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재일조선인 시인 김시종, 삶을 말하다 ④

사람은 각각 자신의 시를 안고 살아간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지만, 어깨를 젖히고 걷는 이 군이 사실은 처진 어깨였음을 알고 목이 메었습니다. 그 모습이 시였습니다.  인편에 보낸 첫 시집, 아버지의 관 속에내가 일본에서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책 한 권을 만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본에 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오사카 도톰보리(道頓堀)의 중고서점에서 얻게 된 오노 토자부로(小野十三?) 선생의 『시론(詩論)』입니다. 식민지 조선에서 익숙했던 일본의 근대시는 공통된 자연 찬미로 지탱되는 정감 과잉의 시이므로 그 서정은 부정되어야 한다고 단정하여, 시에 대한 나의  생각을 뒤집어 버렸습니다. 설마하니 서정이라는 것이 비평을 무디게 하는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습니다.덕분에 나는 의식 저변을 이루는 유려한 일본어에 대치시켜, 일본에서 사는 조선인으로서 ‘일본어’로 쓴다는 의미를 이끌어내었습니다. 오노 선생이 시작한 ‘오사카 문학학교’에서는 시 강사로 오랫동안 일하기도 했습니다. 문학을 지망하는 많은 학생 동료들과 나이나 국적을 넘어 교류할 수 있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었습니다. 또 한 가지, 내가 시를 계속 쓸 수 있었던 것은 시 동인지 ‘진달래’ 덕분입니다. 이른 봄 계절을 장식하는 진달래의 이름을 붙인 시지입니다. 조직에 속하지 않은 자이니치 청년들이 모일 수 있는 서클이었는데, 일본에서 산다는 의미를 찾는 모임이기도 했습니다. 공부 모임을 하면 언제나 50명 정도의 학생과 노동자들이 모였습니다. 60년 이상 함께 살아온 아내 강순희는, 이 시 쓰기 모임에서 만났습니다. 영양실조와 과로로 건강을 해쳐, 이쿠노의 진료소에서 장기요양을 하고 있을 때, 틈틈이 문안을 와 준 것이 인연이 되었습니다. 평생의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양석일도 ‘진달래’의 일원이었습니다.아버지와 아들을 가르고어머니와 나를 가르고나와 나를 가른38선이여,당신을 종이 위의 선으로 돌려놔 주련다.―「당신은 이제 내게 참견할 수 없다」 중에서시집은 제주도를 오가는 사람들에게 부탁하여 양친에게 보냈습니다. 아버지는 2년 후에 돌아가셨는데, 관 속에 그 시집을 넣어드렸다고 합니다. 감사한 일입니다.―<아사히신문> 2019년 7월 31일(수), 9회차 “38도선을 이 나라에서 넘으련다”‘공화국(북한)’을 지지하는 나였지만, 김일성의 신격화가 강화됨에 따라 체제에 대한 의심이 솟아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반공독재를 그대로 휘두르는 한국의 이승만 정권보다는 북쪽이 낫다고 스스로를 타이르며 믿고 있었습니다. 1955년 내가 속한 조직은 노선을 전환하여,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선총련)가 되었는데, 정치주의·획일주의에는 익숙해질 수 없었습니다. 시 동인지 ‘진달래’ 활동도 민족적 허무주의에 빠졌다고 비난당했고 어쩔 수 없이 해산되었습니다. 창작을 저지당하고 나서, 나는 설친(황폐한-옮긴이 주) 나날을 보내며 연일 싸구려 술을 들이켜고 있었습니다.나는 조직으로부터 비판을 받으면서도 ‘한국전쟁에서 황폐해진 조국의 재건을 이루겠다’는 뜻에는 찬성했습니다. 오사카에서 살던 이종사촌이 ‘귀국선’ 타는 것을 전송하려고 니가타까지 갔지만, 조직의 비판대상인 나는 면회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많은 동아리 친구들이 조국을 믿고 ‘귀국’했지만 인편에 전해오는 소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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