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화제의 책

울프 애독자라면『바이올렛의 생애』는,

장차 작가로 성장하게되는 울프의 초기 문학의씨앗을

이해할 수 있는출발지로서 충분히 읽어볼 만한 작품이다.

편자인 세샤기리 교수가 뉴욕 공공도서관과
영국의 롱리트 하우스를 오가며
울프의「친교의 화랑」수정본 타자 원고를 찾아내는 과정은
그 자체로도 흥미롭기까지 하다.

 

 

한 문제적 작가의 진면목을 추적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가 어떤 작가였는지, 그의 작품에 깃든 세계관과 의미망 전체를 조명해야 하기에 그 진면목은 늘 수정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이런 점에서 방송대출판문화원 대표브랜드 지식의날개가 내놓은 버지니아 울프(1882~1941) 정확하게는 ‘버지니아 스티븐’이 스물다섯 살에 썼던 유사 전기(mock-biography)『바이올렛의 생애』는 몇 가지 점에서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한 작품이다.
버지니아 울프라는 영문학사의 걸출한 작가의 소설적 출발을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버지니아 울프 연구의 권위자가 어디까지 발품을 팔았는지를 흥미롭게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그래서 새롭게 발굴한 작품보다 이 연구자의 ‘서문’과 ‘작품 후기’의 분량이 좀더 많다는 점에서도 말이다.
이 작품을 편집한 우르밀라 세샤기리는 미국 테네시대 인문학 석좌교수이자 미국철학회와 영국학술원 연구펠로우십으로 있는 저명한 연구자다. 그의 대학원 세미나 「버지니아 울프와 모더니즘의 형성」 등은 교내에서도 이름난 강좌로 알려져 있다.  지난 6월 이스탄불 빌기대학교에서 열린 제35회 버지니아 울프 국제연례학술대회에서「맥락 속의 대화: 바이올렛의 삶」을 주제로 강연했다는 것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100여 년 만에 세상에 나온 작품
『바이올렛의 생애』는 울프가 1907년, 25세의 나이로 귀족 여성 바이올렛 디킨슨을 위해 써 내려간 작품으로 짧은 세 편의 이야기「친교의 화랑」,「마술 정원」,「잠을 부르는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러다 보니 ‘쉽게 읽을 수 있겠네’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
1907년 버지니아 울프와 같은 영국 지식 계층이 쓰던 글은, 셰익스피어 시대(16~17세기)만큼 외계어처럼 느껴지지는 않겠지만, 문장의 길이가 훨씬 길고, 어휘가 화려하며, 특유의 격식과 예의를 차리는 표현 때문에 현대 독자에게는 약간 ‘기름지고 뻑뻑한’ 느낌을 줄 수 있다. 또한, 당대의 남성중심주의 규율을 우회해 비꼬는 울프의 글쓰기 자체도 쉬 그물에 걸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울프 애독자라면『바이올렛의 생애』는, 장차 작가로 성장하게 되는 울프의 초기 문학의 씨앗을 이해할 수 있는 출발지로서 충분히 읽어볼 만한 작품이다. 울프가 생전 처음 출간한 소설「출항」(1915)보다 무려 7년이나 앞서 쓰인 이 작품은, 우리가 알던 울프 문학의 출발점을 다시 쓰게 만드는 작은 사건이다.
또한, 편자인 세샤기리 교수가 뉴욕공공도서관과 영국의 롱리트 하우스를 오가며 울프의「친교의 화랑」수정본 타자 원고를 찾아내는 과정은 그 자체로도 흥미롭기까지 하다.
미국 뉴욕공공도서관에「친교의 화랑」의 초고가 남아있었지만 작품은 오랫동안 미완성 원고로 전해졌다. 그러나 1908년 울프가 직접 손질한 수정본 타자 원고를 2022년 세샤기리 교수가 우연히 발견하면서, 이 작품은 100년이 넘는 시간을 건너 비로소 완전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책장을 넘기면 “여덟 살도 되지 않아 정원에서 가장 높이 자란 접시꽃만큼이나 키가 커진” 거인 여성 바이올렛이 우리를 맞는다. 당대의 경직된 사회적 관습마저 거침없이 제압하는 이 유쾌한 인물은 바이올렛 디킨슨에게서 영감을 받아 태어났다. 그는 키가 180cm가 넘는 귀족 계층으로 울프와 평생을 함께한 벗이자, 후원자였다. 울프보다 열일곱 살 위였던 바이올렛은 이 과감하면서도 내향적인 스무 살 처녀와 친구가 됐고, 그를 자신의 귀족 친구들에게 소개해 줬으며, “식견이 높은 독자로서 버니지아의 초기 글들을 읽었고, 그녀의 글이 1904년에 처음으로 발표(에세이 「하워스: 1904년 11월」)될 수 있도록 도와줬다.”
여성과 웃음, 인습에 맞선 글쓰기
유사 전기 형식을 띤 세 편의 이야기를 관통하는 것은 여성들의 우정과 웃음이다. 울프가 이 작품들을 쓰던 무렵, 여전히 여성들은 엘리자베스 시대의 고루한 인습과 남성중심주의의 규율에 갇혀 있었다는 사실을 환기하면, 울프의 이 작품들이 ‘여성’과 ‘여성들의 웃음’을 자유롭고 담대하게 소환했다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또한 첫 번째와 두 번째 이야기 속 익명의 여성들은 실제로 울프와 함께 무도회를 찾고, 편지를 주고받고, 여행을 떠났던 벗들이었다는 사실도 작품 후기의 사진 자료를 통해 밝혀진다. 울프는 이 이야기의 초안을 바이올렛을 비롯한 친구들에게 직접 보여줬고, 바이올렛이 제안한 수정 사항까지 반영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두 여성의 우정이 빚어낸 협업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이 작은 이야기 속에는 훗날 울프의 문학이 펼쳐 갈 씨앗들도 이미 자라고 있었다. 세샤기리 교수의 작품 후기에 따르면, 세 이야기의 유사 영웅적 양식은『올랜도』(1928)를 키워낸 뿌리와 맞닿아 있고,「잠을 부르는 이야기」속 “올빼미가 있었다는 증거는 바로 누구도 그것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라는 문장은 실체와 인식을 둘러싼 사유가 중심에 놓인『등대로』(1927)를 떠올리게 한다.
또한「마술 정원」에서 바이올렛이 귀족 친구에게 건네는 “자기만의 시골집을 갖는다면 아주 멋질 것”이라는 한마디는, 20여 년 뒤 페미니즘 문학의 고전이 될 에세이『자기만의 방』(1929)의 첫 목소리를 미리 듣는 듯한 순간을 선사한다.

우울한 울프상(像)을 깨는 발견
“독자들이여! 버지니아 울프가 우리의 폭소를 자아낼 수 있을까?” 세샤기리 교수는 서문을 이 도발적인 질문으로 연다. 그의 말대로『바이올렛의 생애』는 야단법석을 떠는 익살극에 가까운 재기 넘치는 코미디다. 동시에 이 작품은 소설이라는 형식 자체에 어떤 혁신이 필요한지를 흔들림 없이 묻고 있으며, 문학 형식의 개혁이 곧 여성의 삶을 새로운 방식으로 사유하는 일이라는 울프의 평생에 걸친 신념을 단단히 세우고 있다.
우리가 알던 울프는, 1941년 3월 28일 우즈강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간 종생기처럼, 우울하고 어두운 주제에 골몰한 작가였을지 모르지만, 이 작품 속 울프는 활기차고 총명하고 사교적이며, 무엇보다 잘 웃는 사람이었다.
한국어판을 편집한 출판문화원 신경진 편집자는 “정신 질환과 고독, 죽음의 이미지로만 각인돼 온 작가의 또 다른 얼굴을 이토록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이번 발굴이 우리에게 건네는 가장 큰 선물”이라고 말했다.
이주리 한국버지니아울프학회 회장도 “전기의 형식을 빌린 세 편의 이야기에서 울프는 대담하고 짓궂으며 무엇보다 잘 웃는다. 여성들의 우정과 삶을 그려내며 전기와 허구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가운데, 여성의 삶과 글쓰기에 대한 관심도 드러난다. 익살과 상상으로 가득한 이 작은 작품에는 훗날 울프의 문학으로 이어질 질문과 실험이 생생하게 움직인다. 문학적 모험이 시작되는 순간을 만나는 즐거움이 이 책에 있다”라고 추천했다.
『바이올렛의 생애』는 모더니즘의 거장으로만 알려진 울프의 젊고 발랄한 문학적 원형을 만나게 하는 뜻깊은 작품이며, 이 책을 통해 한국 독자들도 지금껏 몰랐던 새로운 울프와 마주하게 될 것이다.


최익현 선임기자 bukhak@kno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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