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는 위생이 무너진 곳이 곧 ‘전장(戰場)’임을 역설해 왔다.
우리가 향유하는 청결함과 안온함은 견고한 성벽이라기보다,
지난 세기 수만 명의 희생과 1천540만 명에게 뿌려진
살충제, 그리고 폐허 위에 다시 쌓아 올린 공중보건 시스템이라는
얇은 방벽에 가깝다. 그러나 이 위태로운 방벽을
지탱해야 할 기둥은 오늘날 더욱 흔들리고 있다.
1812년 6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on Bonaparte, 1769~1821)가 이끄는 60만 대군이 네만(Neman)강을 건너 러시아로 진격했을 때, 병사들이 품고 있던 것은 정복의 자신감만이 아니었다. 그들이 입은 군복 솔기의 눅눅하고 어두운 틈새에는 3밀리미터 크기의 작은 침입자, ‘몸니’가 숨죽이고 있었다. 모스크바로 향하는 행군 길에서 프랑스군은 전투 한번 제대로 치르기도 전에 쓰러져 갔다. 고열과 오한, 그리고 온몸을 뒤덮는 붉은 발진. 그들을 무너뜨린 진정한 적은 쿠투조프(Mikhail Kutuzov, 1745~1813) 장군의 러시아군도, 악명 높은 동장군도 아닌, ‘제3의 장군’ 발진티푸스(epidemic typhus)였다.
‘국제 안보’ 문제로 격상된 발진티푸스
발진티푸스 리케차(Rickettsia prowazekii)라는 병원체를 품은 몸니는 병사가 가려움을 참지 못해 피부를 긁을 때, 그 상처 틈으로 균이 섞인 배설물을 밀어 넣는다. 나폴레옹이 모스크바에서 퇴각할 즈음, 그의 군대는 이미 전쟁 수행 능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일찍이 세균학자 한스 진서(Hans Zinsser, 1878~1940)가 지적했듯이, “발진티푸스는 그 형제자매들―페스트, 콜레라, 장티푸스, 이질―과 함께 카이사르, 한니발, 나폴레옹, 그리고 역사상의 지휘관들보다 더 많은 전쟁의 승패를 결정지었다.” ‘전쟁 역병’의 숙주는 생물학적으로는 인간이지만, 사회학적으로는 전쟁 그 자체였던 셈이다.
19세기 나폴레옹의 군대를 궤멸시킨 발진티푸스는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을 거치며 국경을 넘나드는 ‘국제 안보’의 문제로 격상된다. 서부 전선의 참호 속 병사들이 ‘참호열(trench fever)’과 싸우는 동안, 동부 전선인 러시아와 폴란드 국경 지대에서는 발진티푸스가 맹위를 떨쳤다. 러시아 혁명과 내전, 대기근이 겹치면서 동유럽은 거대한 ‘배양 접시’가 됐다. 1917년에서 1925년 사이, 동유럽과 러시아에서 약 2천500만 명이 감염돼 약 300만 명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산된다. 적십자사연맹이 동유럽의 불을 끄려고 나섰으나 대규모 유행에 대응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발진티푸스는 더 이상 세르비아와 러시아만의 풍토병이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존재감을 드러낸 것이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이었다. 1920년 1월에 창설된 국제연맹은 질병의 예방과 박멸에 힘쓸 것을 규약에 명시하고 있었다. 1921년 2월에 발족한 전염병위원회(Epidemic Commission)를 발진티푸스가 유행하는 폴란드에 파견해 성과를 거뒀고, 당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폴란드의 세균학자 루드비크 라이흐만(Ludwik Rajchman, 1881~1965)은 훗날 국제연맹 보건기구(League of Nations Health Organization, LNHO)의 기틀을 닦게 된다.
보건기구 잠정 보건위원회에서는 전염병위원회의 활동을 러시아로 확대할 것인지를 첫 의제로 논의했다. 러시아는 발진티푸스 진원지였으나 국제연맹 회원국이 아니었고, 폴란드 등 인접 국가와 극심한 긴장 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1921년 9월, 라이흐만은 21세기 ‘미래인’의 상식을 비웃기라도 하듯 러시아에 전염병위원회 파견을 감행했다. 현지 조사 결과, 러시아의 유행은 통제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심각했다. 같은 해 11월 파견된 위원회는 노르웨이의 탐험가이자 정치가 프리드쇼프 난센(Fridtjof Nansen, 1861~1930)의 협력을 얻어가며 상황을 개선해 나갔다. 100여 년 전 유럽은 전염병 앞에서 적군도 아군도 없으며, 오직 ‘씻을 수 있는 자’와 ‘씻지 못하는 자’의 구분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몸소 깨닫고 실천한 것이다.
1951년 한국전쟁 중 환자 12배 급증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제국 일본의 붕괴와 한반도의 해방은 거대한 인구 이동을 초래했다. 만주와 일본 등지에서 돌아오는 수백만 명의 귀환 동포와 남북으로 갈라진 한반도를 오가는 피란민들의 행렬은 몸니가 무임승차하기에 최적의 조건이었다. 패전 직후인 1946년 일본의 발진티푸스 환자는 3만2천300명을 넘어섰고, 같은 시기 남한에서도 4천754명의 환자가 집계됐다. 해방 공간의 혼란과 무너진 위생 행정이 한일 양국에 혹독한 대가를 요구한 것이었다. 그러나 연합군 최고사령부(GHQ)의 통제를 받은 일본에서는 1946년을 정점으로 환자 수가 급감했지만, 한국의 비극은 막도 채 오르지 않은 상태였다. 전쟁이라는 ‘진짜 숙주’가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잠잠해지던 발진티푸스의 불씨에 기름을 부었다. 1951년 한국의 발진티푸스 환자 수는 공식 집계로만 3만2천211명을 기록했다. 이는 전년 대비 12배가 넘는 수치로, 실제 피해 규모는 훨씬 컸을 것이다. 그 배경에는 ‘국민방위군 사건’이라는 참담한 역사가 자리한다. 1950년 겨울,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선이 밀리는 가운데 한국 정부는 제2국민병에 해당하는 장정들을 소집해 남쪽으로 이동시켰다. 그러나 예산 부족에 더해 국민방위군 간부의 국고금 및 물자 착복으로 인해 수십만 명의 장정이 혹한 속에 방치되는 상황이 연출됐고, 약 10만 명이 전투에 나서지도 못한 채 추위, 굶주림, 질병 등으로 사망했다. 비위생적이고 밀집한 환경에 노출된 장정은 굶주린 몸니에게 최고의 만찬이었다. 140년 전 나폴레옹의 군대가 겪었던 비극이 차라리 당당한 패배로 보일 만큼, 한국의 겨울은 비참했다.
‘화학적 방역’, DDT 살포의 역설
보건 당국은 발진티푸스를 잡기 위해 대규모 ‘화학적 방역’을 실시했다. 1951년 한 해에만 1천540만 명이 넘는 인원에게 강력한 살충제 DDT(dichlorodiphenyltrichloroethane) 분말이 살포됐다. 흰 가루를 뒤집어쓴 채 줄을 서 있는 피란민들의 모습은 한국전쟁을 상징하는 장면 중 하나가 됐다. 기차에 타거나 배급을 받거나 검문소를 통과하려면 누구든지 머리와 옷 속에 DDT 세례를 받아야 했다. 이와 더불어 1950년부터 1953년까지 약 2천835만 건의 발진티푸스 백신 접종이 이뤄졌다. 이런 전시(戰時) 방역은 인권을 무시한 강제적인 측면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성공했다. 1951년 3만 명을 넘었던 환자 수는 이듬해 900명 대로 급감했고, 1950년대 후반에는 사실상 소멸 단계에 접어들었다. ‘전쟁 역병’을 과학기술로 제압한 드문 사례였다.
그러나 이 ‘화학적 승리’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전쟁이 인간의 몸을 다루는 방식에 대한 서늘한 풍경과 마주하게 된다. 당시 DDT 살포는 단순한 의료 행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피란민이 ‘안전한 구역’으로 진입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일종의 통과 의례이자 인간을 ‘청결한 국민’으로 재편성하는 거대한 생체 권력의 작동 방식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얀 가루를 뒤집어쓴 민중의 모습은, 이념의 전쟁터가 결국 개인의 육체라는 가장 미시적인 공간까지 침투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비록 DDT가 수많은 생명을 구한 ‘구원의 가루’였을지언정 그 살포 과정은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이 인간의 존엄을 유보하고 육체를 방역의 대상으로 환원시킨다는 사실을 웅변한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발진티푸스는 잊힌 질병이다. 우리는 매일 온수로 샤워하고 세탁된 옷을 입으며, 영양 과잉을 걱정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생물학자이자 환경운동가인 레이철 카슨(Rachel Louise Carson, 1907~1964)이 『침묵의 봄』(1962)을 통해 DDT의 생태적 위험성을 경고한 이후, ‘구원의 가루’는 우리 곁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이’(주로 머릿니)는 가끔 아이들에게서 발견되지만, 죽음의 공포가 거세된 가벼운 해프닝 정도로 취급될 뿐이다. 그러나 우리의 시야 밖, 문명의 사각지대에서 발진티푸스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아프리카 등지의 내전 지역이나 난민 캠프처럼 위생 인프라와 행정력이 파괴된 곳에서는 리케차균이 어김없이 창궐한다. 1812년 러시아의 동토(凍土)에서 나폴레옹의 60만 대군을 무너뜨렸던 그 곤충은, 21세기의 화려한 문명 뒤편, 우리가 외면하고 싶은 가장 어둡고 축축한 곳에서 여전히 기회를 엿보고 있다.
사회적 징후를 드러낸 ‘전쟁 역병’
1951년 겨울, 한반도를 휩쓸었던 ‘전쟁 역병’은 전염병이 단순한 생물학적 현상이 아니라, 사회의 가장 약한 고리가 끊어질 때 비로소 드러나는 ‘사회적 징후’임을 보여준다.
역사는 위생이 무너진 곳이 곧 ‘전장(戰場)’임을 역설해 왔다. 우리가 향유하는 청결함과 안온함은 견고한 성벽이라기보다, 지난 세기 수만 명의 희생과 1천540만 명에게 뿌려진 살충제, 그리고 폐허 위에 다시 쌓아 올린 공중보건 시스템이라는 얇은 방벽에 가깝다. 그러나 이 위태로운 방벽을 지탱해야 할 기둥은 오늘날 더욱 흔들리고 있다.
국가 간 정치적 대립이 심화하고 보건 분야의 국제 협력이 요원해진 작금의 현실은, 100년 전 정치적 장벽을 뛰어넘은 국제연맹의 결단과 뼈아픈 대조를 이룬다. 빈곤과 차별이라는 지구촌의 해어진 ‘솔기’를 기우는 것은 고립이 아닌 연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등을 돌릴 때, 숨죽이고 있던 몸니는 언제든 다시 깨어나 그 틈새를 파고들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