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우리가 떠올리는 메이지 유신(1868)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시대의 큰 변화를 읽어낸 인물들이 갑자기 등장해, 낡은 도쿠가와 막부 체제를 무너뜨리고 일본을 근대국가로 이끌어 갔다.’ 유신은 대개 이런 식으로 묘사되곤 합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 속에서 이른바 ‘유신지사’들은, 사사로운 이해를 넘어 국가를 위해 헌신한 이들로, 멸사봉공과 청렴, 그리고 시대를 앞서 내다본 통찰의 상징처럼 그려져 왔습니다.
이런 서사의 뿌리는 사실 매우 깊습니다. 예를 들어 1970년대 말 국내 한 유명 일간지는 당시 절정을 향해 치닫기 시작하던 일본을 두고, 어느 이름난 미국 연구자의 발언을 인용해 이렇게 전합니다. “막말 교토의 골목에서 ‘유신회천의 대의’를 위해 목숨을 던졌던 젊은 무사들은 국가를 위해 자신을 바친 ‘국사(國士)’에 다름 아니었다. 그리고 이 같은 의식이 메이지의 관료와 기업가를 거쳐, 전후 일본의 엘리트 집단으로까지 이어졌다”라고 설명합니다. 말하자면, 확고한 비전을 흔들림 없이 관철해낸 결과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당시 변혁의 한복판에 서있던 이들 눈에도 유신은 그렇게 비쳤을까요.
후쿠자와에게 비친 유신은,
그저 정권교체 정도가 아니라, 사회의 질서와 사람들의 감각,
나아가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판단하는 기준 그 자체가
흔들리는 그런 순간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전혀 분명치가 않은데,
기왕의 가치관은 무너져 버린 총체적인 혼란의
시간이었던 겁니다.
후쿠자와 유키치가 전하는 의외의 풍경
흥미롭게도 근대 일본의 대표적인 지식인으로서, 1만 엔권 지폐 도안을 통해 우리에게도 익숙한 후쿠자와 유키치(福諭吉, 1835~1901)는 전혀 의외의 풍경을 전해 줍니다. 그가 인생의 말년에 저술한『복옹자전(福翁自)』(1899)에서 회고하는 유신은, 우리의 기대대로 질서 있게 방향을 잡아나간 희망찬 출발이라고는 도저히 부를 수 없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누구도 무엇이 옳은지 확신하지 못하는 가운데, 격렬한 감정과 과장된 충의가 제멋대로 내달리다 보니 사태는 쉽게 피로 번져 나갔습니다. 실제로 그가 기억하는 유신은, 질서 있는 출발이라기보다는 혼란에 가까운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반문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쇄국 체제하에서도 일본에는 네덜란드를 경유한 서양 학문, 곧 난학(蘭)의 전통이 이어져 오지 않았느냐고. 닫혀 있긴 했지만 그래도 조선과는 달리 바깥 세상을 향한 창을 열어뒀기에, 세상의 변화를 감지하고 기민하게 반응할 수 있었다는 설명은 지금도 흔히 듣곤 하는 익숙한 이야기일 터입니다.
하지만 본래 ‘난학 서생’이었던 후쿠자와가 전하는 당시 ‘실상’은 이와는 좀 다릅니다. 그는 말합니다. 그즈음 난학 공부는 딱히 출세와도, 일자리와도 이어지지 않았다고.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그리 열심히 배우고 익혔던가. 그저 주야로 어려운 원서를 읽는 일 자체에 몰두할 뿐이었고, 세상은 이들을 필요로 하기는커녕 도리어 난학 서생이라며 손가락질까지 하는지라, 이미 ‘자포자기 상태’에 가까웠다는 겁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서양 학문을 한 이상, 개국은 지지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후쿠자와에 따르면, 개국이냐 쇄국이냐를 두고 다들 일단 ‘쇄국’을 지지하는 입장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크게 논쟁이 벌어지거나 하진 않았다고 합니다. 물론 그가 수학하던 데키주쿠(適塾)가 의학 중심의 학당이었던 만큼, 현실 정치에 관심이 상대적으로 적었던 탓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사정을 고려하더라도, 심지어 서양 학문을 익히던 이들조차 이때 무엇이 옳은 방향인지 분명히 알고 움직였다고 하긴 어려워 보입니다.
후쿠자와를 비롯해 그간 난학 서생들이 익혀온 배움이 얼마나 세상의 흐름과 동떨어진 것이었는지는 곧이어 닥쳐온 개항과 함께 바로 드러나게 됩니다. 흔한 간판조차 읽지 못하다니. 개항장 요코하마에서 후쿠자와는, 그간 익혀온 난학이 현실에선 거의 쓸모가 없다는 충격적인 사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개항 후 드러난 ‘난학 배움’의 한계
그토록 공들여 온 공부가 이리 무력하다는 데 절망하면서도, 그는 필사적으로 궁리를 거듭합니다. 지금 외국과 조약을 맺기 시작하고 있으니, 앞으로는 영어가 필요해지지 않을까. 그래, 그럼 영어를 ‘새로’ 배워 보자. 후쿠자와의 이 같은 ‘방향 전환’ 장면을 놓고 보면, 유신의 출발은 이미 답을 알고 나아가는 과정이라기보다, 무얼 해야 할지조차 확실하지 않은 막막함 속에서 더듬더듬 나아갔던 데 가까워 보입니다.
자, 이런 혼란은 학문의 영역에만 국한된 것이었을까요?
후쿠자와의 회고를 따라가 보면, 당시 매일의 일상 그 자체가 얼마나 불안한 것이었는지 어렵지 않게 체감할 수 있습니다. 유신 전후 십수 년간은 워낙 상황이 어수선했던지라,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을 당할지 몰라 그즈음에는 밤에 거의 외출하지 않았다고 회고합니다. 관련해서 그는 어느 날 밤 겪게 된 일을 하나 소개합니다. 밤길에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사내를 본 그는, 순간적으로 자신을 노린 자가 아닐까 의심하게 됩니다. 하지만 도망치면 오히려 등 뒤로부터 베일 것 같아, 칼을 잡고 정면으로 다가갑니다. 상대 역시 마찬가지였던 듯, 서로를 향해 접근하다 막상 스쳐 지나간 뒤에는 각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는 겁니다. 상대도 그와 마찬가지로 두려움에 차 있었다는 것이겠지요.
이 같은 불안은 낯선 이들 사이에만 국한된 게 아니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었습니다. 후쿠자와가 어릴 때부터 친밀하게 지내 온 어느 친척 형제조차,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게 드나들면서도 실은 그를 염탐하며 처단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걸 나중에야 알게 됐다고 합니다. 이처럼 후쿠자와에게 유신 무렵의 일본 사회는 질서가 새로이 확립돼 가는 시간이라기보다, 오히려 사람들 사이의 일상적 신뢰나 공동의 가치 규범마저 무너져 버린 무규범과 무질서의 상태, 다시 말해 일종의 아노미 상태로 비쳤습니다.
이와 같은 극도의 혼란 상황은, 정치의 세계라고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마침 막부에서 번역 일을 맡고 있던 후쿠자와는, 에도성 내에서 목격하게 된 구체제 붕괴 직전의 혼란상을 이렇게 전합니다. 누군가는 사츠마·죠슈의 ‘적군’을 요격하자 외치고, 또 누군가는 군함을 타고 탈주해 버리는 등 혼란은 극에 달했고, 그런 와중에 소리 내 통곡하는 모습이 무슨 자랑이라도 하는 듯, 마치 ‘충신의사들의 공진회’를 방불케 했다고 합니다.
정치의 세계를 뒤흔든 무질서
하지만 문제는, 그런 와중에 도쿠가와 300년 ‘주군의 은혜[君恩]’를 외치며 ‘순교’를 부르짖던 막부파 충신의사들조차, 통곡만큼 그렇게 신념이 확고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이제 신정부의 수도로 거듭난 도쿄를 ‘적지’라 부르며, 그들은 거기서 만든 것이라면 음식조차 입에 대지 않고, 잠을 잘 때도 그 방향으로는 머리조차 두지 않으려 했습니다. 이를 두고 후쿠자와는, 마치 ‘현대판 백이·숙제’, 즉 충신열사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던 옛 위인들마저 무색하게 지조를 지키려 했노라 비꼬듯 표현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이들 가운데 적지 않은 이들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메이지 신정부에 나아가 관직을 맡게 됩니다. 그러면서 과거 자신들의 언행에 대해 “지나간 일은 단지 장난이었을 뿐”이라며 변명까지 늘어놨다는 거지요.
갈지자의 행보를 보인 건 유신 후 성립된 신정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유신에 즈음해 막부를 압박하는 데 앞장섰던 한 근왕파 공경은, 양이론에서 개국으로의 ‘너무나 갑작스러운 정반대의 처치’를 펴는 메이지 신정부의 방향 전환을 두고, 양이는 핑계였을 뿐 실제로는 정권 탈취가 목적이었냐며 탄식합니다. 하지만 정작 후쿠자와가 보기에는 저 삿쵸 ‘양이번’에 의한 ‘보수 일변도의 양이 정부’가 돌변해 일견 그럴싸한 정책을 내놓기는 하는데, 이름만 개국일 뿐 본질은 그대로 ‘쇄국양이’인지라 도무지 신뢰가 가지 않았다고 하니, 이렇듯 신정부의 노선이란 건 그 어느 쪽에게도 미심쩍게 여겨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쯤에서 다시 묻겠습니다. 메이지 유신은 정말로 존왕양이(尊王攘夷)나 국가를 위한 헌신이라는 대의 아래, 확고한 신념을 지닌 인물들이 일관되게 밀어붙인 변화였던 것일까요.
후쿠자와는 이런 해석에 선뜻 동의하지 않습니다. 존왕이라고도 하고 양이라고도 했지만 실은 이 ‘모두 지엽적인 것’에 불과했다고 그는 잘라 말합니다. 진정 양이가 관건이었다면 막부가 외국을 물리치기만 하면 구체제가 바뀌어야 할 까닭은 없을 터이고, 존왕이야 기존 권력 구조를 유지한 채로도 충분히 가능했을 겁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그는 단호히 말합니다. “그렇게 믿고 싶은 자는 믿어라. 우리는 믿지 않는다.”
유신, 총체적인 혼란의 시간
그렇다면 유신은 무엇이었을까요. 후쿠자와는 처음부터 어떤 대의를 향해 나아가려 한 운동이라기보다, 오랫동안 축적돼 온 구체제에 대한 불만이 외부의 충격과 맞물리며 한꺼번에 분출된 변화로서 설명합니다. 막부 시절의 경직된 문벌 위주의 질서하에서는 재능이나 식견이 있어도 그 힘을 펼치기 어려웠고, 이에 대한 반감은 사회 전반에서 고조되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서양 세력과의 교섭에서 막부가 한계를 노정하자, 존왕과 양이라는 구호는 이런 불만을 결집하는 명분으로 작동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표면에 내세워진 구호와 실제로 움직이고 있던 힘이 서로 달랐던 셈이지요.
이렇게 보면 유신은 어떤 대의를 향한 운동이라기보다, 기존 질서가 안팎의 압력 속에서 무너지고 권력이 재편돼간 과정에 가까워 보입니다. 덜 ‘혁명적’으로 들리는지요? 하지만 후쿠자와에게 비친 유신은, 그저 정권교체 정도가 아니라, 사회의 질서와 사람들의 감각, 나아가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판단하는 기준 그 자체가 흔들리는 그런 순간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전혀 분명치가 않은데, 기왕의 가치관은 무너져버린 총체적인 혼란의 시간이었던 겁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가 오늘 너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는 이 ‘밝은 메이지’란 서사는, 과연 언제, 누구에 의해, 어떤 과정을 거쳐 이렇게 매끈하게 정리된 것일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