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실공히 국내 3대 영화제 중 하나인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조직위원장 우범기, 공동집행위원장 민성욱?정준호)가 5월 1일부터 10일까지 열흘간 전주 영화의 거리를 비롯한 전주시 일대에서 열린다. 전주국제영화제는 출범 초기 한국영화계에 ‘디지털’이라는 화두를 던졌고, 이후 디지털이 보편화되자 ‘독립영화’와 ‘대안영화’의 산실로 변화를 모색했다. 어느덧 스물다섯 청년이 된 전주국제영화제는 작년에 이어 올해 역시 ‘우리는 늘 선을 넘지’라는 슬로건으로 영화의 경계를 종횡무진 넘나들 예정이다.

 

올해 출품작은 무려 2,260편으로 역대 최다 기록을 경신했다.(국내 1,513편, 해외 747편) 코로나 팬데믹으로 국내외 영화계가 위축됐음에도, 영화인들의 창작 열정은 사그라지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이중 전주국제영화제 심사위원단이 최종 선정한 영화는 43개국 232편이다. (국내 102편, 해외 130편)

 

국제경쟁, 한국경쟁, 한국단편경쟁, 코리안시네마, 월드시네마 섹션 외에도 즐길 영화는 풍성하다. 작품성과 대중성을 겸비한 영화를 만나는 ‘시네마천국’, 주류 영화산업계의 경직성을 벗어난 ‘영화보다 낯선’, 뱀파이어?빙의 등을 소재로 한 장르물 ‘불면의 밤’, 러닝타임 252분짜리 영화에 도전할 수 있는 ‘시네필전주’ 등이다. 진구, 공승연 등 바로엔터테인먼트 대표 배우와의 만남을 비롯해 디즈니?픽사의 이벤트, 전주대담, 마스터클래스, 영특한클래스, 전주톡톡도 즐길 수 있다. 5월 첫주, <KNOU위클리>를 펼쳐들고 전주로 떠나볼까?

윤상민 기자 cinemonde@knou.ac.kr

 

개막작 「새벽의 모든」: 월경증후군 여자와 공황장애 남자가 만났다!
폐막작 「맷과 마라」: 두 남녀는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제25회 전주국제영화제가 선택한 개막작은 세계 영화계가 주목하는 일본 작가 미야케 쇼 감독의 신작 「새벽의 모든」이다. 세오 마이코 작가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후지사와(가미시라이시 모네)는 매월 한 번씩 월경증후군(PMS) 증상으로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다. 어느 날 회사 동료 야마조에(마쓰무라 호쿠토)의 별 것 아닌 행동에 짜증이 솟구쳐올라 분노를 폭발시켰다. 그런데 알고 보니, 야마조에는 공황장애 치료를 받는 중이다. 각기 다른 증상이지만 서로의 아픔을 확인한 두 사람 사이에 마치 동지 같은 특별한 감정이 싹튼다.

 

미야케 쇼 감독은 전작 「너의 새는 노래할 수 있어」(2019)와 「너의 눈을 들여다 보면」(2022)로 한국 관객에게 이름을 알렸다. 16mm 필름으로 촬영한 「새벽의 모든」에서는 아날로그적 감성, 각각의 목소리가 부여된 일상의 사운드, 섬세한 빛의 흐름 등 미야케 쇼 감독의 ‘시그니처’라 할만한 요소들이 오롯이 담겨 있다.

 

문석 프로그래머는 “넓지 않은 공간과 시간을 배경으로 함에도 그 세계가 결코 소소하게 느껴지지 않는 아름다운 영화다. 전반부에서 인서트샷으로 계속 보이는 아름다운 밤 풍경은 우주의 현현처럼 보이고, 영화는 소소한 일상에서 후반부에 우주에 관한 이야기로 확장한다”라고 설명했다. 미야케 쇼 감독은 제20회 전주국제영화제에 이어 두 번째 전주 방문이다.

 

폐막작은 캐나다 영화 「맷과 마라」(감독 카직 라드완스키)로 제74회 베를린영화제 경쟁부문에도 초청된 작품이다. 문학계에서 일하는 맷(맷 존순)과 마라(데라 캠벨)는 오랜만에 재회한다. 둘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긴장감. 과거 둘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일어날 수도 있었지만, 결코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 이번에는 일어날까? 과연 두 남녀는 우정을 넘어 사랑으로 향할 수 있을까?

 

끈끈한 유대감을 자랑하는 캐나다 독립영화계에서 제작된 「맷과 마라」는 기존 독립영화가 꺼리는 ‘로맨틱 코미디’ 장르로 과감하게 들어간 영화다. 문성경 프로그래머는 “사랑은 타이밍만의 문제일까? 많은 좋은 영화가 그렇듯 「맷과 마라」는 모든 인물에 공감할 수 있게 하고, 제작 형식과 장르의 특성을 너머 우리 시대의 관습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예술이 해 온 논리와 언어로 분류할 수 없는 인간 삶에 대한 탐구, 정의할 수 없는 관계에 대해 이야기한다”라고 폐막작 선정의 이유를 설명했다. 마라 역의 데라 캠벨은 이번 전주국제영화제 ‘국제경쟁’ 부문 심사위원도 맡았다.

 

상업영화계 떠난 대만 영화 거장 차이밍량 감독,
10년에 걸친 ‘행자 연작’ 전편 최초 공개
작년 전주국제영화제를 찾은 거장은 벨기에의 다르덴 형제 감독이었다. 올해 전주를 찾는 거장은 차이밍량 감독이다. 허우샤오셴, 에드워드 양 감독과 함께 대만 예술영화를 대표하는 그는 「애정만세」(1994)로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며 일약 세계적인 감독으로 주목받았다. 전주국제영화제와는 2001년 「디지털 삼인삼색」의 한 편인 「신과의 대화」로 인연을 맺었다. 하지만 상업적인 방식으로 영화를 만드는 것에 회의를 느끼고 2013년 「떠돌이 개」를 남긴 채 영화계를 떠났다.

 

왜 영화는 극장에서만 상영돼야 하는가? 도대체 영화란 무엇인가? 영화는 어떻게 만들어져야 하는가? 그렇다면 나는 어떤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가? 지난 10여 년간 그의 머리를 맴돈 질문들이다. 현대 도시의 고독감이 강조되는 영화를 시나리오, 플롯 없이 만들기로 결심한 그는 ‘행자(行者)’ 시리즈를 시작했다. 행자는 중국 고전 『서유기』에 등장하는 삼장 법사에게서 영감을 얻었다. 차이밍량 감독은 기차도, 자동차도 없던 시절 삼장법사가 두 발로 걸어서 사막을 건너야 했던 모습을 상상하며 행자의 이미지를 구체화했다.

 

붉은 승복을 입은 행자, 배우 이강생이 맨발로 타이베이를 시작으로 홍콩, 말레이시아 쿠칭, 대만 북부 주앙웨이, 파리, 마르세유, 도쿄를 거처 워싱턴 DC까지 느리게 걷는다. 2012년 「무색(無色)」부터 시작해 2024년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공개된 열 번째 작품 「무소주(無所住)」까지 이어진 ‘행자 연작’ 10편을 동시에 공개하는 건 전주국제영화제가 최초다. 차이밍량 감독과 그의 페르소나라 할 수 있는 이강생 배우가 함께 한다.

 

문성경 프로그래머는 “삼장 법사는 여행이 금지됐던 시기에 산스크리트어로 쓴 불경을 자기 눈으로 보기 위해 사막을 건너 서역으로 갔다. 기존 시스템에 대한 저항과 함께 자신의 신념을 실천했다는 점에서 충격적이다. 차이밍량 감독의 10년 실험의 결과물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확인해보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J스페셜: 올해의 프로그래머’ 허진호 감독이 뽑은 5편
유지태 배우와 「봄날은 간다」 함께 볼까?
전주국제영화제는 4년 전부터 국내 배우, 감독 1명을 선정해 영화제 속 작은 영화제의 프로그래머로 위촉해 왔다. ‘J스페셜: 올해의 프로그래머’로 선정되면 5편의 영화를 골라 관객과 함께 보고 대화할 수 있다. 올해는 데뷔작 「8월의 크리스마스」(1998)로 수많은 관객을 울린 허진호 감독이 프로그래머로 선정됐다.

 

5편 중에서 2편은 자신의 영화 「봄날은 간다」(2001)와 「외출」(2005)를 골랐다. 이번 영화제에서 ‘국제경쟁’ 부문 심사위원으로 참석하는 유지태 배우가 「봄날을 간다」를 함께 감상하고 관객과 영화에 얽힌 이야기를 나눌 예정이다.

 

나머지 3편은 지금의 허진호 감독을 만든 영화들이다. 먼저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으로 극장에서 혼자 본 영화 「바보들의 행진」(감독 하길종, 1975)이 있다. 허 감독은 “동시상영관에서, 청소년관람불가영화를 어떻게 보게 됐는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억압의 시대를 사는 청년들의 우울과 허무보다 하길종 감독이 유쾌하게 묘사한 캠퍼스의 자유와 낭만에 더 큰 인상을 받았다”라고 회고한다.

 

두 번째 영화는 「파리, 텍사스」(감독 빔 벤더스, 1987)다. 허 감독은 “군 제대 후 나스타샤 킨스키가 출연한 야한 영화인 줄 알고 봤는데, 이 영화에서 영화만이 부릴 수 있는 마법이 있음을 느꼈다”라고 말했다. 마지막 영화는 파리 유학 시절 봤던 「동경 이야기」(감독 오즈 야스지로, 1953)다. 허 감독은 이 영화에서 이미지가 이야기를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고 고백했다.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 「외출」(2005), 「행복」(2007), 「호우시절」(2009), 「덕혜옹주」(2016), 「천문」(2019) 등 만드는 영화마다 관객의 사랑을 받아온 허진호 감독의 영화 세계에 영향을 끼친 영화들이 무엇인지 궁금하다면, 또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허진호 감독과 함께 나누고 싶다면 이번 ‘J스페셜: 올해의 프로그래머’를 추천한다.

 

‘다시 보다: 25+50’ 전주국제영화제와 한국영상자료원 공동기획
「오! 수정」부터 고 김수용?이두용 감독 영화를 스크린으로!
전주국제영화제 25회, 한국영상자료원 창립 50주년이 되는 올해를 기념해 10편의 영화를 상영하는 특별전을 공동 기획했다. 그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공개해 큰 반향을 모았던 영화 4편과 한국영상자료원이 창립 50주년을 맞아 선정한 1950년대 한국영화 걸작 리스트 ‘50/50’에서 4편 그리고 지난해 12월과 올해 1월 각각 타계한 김수용 감독과 이두용 감독의 대표작 1편씩, 모두 10편을 최신 기술로 복원해 디지털화 버전으로 상영한다.

 

특별전을 통해 선보이는 전주국제영화제 역대 상영작 4편에는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 개막작이었던 홍상수 감독의 「오! 수정」(2000), 봉준호 감독의 「플란다스의 개」(2000), 류승완 감독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2000), 정지우 감독의 「사랑니」(2005)를 선정했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선정한 4편은 놓치지 말아야 할 수작들이다. 4K 디지털로 복원돼 큰 스크린에서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먼저 한국 최초 여성 감독인 박남옥 감독의 데뷔작인 「미망인」(1955)은 한국 전쟁 당시 미망인의 삶을 다루고 있다. 당시로선 파격적이라 불릴 정도로 여성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는 평을 받았지만, 영화에 표출된 여성의 욕망이 시대적 한계 안에서 작동한다는 지적도 함께 받았다.

 

두 번째 작품은 이강천 감독의 「피아골」(1955)이다. 휴전 이후 지리산 피아골에 잔존하던 빨치산 부대 이야기를 다루며, 피비린내 나는 소재를 휴머니즘으로 승화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개봉 당시에는 ‘용공영화’로 몰려 상영이 취소되는 해프닝도 있었다. 세 번째 작품은 한국 리얼리즘 영화의 모범으로 불리는 김소동 감독의 「돈」(1958), 마지막 작품은 한국 영화사에서 가장 강력한 팜므파탈 ‘쏘냐’로 분했던 최은희의 대변신이 눈부신 신상옥 감독의 「지옥화」(1958)다.

 

고 김수용 감독의 영화 중에는 「안개」(1967)를 상영한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이 원작이다. 고 이두용 감독의 「피막」(1981)도 눈길을 끈다. 한 양반가 장남의 병에 차도가 없자 전국 각지의 용한 무당이 모여들고, 이중 한 무당이 장남의 저주가 호리병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하면서 피맺힌 원한과 복수가 뒤얽혀진다. 한국 고유의 샤머니즘이 어우러지면서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2024년 한국영화계를 강타한 오컬트 영화 「파묘」(감독 장재현, 2024)와 비교해 보는 재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