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는 당시 사람들이 어떤 조건에서 판단했는지를 큰 틀에서 설명해 줄 수 있을 따름입니다. 선택하고 그 결과를 책임지는 일은 어디까지나 그 시대의 ‘오늘’을 살던 이들의 몫이지요. 그러므로 ‘시대가 그랬다’는 말은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일 순 있어도, 모든 걸 설명하는 최종 답안이 될 수는 없습니다.

앞서 우리는 ‘밝은 메이지’의 이야기 뒤에 가려진 여러 갈등과 선택을 살펴봤습니다. 자유와 민권을 말하면서도 농민들의 절박한 삶을 외면했고, 조선의 독립을 돕겠다면서 조선을 일본 국내 개혁의 수단으로 삼으려던 발상도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되물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때야 원체 그런 시대가 아니었냐고. 제국주의 열강이 서로 먹고 먹히던 세상에서, 그것도 비서구의 후발주자였던 일본만 다른 선택을 하기는 어려웠던 게 아니냐고 말입니다.
분명 시대의 압박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대가 선택의 조건을 들이미는 것과, 그 조건 속에서 실제로 무얼 선택할지는 같은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게 판단하고 결정한 이상, 그 결과에 대해서는 결정한 주체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서 ‘책임자’인 것이지요. 그렇다면 제국 일본에서는 대체 누가 국가의 선택을 결정하고 책임졌을까요.
제국 일본의 독특한 구조와 ‘천황의 뜻’
이 질문을 생각하다 보면, 문득 패전 뒤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재판) 법정에 선 도조 히데키의 발언이 떠오릅니다. 그는 천황의 뜻에 거슬러 행동한 고관이 있었느냐는 질문에 단호하게 답했습니다. “일본국 신민이 천황 폐하의 의사에 반하는 행동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정말로 그랬을까요? 불과 10여 년 전인 1931년, 만주에 주둔하던 관동군은 일본 정부가 내세운 불확대 방침을 넘어 군사행동을 확대했습니다. 바로 ‘만주사변’입니다. 게다가 조선에 주둔하던 부대마저 각의의 승인을 기다리지 않은 채 국경을 넘어가니, 당시 일본 안에서도 이건 천황의 ‘통수대권’을 침범한 행동이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됐습니다. 그렇지만 내각과 천황은 이를 추인했고, 이후 관동군의 행동 역시 용인되기에 이릅니다. 심지어 이듬해에는 관동군의 ‘충렬’을 치하하는 천황의 칙어까지 내려졌고요.
참으로 묘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천황의 뜻을 거스르는 일은 있을 수 없다면서, 실제로는 정부의 방침과 정상적인 절차를 뛰어넘어 제멋대로 행동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도 이런 행동이 끝내 ‘반역’이 아니라 ‘충성’의 이름으로 받아들여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나라에서 말하는 ‘천황의 뜻’이란 대체 무엇이었을까요.
더 흥미로운 점은, 이런 기묘한 구조가 쇼와 시대에 갑자기 생겨난 게 아니라는 데 있습니다. 사실, 문제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메이지 때 만들어진 제국 일본의 독특한 구조와 맞닥뜨리게 됩니다. 겉으로 드러난 원리는 단순했습니다. 모든 통치권은 천황에게 모이고, 대신들은 천황을 보필하며, 군 역시 대원수인 천황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체제였지요. 하지만 실제 국가 운영은 그리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내각과 군의 통수기관, 추밀원 등이 유기적으로 한데 결합된 것이 아니라, 저마다 천황을 보필한다는 형태로 나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메이지 일본이 우왕좌왕했던 건 아닙니다. 오히려 한동안 이 체제는 꽤 잘 돌아갔습니다. 유신과 내전의 격변을 겪은 이토 히로부미나 야마가타 아리토모 같은 지도자들은 ‘정치’와 ‘군사’의 사정을 함께 알고 있었고, 공식 직함을 넘어서는 권위와 인맥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도 내에서 해결하기 어려운 충돌이 생기면 이른바 ‘원로’들이 막후에서 의견을 조정했고, 청일·러일전쟁 같은 대사를 치를 때도 정치와 군사의 방향을 어떻게든 하나로 묶어낼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 같은 조정이 제도 자체에 의해서라기보다, 그 제도를 만든 사람들의 개인적 권위와 경험에 크게 기대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들이 은퇴하고 세상을 떠나자, 이전에는 개인적 역량으로 메워졌던 틈이 차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각 기관은 저마다 천황을 보필한다는 논리를 들어 제 권한을 주장할 수는 있었지만, 정작 그 서로 다른 판단을 하나로 모아 국가 전체의 방향을 결정하고 책임질 주체는 점점 희미해져 갔습니다.
‘마치 그런 양’의 철학
그러고 보면 메이지의 ‘성공’은 체제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는 증거라기보다, 어쩌면 그 안에 있던 문제를 오랫동안 보이지 않게 만들어 준 조건이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은 이런 간극을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였을까요? 메이지 시대가 막을 내리던 1912년, 소설가 모리 오가이는 「마치 그런 양」이라는 묘한 제목의 단편을 발표합니다. 주인공 히데마로는 유럽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젊은 학자입니다. 그는 일본사를 쓰겠다는 뜻을 품고 있지만, 막상 붓을 들지 못합니다. 역사를 정직하게 쓰려면 신화와 역사를 구별해야 하는데, 당시 일본 사회는 그 둘을 선뜻 떼어 놓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작품 속에서는 국가적 기원과 천황을 둘러싼 ‘신화’를 이미 ‘사실’이라 믿지 않던 교육받은 이들조차 제사와 의례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에게는 그런 신화를 마치 ‘역사’처럼 가르치고 있었고요. 요컨대, 믿지 않으면서도 믿는 듯 행동하고, 그 모순에 대해서는 굳이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 한 셈이었지요. 하지만, 히데마로가 보기에 그렇다고 이 모든 걸 거짓이라며 내던질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 신화와 의례가 이미 사람들의 삶과 국가 질서에 깊숙이 자리 잡은 이상, 사실 여부만으로 그 정치·사회적 기능까지 지워 버릴 수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고민에 빠져 있던 히데마로가 우연히 붙잡은 것이 철학자 한스 바이힝거의 『‘마치 그런 양’의 철학』이었습니다. 사실로 증명할 수 없는 것이라도 그것이 ‘있는 것처럼’ 생각함으로써, 학문이나 도덕, 종교가 성립할 수 있다는 발상이었습니다. 한때 히데마로는 여기에서 자신의 고민을 풀 실마리를 찾은 듯했습니다. 신화를 역사적 사실이라 우길 필요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 함의까지 모두 버리지 않고도 살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지요.
하지만 그런 타협이 정말 가능할까요? 친구 아야노코지는 그렇게 미묘한 구분 위에서 살아갈 수 있는 이가 과연 얼마나 되겠느냐고 묻습니다. 기존 질서와 충돌할 수밖에 없다면 차라리 정면으로 돌파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히데마로는 끝내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정직하게 역사를 쓰자니 앞뒤로 막혀 있고, 그렇다고 얼버무리거나 거짓말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끝끝내 그는 신화와 역사를 떼어 놓을 때 생길 파장을 두려워하던 아버지와 어떻게든 ‘타협해 해나갈 희망’을 놓지 못합니다.
물론 모리가 이 작품에서 메이지의 국가체제를 직접 비판하고 있었던 건 아닙니다. 하지만 작품이 던지는 ‘마치 그런 양’이라는 물음은 앞에서 본 메이지 일본의 또 다른 얼굴을 떠올리게 합니다. 천황이 직접 나라를 다스린다고 되어 있지만 실제 정치는 보필자들이 움직이고, 대원수로서 천황이 전군을 통솔하는 것처럼 되어 있지만 실제 통수기관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또한 근대적 입헌국가의 형식은 갖췄지만, 정작 서로 다른 판단을 하나로 모아 책임질 중심은 뚜렷하지 않았지요.
문제는 이런 것들이 모두 거짓이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서로 잘 들어맞지 않는 여러 원리가, 마치 서로 모순되지 않는 양 한 체제 안에서 작동할 수 있었다는 데 있지요.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 역시 이런 모순을 알아차린다고 해서 아야노코지처럼 기존 질서와의 단절을 감수하며 정면으로 돌파하기란 쉽지 않을 터입니다. 그보다는 히데마로처럼 서로 어긋나는 두 세계 사이에서 어떻게든 타협하며 살아갈 길을 찾는 편이 훨씬 현실적인 선택이었을 겁니다.
어쩌면 그의 고뇌는 이후 일본의 많은 지식인과 지도자들이 되풀이할 곤경을 미리 보여 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대목에서, 앞서 만났던 후쿠자와 유키치의 말이 다시 떠오릅니다. 메이지 초 그는 이제 막 서양 문명을 배우기 시작한 일본 지식인들을 두고 “마치 한 몸으로 두 생을 사는 듯”하다고 표현합니다. 어제까지 한학과 신불(神佛), 봉건질서 속에서 살던 전통 시대의 사람이 오늘은 서양 문명을 배우고 있으니, 두 세계를 서로 비춰 본다면 오히려 무엇이 옳고 그른지 더 분명하게 판단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였습니다.
두 세계의 모순과 공존
하지만, 모리가 그린 히데마로의 모습은 그런 낙관과는 한참이나 거리가 있지요. 두 세계를 모두 알게 됐기에 판단이 더 분명해진 게 아니라, 오히려 어느 하나도 쉽사리 버리지 못한 채 그 사이에서 길을 잃었으니까요. 어쩌면 한 몸으로 두 삶을 살아온 메이지 일본 역시 사정이 비슷했던 것은 아닐까요. 서로 다른 원리를 하나의 새 질서로 온전히 정리하기보다, 때로는 천황친정의 원리를, 때로는 입헌정치의 원리를 내세우며, 그 사이의 간극을 이리저리 특정 개인의 역량과 관행으로 메워 왔던 겁니다. 그리고 이게 잘 돌아가는 동안에는 굳이 그 둘 사이의 모순을 끝까지 따져 물을 필요는 없었던 셈이지요.
자, 이제 처음 질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그때는 그런 시대였다’는 말은 틀리지 않습니다. 19세기 세계는 실제로 가혹했고, 메이지 일본의 시야에 들어온 선택지도 오늘날 우리 눈에 보이는 만큼 넓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시대’는 당시 사람들이 어떤 조건에서 판단했는지를 큰 틀에서 설명해 줄 수 있을 따름입니다. 선택하고 그 결과를 책임지는 일은 어디까지나 그 시대의 ‘오늘’을 살던 이들의 몫이지요. 그러므로 ‘시대가 그랬다’는 말은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출발점일 순 있어도, 모든 걸 설명하는 최종 답안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조금 다른 각도에서 메이지의 ‘성공’을 들여다볼 차례입니다. 이렇게나 여러 간극과 모순을 품고도 일본은, 어떻게 그토록 짧은 시간 안에 강국으로 올라설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이런 식의 성공 경험은 이후 일본이 국가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에 무얼 남겼을까요. 다음 회차에서는 먼저 그들에게 비친 ‘19세기’라는 세계부터 살펴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