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4·19혁명 60주년 특별기고

 4월 18일 고려대 학생들이 민주항쟁의 의거로 피를 흘리며 종로5가 시장 골목을 지나가던 모습을 가정교사 하던 3층집에서 직접 목도하고는 나는 큰 충격에 빠졌다. 우리는 모두 어깨동무를 하고 남대문과 덕수궁을 거쳐 중앙청 앞으로 달려갔다. 우리의 얼굴과 몸은 벌써 땀으로 온통 젖어 있었다. 중앙청 앞에서 서울대 문리대생과 법대생들, 동성고 학생들과 합류해 “경무대로 가자!”는 외침 소리에 따라 통의동 파출소 쪽으로 돌진했다.   4·19혁명 60주년을 맞아 한국 고고학계의 원로인 이융조 (재)한국선사문화연구원 이사장(충북대 명예교수)이 <KNOU위클리>에 ‘특별기고문’을 보내왔다. 1960년 4월 19일 연세대 2학년 신분으로 현장에 섰던 이 대학생은 세월이 흘러 한국 고고학계의 중진이 됐고, 이후 한국 고고학계의 성과를 세계무대에 소개하는 데 앞장섰다. 이제는 보통명사처럼 일반화됐지만, 4·19는 여전히 ‘젊은 혁명과 꿈’의 사건으로, 민주주의의 기억으로 소중히 간직할 역사 공간임에 틀림없다. 한 노학자의 회고를 통해 4·19의 의미를 공유해본다.   공주(공주사범학교 졸)에서 학교를 다니던 때, 연세대 사학과에 유명한 홍이섭 교수님이 계시다는 말씀을 듣고 나는 급기야 인생의 항로를 바꾸었다. 서울로 올라왔지만, 모든 것은 낯설었고 생활은 어려움의 연속이었다. 가정교사로 학비를 충당해야 했기에 누구보다 시간을 효율적으로 관리해야 했다. 캠퍼스의 낭만 같은 것은 일찌감치 ‘도서관 생활’로 대신해야 했다. 1학년 때에는 주로 도서관 2층에 자리잡았지만, 2학년이 되면서 1층 열람실에 자리를 정해 놓고 거의 출근하다시피 했다. 친구들은 나를 만나려면 도서관으로 찾아와야 했다. 강의 후 거의 모든 시간을 도서관에서 지냈는데, 오늘날까지 깊은 사귐을 갖게 된 이형행(교육학과), 임철규(영문학과), 이은호·안병영(정외과), 박승원(철학과), 정규중(사학과), 김보환(행정학과) 등은 이때 매일 만나던 좋은 선배와 친구들이었다.  신촌에서 중앙청 앞까지 1960년, 2학년에 올랐지만 ‘3·15 부정선거’로 시국은 점차 불안해져 가고 있었다. 고등학생 김주열의 죽음으로 야기된 ‘마산 의거‘가 기폭제가 되어 시국을 걱정하는 많은 움직임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었다.연세대 총학생회에서도 당시 <씨알의 소리>와 <사상계>를 중심으로 대학생들의 정신적 지도자 역할을 하고 있던 함석헌·장준하 선생을 3월 채플 시간에 초청해 ‘꿈틀거리는 민족이어야 산다’라는 주제로 자유민주주의와 자주정신의 중요성을 고취하기도 했다.4월 18일 고려대 학생들이 민주항쟁의 의거로 피를 흘리며 종로5가 시장 골목을 지나가던 모습을 가정교사 하던 3층집에서 직접 목도하고는 나는 큰 충격에 빠졌다. 이튿날인 4월 19일 오전부터 학교 도서관에 있던 우리에게도 “모든 학생들은 채플 시간에 강당 앞으로 나오라”는 연락이 돌았다. 이때 나는 박승원(당시 철학과 2년, 현 천주교 부산교구 원로신부)·양정성 학우(당시 화학과 2년, 현 경남대 명예교수)와 함께 책가방을 도서관에 내려놓고 교내 시위에 참가했다. 12시 채플 시작과 함께 학생회 간부들이 “나가자!”라고 외치자 많은 학생들이 스크럼을 짜고 신촌 로터리를 거쳐 이화여대 앞에 가서는 “나와라!”라고 소리치기도 했다. 여세를 몰아 서울역으로 달려가니 이미 흑석동과 청파동에서 온 중앙대생·숙대생들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하니 큰 박수와 함께 “가자!”라는 거대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우리는 모두 어깨동무를 하고 남대문과 덕수궁을 거쳐 중앙청 앞으로 달려갔다. 우리의 얼굴과 몸은 벌써 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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