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주변에는 화려한 이력보다 보이지 않는 삶의 궤적으로 우리를 감동시키는 이들이 있다. 김민제 동문(60세)이 바로 그런 인물이다. 그는 1980년대 중반, 고려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공부한 방향과는 다른 삶을 살다가 50대의 나이에 방송대 교육학과에 편입해 대학원 평생교육학과까지 마치면서 인생의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기 시작했다. 현재 18년 차 화재보험 설계사이자 양평의 1년 차 귀농인으로 살아가면서 방송대 국어국문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인 그의 삶에서 변곡점은 교육학과의 만남이다. ‘배워서 남 주자’는 학과의 철학에 감동한 그는 야학에 뛰어들었다. 야학을 통해 어르신들을 지도하며 ‘자서전 쓰기’ 활동을 전개했고, 자연스레 제자들의 방송대 입학을 안내하게 됐다.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서울지역대학 동아리 ‘어우러짐 글쓰기 연구회’를 창립해, 야학을 거쳐 입학한 이들이 무사히 졸업까지 완주할 수 있도록 돕고자 했다. 배움을 통해 타인의 삶을 어루만지고 자신의 인생을 통합해가는 김 동문을 지난 4월 20일 서울지역대학에서 만났다.
최익현 선임기자 bukhak@knou.ac.kr
“대학 졸업장을 목표로 하는 분도 있겠지만,
졸업장 만이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봐요.
내가 이 나이에 왜 대학에 가는지,
무엇을 느끼고 싶은지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얻어야 합니다. 방송대는 그런 의미에서
학위 그 이상의 가치를 스스로에게 되묻게 하는 곳이죠.”
“배웠으면 남 줘라”는 한마디에
김민제 동문이 2017년 방송대 교육학과 문을 두드린 것은 자녀 교육에 대한 고민과 개인적인 학습 습관을 유지하고 싶다는 소박한 동기에서 시작됐다. 하지만 전공 공부 중 가슴에 박힌 학과 교수님들의 한마디가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교육학과 재학 중 교수님들께서 늘 하시던 말씀에 깊은 감명을 받았어요. ‘배웠으면 남에게 줘야 한다’는 그 한마디에 꽂혀서 용기를 냈죠. 2018년 9월부터 동대문구에 있는 상록야학에서 국어 교사로 봉사를 시작했죠. 사실 처음에는 대학을 보내려고 한 것도 아니었어요. 제가 할 줄 아는 게 학습경험뿐이니, 좋은 일을 해보자는 마음뿐이었죠.”
낮에는 보험 설계사로 치열하게 일하고, 밤에는 60대부터 80대에 이르는 어르신들의 검정고시 준비를 도우며 그는 지식 전달 이상의 무엇이 필요함을 느꼈다.
“야학에서 어르신들을 뵈니 이들의 배움에 대한 열정은 누구보다 강했지만, ‘내가 과연 대학에 갈 수 있을까’ 하는 자신감 부족이 큰 걸림돌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분들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학위 취득이 아니었어요. 평생 배움이 없어 억눌리고 주눅 들어 있던 내면의 상처, 즉 ‘한’을 치유하고 자신의 인생을 긍정할 수 있는 시간이 절실히 필요했다고 봤어요.”
김 동문은 어르신들이 자신의 가치를 재발견하도록 뜻을 같이하는 교육학과 후배 박종미 학우와 함께 ‘그룹 자서전 쓰기’를 기획했다. 이를 위해 2020년 가을, 교육학과 졸업을 1년 늦추고 학과 후배 5명과 함께 ‘총장배 평생교육프로그램개발 경진대회’에 참가해 「사랑해요, 내 인생의 자서전 쓰기 소그룹 활동」을 발표해 최우수상(2등)을 수상했다.
억눌린 인생 보듬는 자서전 쓰기
“자서전을 쓰는 것은 단순한 기록이 아닙니다. 자신이 별거 아닌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했던 분들이 글을 쓰며 ‘내가 이렇게 잘 살았네’, ‘내가 이렇게 성장했구나’를 스스로 발견하는 마법 같은 과정이거든요. 다른 사람의 인생을 서로 경청하면서 ‘나만 힘들었던 게 아니었구나’라는 위안을 얻는 그룹 자서전의 효과는 실로 대단했어요. 지식 위주의 교육에서는 얻을 수 없는 ‘자기 통합’의 시간이었으니까요.”
여기서 그가 말하는 ‘통합’은 시간적이면서 물리적인 것만이 아니라, 일종의 자기 발견과 완성을 의미하는 철학적 개념이다. 실제 야학에서 만난 어르신들이 자서전 쓰기를 통해 자신의 내면을 직시하고, 상처를 보듬으며 거듭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김 동문과 동료 자서전 교사들의 지도로, 그룹 자서전 쓰기는 ‘상록 시니어 자서전’ 1~3기 과정을 통해 좀더 구체적인 결실을 거뒀다. 「상록 시니어 자서전」 합본도 출간해 서로를 격려했다. 수십 명의 어르신이 용기를 얻었고, 그중 20여 명은 방송대 진학이라는 새로운 도전에 나설 수 있었다.
김 동문의 배려는 입학 권유에서 멈추지 않았다. 늦깎이 학우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학문적 글쓰기’를 돕기 위해 2022년 7월 서울지역대학 안에 동아리 ‘어우러짐 글쓰기 연구회’를 창립했다. 그는 이미 교육학과 석사학위(「그룹 자서전 쓰기에 참여한 중·노년기 성인 학습자의 성장에 관한 연구」, 지도교수 권영민, 2024)를 받았음에도, 동아리 회장으로서 늦깎이 학우들의 학습과 공부를 돕기 위해 2023년 국어국문학과에 다시 편입하는 선택을 했다.
“이분들은 적지 않은 나이에 대학 입학이라는 큰 용기를 냈지만, 막상 학술적 글쓰기라는 벽에 부딪히면 많이 좌절하십니다. 그래서 지속적인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관련 지식을 제대로 배워서 나누고 싶었죠. 그게 국어국문학과를 선택한 이유죠. 물론 동아리에서는 지식만 나누진 않아요. 지금 저희 동아리는 1년에 한 번 회원들의 고향 생가를 방문하는 여행도 합니다. 4년 동안 스터디만 하면 졸업 후 관계가 끝나지만, 서로의 삶에 깊이 들어가는 경험은 인생의 만족도를 완전히 다르게 만듭니다.”
‘방송대 5.0’과 만나는 지점
최근 임기를 시작한 김종오 제9대 총장은 ‘학위 그 이상의 가치, 방송대 5.0’을 선포하며 대학 교육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김민제 동문의 행보는 이러한 대학의 지향점과 놀랍게도 맞닿아 있었다.
“방송대는 저에게 제 본모습을 깨닫게 해준 곳이죠. 다양한 인생 경험을 가진 학우들과 소통하며 제 생각의 편협함을 극복할 수 있었어요. 저는 지금 제 인생의 지난 시간을 정리하고 통합하는 데 50%, 새로움을 받아들이는 데 50%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총장님께서 ‘학위 그 이상의 가치’로 방송대의 존재 의미를 설명해주셨다고 생각해요. 대학 졸업장을 목표로 하는 분도 있겠지만, 졸업장만이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봐요. 내가 이 나이에 왜 대학에 가는지, 무엇을 느끼고 싶은지 스스로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얻어야 합니다. 방송대는 그런 의미에서 학위 그 이상의 가치를 스스로에게 되묻게 하는 곳이죠.”
그는 특히 중도에 학업을 포기하려는 학우들에게 ‘기러기 떼’의 지혜를 빌려 격려를 전했다.
“기러기 한 마리가 태평양을 건너기는 어렵지만, 수많은 기러기 떼가 함께 날면 힘 안 들이고 그 넓은 바다를 건널 수 있다고 해요. 혼자 하지 마세요. 스터디나 동아리 활동을 통해 함께 가면 힘도 덜 들고 재미도 배가 됩니다. 한 학기 한 학기 마치다 보면 어느새 영광스러운 졸업의 날이 눈앞에 와 있을 겁니다.” 
귀농, 양평 농원에서 그리는 미래
현재 양평에서 농부로서의 삶을 일궈가고 있는 그는, 조만간 자신의 농원을 학우들의 힐링 공간이자 글쓰기 발표의 장으로 만들겠다는 꿈을 꾸고 있다.
“흩어져 있는 인연들이 자연 속에서 머리를 식히고, 직접 기른 채소를 따서 밥도 먹으며 자서전을 낭독하는 공간을 창조하고 싶어요.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니, 언제나 주려고 하면 제가 복을 받더라고요. 어르신들의 인생에서 제가 배우는 내공과 지혜가 훨씬 많습니다. 머지않은 시간에 어디서든 문해 학습을 돕는 자리에 다시 설 것입니다.”
‘배워서 남 주자’는 가르침을 실천하며, 타인의 삶에 빛을 비추고 자신의 인생을 아름답게 통합해가는 김민제 동문. 그의 ‘밤에도 피는 열정’은 방송대가 제공하는 학위 그 너머에 있는 진정한 교육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만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