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호시노 도모유키의 인간탐색

시를 읽는 것은 스테레오그램 화면을 보는 것과 비슷합니다. 단지 모양의 나열로밖에 보이지 않는 화면에서 다른 초점을 발견하면 입체적인 형태가 보이는, 일명 매직아이 말입니다.
시도 익숙하지 않을 때는 무슨 말인지 몰라서 금방 던져버립니다. 하지만 20회차 칼럼에도 쓴 것처럼, 시에 눈을 뜨고 매일 시를 읽게 된다면, 그때까지 의미가 되지 않았던 단어들의 나열로부터, 다른 형태가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산문을 읽는 것과 같은 초점으로 시를 읽으려고 했기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던 것이 많은 시를 섭취하면서 시를 위한 초점을 습득하게 됐습니다.
시의 좋은 점은 짧은 틈새 시간에도 읽을 수 있다는 점입니다. 소설을 읽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안정된 시간이 필요하지요. 시는 틈새 시간에도, 장시간에도, 마음 가는 대로 마음 내키는 페이지를 펼쳐 자유롭게 읽을 수 있습니다.

‘내가 만난 시를, 마음 내키는 대로 읽는다.’

요컨대 도달해야 할 목적지는 없고,

그저 기분에 맡긴 채 수다를 떨며,

우연히 닿은 골목에 들어서는 듯한 읽기 방식.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하지만, 친구는 늘어납니다.
시는 친구입니다.

 

 

교양주의적 가치관과 독서
이전의 저는 그런 단편적인 독서를 하지 못했습니다. 읽기 시작하면 완전히 마무리될 때까지 읽지 않으면 성에 차지 않았거든요. 어떤 작가에게 흥미를 가지게 되면, 그 사람이 쓴 작품과 에세이를 전부 읽지 않으면 그 작가를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데뷔 무렵,「연대순의 저주」라는 에세이를 쓴 일이 있는데, 전 작품을 읽는다 해도 쓰여진 연대순으로 읽어야 독해가 깊어진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저에게 독서는 항상, 무겁고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었습니다.
그것은 일상생활에 비하자면, 토마토 하나를 사더라도 현재의 토마토 작황을 조사하고, 근처의 슈퍼마켓 세 곳을 전부 돌아본 후에, 선도와 가격을 종합적으로 체크해 어느 토마토를 살지 정해야 한다는 식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이것은 일종의 ‘교양주의의 저주’였구나 싶습니다. 불완전한 상태라도 소설의 전문가가 돼야 하니, 소설의 역사나 개념에 대한 지식을 충분히 익히고, 중요한 작품은 한 번 읽어야 한다고 그렇게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시는 지금껏 외면해 왔기 때문에 시에 관한 한 저는 초보자 수준에도 못 미칩니다. 거의 읽지 않았고, 역사나 상식이나 알아둬야 할 유명한 시인이나, 아무것도 모릅니다.
하지만 뒤늦게, 환갑의 나이에 시의 역사부터 공부하기 시작한다면, 현대에 이르기도 전에 수명이 다해버리겠지요.
그래서 저는 교양주의적인 가치관을 버리기로 했습니다. 시를 공부하거나 하지는 않겠다고 결정했습니다.
어떻게 하느냐 하면, 인연이 닿은 시를 그저 읽어가는 것입니다. 20회차 칼럼에서 쓴 것처럼, 처음에는 몇 사람의 시인과 만나면서 시작된 것이기에, 그 사람들의 시를 읽었습니다. 워크숍이나 낭독회에 가서 개인적으로 아는 시인들의 시를 읽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요즘 재미있다고 말하는 시를 읽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만든 동인지를 입수해 읽었습니다.
유명한 시인지 어떤지도 잘 모릅니다. 높은 평가를 받는 작품인지 어떤지도 모릅니다. 그저 눈앞에 있으므로 읽어봅니다. 그러므로 나는 아직 일본의 문학사에서 명작으로 평가되는 근대의 시는 거의 모르는 상태입니다.
이 독서 방식이 저에게는 신선하고도 마음 편합니다. 불필요한 의무감이나 압박감이 없으니까, 그 언어가 저항 없이 제 몸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러기를 반복하면서 저는 시에 초점을 맞출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 거라면, 보통의 독서 방법이잖아, 하고 생각하는 분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앞서 말했듯이 저는 성가신 프로의식에 묶여 하나하나의 소설을 마치 자신의 갑옷에 장비라도 되는 것처럼 읽어왔습니다. 그러니 그런 의식으로부터 해방돼 어떤 이해관계도 없이 읽는 일에 시원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총망라해 읽고 지식의 체계를 자신의 것으로 한다는 가치관은 사실은 지배의 원리 그 자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을 알고 이해하는 자신’에 도달하고 싶어 하는 것이죠. 보편을 향한 욕망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개인으로서 읽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해한다는 형태로 심판을 내리는 입장에 서려는 읽기 방식.
예전의 저는, 소설을 지배함으로써 작가의 세계에서 지위를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에게 지배당하거나,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으로 평가당하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자신도 소설의 지배자가 되어, 권력을 휘두르는 쪽에서 도망치려고 했던 것이죠. 폭력을 휘두르지 않기 위해서는 폭력을 몸에 익혀라, 하는 식입니다.
제가 소설 쓸 기력을 감퇴시키고, 시를 향하고 있는 것은 그러한 지배관계, 역학관계 안에 있는 일에 지친 것도 있을 것입니다. 데뷔 이래 30년 가까이, 그런 역학관계 속에 몸을 둬왔기 때문에, 그 영향력과 무연하게 소설을 쓰는 것이 어려워졌습니다. 물론, 시인의 세계에도 비슷한 역학관계는 존재합니다. 주로 남성 베테랑 시인 중에는 교양주의적 경향이 있는 사람도 있겠지요. 내가 유일하게 손을 내밀지 않았던 시 월간지에는 시인 업계의 위계 구조가 가시화되고 있는 부분도 있습니다.

계몽을 버리고 잡담으로!
‘내가 만난 시를, 마음 내키는 대로 읽는다.’ 이런 독서 방법을 저는 ‘잡담 독서’라고 부릅니다. 혹은 독서 산책. 요컨대 도달해야 할 목적지는 없고, 그저 기분에 맡긴 채 수다를 떨며, 우연히 닿은 골목에 들어서는 듯한 읽기 방식.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하지만, 친구는 늘어납니다. 시는 친구입니다(최근, 시와의 인연으로 한국의 시인 신미나 씨와 왕복서간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돼, 1월부터 웹진〈주간 문학동네〉에 연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쪽도 걸음이 내키면 한 번 들여다봐 주세요).
이에 반해 체계적인 지식을 빈틈없이 몸에 익히는 듯한 읽기 방식은, 목적지로 직행하는 독서입니다. 그 읽기 방식은 눈앞의 만남보다도, 지배라는 목적의 달성을 가장 무겁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방식입니다. 이 교양주의자의 목적은 세상에 같은 교양을 퍼뜨리는 것입니다. 계몽자로서 세상을 이끈다는 사명감도 욕망도 아닌 것으로 움직이고 움직여집니다.
세계를 분할통치할려는 파시즘과 독재가 퍼져나가는 가운데 저는 계몽을 버리고 잡담으로 친구를 늘리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옳은가 그른가를 문제 삼기에 앞서, 서로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감각을 나누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야기가 좀 비약됐습니다만, 조급한 시간으로부터 잠시 떠나기 위해서라도 산책하듯 읽는 ‘잡담 독서’를 추천합니다.

번역 김석희
1988년 와세다대학 문학부를 졸업했다. 2000년『깨어나라고 인어는 노래한다』로 제13회 미시마유키오상, 2003년『판타지스타』로 제25회 노마문예 신인상을 수상,『오레오레』로 오에 겐자부로상,『밤은 끝나지 않는다』로 요미우리문학상,『호노오』로 다니자키 준이치로상을 수상했다. 대표 소설집『인간은행』,『디어 프루던스』등이 국내에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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