 주류의 자리를 점했다. 이는 근대 유럽 정치질서의 기본 구조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프랑스혁명 이후에도 계속 이어져 오랫동안 유럽 정치사상과 제도 설계의 중심이 됐다.

영국 앤드류대학교(University of St Andrews) 역사학부에서 서양근대사를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교차 1호: 지식의 사회, 사회의 지식』, 『세계사 속의 갈등과 통합』 등의 책을 함께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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