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   서구지성사를 만나다

뉴딜은 대공황을 단번에 끝내지 못했고, 개별 정책의 효과를 둘러싼 논쟁도 오늘날까지 계속된다. 그럼에도 미국인들은 정부가 끊임없이 무언가를 정력적으로 시도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국가는 더 이상 국민의 고통을 지켜보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자유를 지키기 위해 국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기본적으로는 개인의 권리를 보장하고, 법과 질서를 유지하며, 그 밖의 일은 시장과 공동체에 맡기면 된다. 그러나 거대 기업이 시장을 지배하고,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가 거리에 내몰린다면? 가난한 부모에게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아이들이 학교에 갈 수 없다면? 국가가 간섭하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 이들을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을까? 혁신주의에서 뉴딜로 이어지는 미국 자유주의의 변화는 이 질문에 대한 길고도 역동적인 답변이었다.


산업 자본주의는 개인을 자유롭게 했는가
도금시대(Gilded Age)라 불린 19세기 후반 미국은 전례 없는 경제 성장을 경험했고, 록펠러와 카네기로 대표되는 거대 기업은 새로운 부를 쌓아올렸다. 하지만 산업 자본주의는 풍요뿐만 아니라 빈곤과 독점, 정경유착과 경제적 불평등, 노동 착취와 도시의 범죄 등 개인의 노력만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사회문제까지 함께 가져왔다. 여성과 유색인, 이민자는 물론이고 농민과 노동자를 비롯한 백인 남성들의 자유까지 위협받았다. 개인의 자유를 약속했던 시장이 오히려 그 자유를 가로막는 상황이 나타난 것이다.


19세기 말 등장한 혁신주의 운동(progressive movement)은 이러한 상황에 대한 대응이었다. 혁신주의는 서로 다른 배경과 지향점을 가진 개혁가들이 벌인 다양한 운동을 느슨하게 연결한 이름이다. 다만 이들은 당대 미국 사회에 대한 격렬한 불만을 공유했다. 개인을 그대로 내버려두는 것만으로 자유가 실현되지 않는다면 개인과 국가, 권리와 권력, 자유와 공공성 사이의 관계 또한 새롭게 생각해야 했다. 지성사의 관점에서 볼 때, 혁신주의 시대는 미국인들이 자유주의를 19세기식 자유방임주의 전통에서 떼어내 국가의 책임과 접목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개혁가들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유주의의 범위를 넓혔다. 제인 애덤스는 시카고에 세운 사회복지관 헐하우스에서 이민자와 빈민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녀의 활동은 빈곤이 개인의 나태함만으로 설명될 수 없으며, 약자를 돕는 일이 사적 자선에만 맡겨질 수도 없음을 보여줬다. 흑인 지식인 듀보이스는『흑인의 영혼』(1903)에서 노예제 폐지 이후에도 지속되는 인종적 억압을 폭로했다.


언론인들의 폭로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대중에게 전달했다. 제이콥 리스의『나머지 절반은 어떻게 사는가』(1890)는 뉴욕 빈민가의 비참한 삶을 생생한 사진을 통해 고발했고, 업턴 싱클레어의 소설『정글』(1906)은 도축업의 가혹한 노동 환경과 불결한 위생 상태를 묘사했다. 아이다 타벨은 거대 석유 기업의 독점과 횡포를 파헤쳤다. 이들은 무소불위의 경제 권력이 개인의 자유에 얼마나 위협적인지, 국가의 적절한 보호 없이 자유가 얼마나 취약해질 수 있는지를 드러냈다.


이 다양한 목소리를 국가의 역할에 관한 주장으로 집약한 인물은 허버트 크롤리였다. 그는『미국적 삶의 약속』(1909)에서 개인의 자유라는 미국의 오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강력한 국가가 필요함을 역설했다. 거대 기업이 경제를 지배하는 시대에 작은 정부만을 고집한다면, 자유는 힘 있는 사람들의 특권으로 전락할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월터 리프먼은『표류와 주도』(1914)에서 산업 자본주의의 망망대해에 개인을 표류하게 내버려두는 자유방임주의를 비판했다.


크롤리의 책에 깊은 인상을 받은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1912년 대선에서 신국민주의(New Nationalism)를 내걸고 기업 규제와 노동권 보호, 사회 입법을 공약했다. 크롤리와 리프먼이 1914년 창간한 <뉴리퍼블릭>은 ‘혁신주의의 주간 성경’으로 불렸다. 자유주의의 재해석은 지식인들의 논쟁을 넘어 정책의 언어가 되기 시작했다.


철학자 존 듀이는 이러한 재해석에 철학적 기반을 제공했다. 그는 민주주의를 헌법과 선거 같은 정치 제도를 넘어, 모든 시민이 자유를 실천하는 삶의 방식으로 이해했다. 건강한 민주주의는 지적이고 능동적인 시민을 필요로 했고, 그러한 시민이 성장하려면 교육과 소통, 사회 참여의 기회가 마련되어야 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개인의 자유와 국가의 책임은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인 것이었다.

 


무엇이든 시도하라, 그러나 반드시 시도하라
자유주의의 변화는 단선적인 과정이 아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국가의 역할을 확대했지만, 강력해진 국가는 개혁가들의 기대와 달리 자유를 억압하기도 했다. 애국주의 열풍 속에서 언론 검열과 반전운동 탄압이 벌어졌고, 전후에는 ‘빨갱이 사냥’이 뒤따랐다. 자유를 지키기 위해 키운 국가가 자유를 짓밟을 수도 있었다. 전쟁과 그 여파는 혁신주의의 낙관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국가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젖힌 것은 1929년 시작된 대공황이었다. 주식 시장의 붕괴 이후 기업과 은행이 무너졌고, 1933년에는 노동자 네 명 가운데 한 명꼴로 일자리를 잃었다. 농촌에서도 소득이 추락하고 농민들이 땅을 잃었다.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 농지를 떠난 농민, 거리에 내몰린 가족들에게 시장이 스스로 회복하기를 기다리라는 말은 설득력을 갖기 어려웠다. 전례 없는 재난은 국가의 책임에 대한 새로운 답변을 요구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32년 대통령에 당선된 프랭클린 D.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일명 FDR은 뉴딜을 제안했다. 뉴딜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과잉 생산과 불평등부터 금융 시스템과 국제 경제까지, 대공황의 원인이 무엇인지에 관해서도 합의된 바가 없었다. 원인이 모호했으니 처방 역시 확정적일 수 없었다.


중요한 점은 명확한 정의의 부재야말로 오히려 초기 뉴딜의 본질을 이뤘다는 사실이다. 루스벨트에게 뉴딜은 완성된 설계도라기보다 일종의 실험이었다. 물론 지향점은 있었다. 뉴딜은 미국 경제의 피라미드 밑바닥에 있는 ‘잊힌 사람들’, 즉 굶주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정치였다. 그러나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실제로 시도하며 알아내야 했다. 1932년의 연설에서 루스벨트는 이렇게 말했다. “실패하면 솔직히 인정하고 다른 방법을 찾으면 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를 시도하는 것이다.”


실험을 추진하려면 용기와 자신감, 그리고 ‘할 수 있다’는 낙관주의가 필요했다. 1933년 취임식에서 루스벨트는 선언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오직 두려움 그 자체뿐이다.” 이 한마디는 걱정과 공포에 시달리던 미국인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무엇이든 시도하자는 실험 정신과 두려워할 것은 두려움뿐이라는 낙관주의, 이 두 가지 요소가 초기 뉴딜의 성격을 규정했다.


농업과 산업, 노동과 복지, 공공사업에 관한 정책들이 쏟아졌다. 농업조정국(AAA), 민간자원보호단(CCC), 전국산업부흥청(NRA)처럼 알파벳 약자로 불리는 기관들이 수없이 등장했다. 일부는 실패했고, 대다수는 부분적인 성공에 그쳤으며, 상당수는 서로 충돌했다. 당대의 언론은 이 복잡한 정책과 기관의 조합을 ‘알파벳 수프’라고 비꼬았다. 온갖 재료를 한꺼번에 넣고 끓인 잡탕처럼 무엇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 많은 알파벳 조합 위에 모든 미국인이 아는 세 글자의 알파벳, FDR이 있었다. 뉴딜은 대공황을 단번에 끝내지 못했고, 개별 정책의 효과를 둘러싼 논쟁도 오늘날까지 계속된다. 그럼에도 미국인들은 정부가 끊임없이 무언가를 정력적으로 시도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국가는 더 이상 국민의 고통을 지켜보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뉴딜은 민주적 정부가 위기에 대응할 수 있다는 믿음을 회복시켰다.


국가의 책임으로 다시 쓴 자유의 의미
뉴딜의 실험은 여러 지식인과 개혁가의 노력을 통해 구체적인 제도로 바뀌었다. 경제학자 렉스포드 터그웰은 생산과 가격을 조정하는 경제계획에서 해법을 찾았다. 해리 홉킨스는 구호와 공공사업을 통해 실업자들에게 생계와 일자리를 제공했다. 노동부 장관 프랜시스 퍼킨스는 사회보장제도의 구축을 이끌었다. 1935년 사회보장법은 노령과 실업 같은 위험에 국가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을 제도화했다.


경제계획과 복지 못지않게 중요했던 것은 시장을 규제하는 일이었다. 증권거래위원회는 금융 거래의 투명성을 높이고 투자자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전국노동관계위원회는 노동자의 단결권과 단체교섭권을 보호했다. 서로 다른 이론에서 나온 정책들이었지만, 경제 권력의 횡포를 제어하고, 시장에서 약자를 보호하며,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위험을 사회가 함께 책임진다는 방향을 공유했다. 자유를 실제로 행사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는 일이 국가의 과제가 된 것이다.


물론 그 자유가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지는 않았고, 뉴딜은 남부의 인종 분리 체제를 정면으로 공격하지 않았다. 루스벨트는 선거의 승리와 법안의 통과를 위해 남부 백인 정치인들의 지지가 필요했다. 사회보장제도의 초기 노령보험에서 농업 노동자와 가사 노동자가 제외되면서 많은 흑인과 여성이 보호의 사각지대로 밀려났다. 남성을 가정의 생계 부양자로, 여성의 노동을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는 관념 또한 뉴딜에 깊이 새겨졌다. 국가의 책임은 확대됐지만, 그 책임이 누구에게까지 미치는지는 여전히 불평등한 정치적 관계에 좌우됐다.


영부인 엘리너 루스벨트는 흑인 민권운동가들의 목소리를 정부에 전달하고, 여성의 공직 진출과 노동자의 권익을 옹호했다. 그녀의 활동은 뉴딜이 약속한 자유와 실제로 보장한 자유 사이의 간격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 간격을 줄이려는 시도였다. 뉴딜의 한계는 자유주의의 과제가 완수되지 않았음을 보여줬고, 그 약속은 이후 더 많은 권리를 요구할 근거가 됐다.


혁신주의에서 뉴딜까지의 과정은 개인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국가의 책임을 다시 정의한 역사였다. 시장에 대한 규제와 사회적 안전망은 자유주의 바깥에서 들어온 이질적인 요소가 아니라, 변화한 사회에서 자유의 약속을 실현하려는 지적이고 정치적인 노력의 결과였다. 이렇게 등장한 현대적 자유주의는 미국 복지 제도의 기틀을 마련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미국을 지탱할 지적 기반의 하나가 됐다. 미국의 시대는 경제력과 군사력의 산물이었지만, 자유가 무엇이며 그것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를 둘러싼 오랜 사상적 탐색의 결과이기도 했다.

 

서울대를 졸업하고 미국 오하이오주립대(OSU)에서 20세기 미국 정치사·지성사·외교사를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Diplomatic History, Journal of the History of Medicine and Allied Sciences, Modern Intellectual History 등의 저널에 논문을 게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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