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송대 문화교양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인 40대 A학우는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는 열정이 그나마 남아 있어 행복하다”며 그동안 자신의 삶은 경쟁의 연속이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10대는 좋은 대학에 입학해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살았고, 20·30대에서는 바늘구멍 같은 취업 관문을 통과해야 하는 최악의 경쟁을 경험했다”고 한다. 50대인 남편이 어느날 회사에서 쓰러지고 난 후 그녀도 한동안 멍했다. “지금까지 의욕적으로 열심히 살았던 것이 무의미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남편은 직장 내 생존 경쟁과 스트레스로 번아웃을 경험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 가족을 쓰러뜨릴 수 있는 번아웃. 번아웃은 무엇이며 그것은 대체 무엇으로 우리의 열정을 사그라뜨리는가?
번아웃은 질병이다?
‘번아웃(burnout)’은 ‘타버리다, 소진하다’라는 뜻으로, 통상적으로 번아웃 증후군(Burnout Syndrome)’을 줄여서 부르는 말이다. 정신적·신체적 피로로 인해 무기력해지는 증상을 뜻하는 심리학 용어로 탈진 증후군 또는 연소 증후군, 소진 증후군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 용어는 1974년 심리학자 프뤼덴버그가 처음으로 사용한 후 일반화됐다.
번아웃 증후군이 심해질 경우 수면장애, 우울증 같은 증상뿐 아니라, 과도한 소비를 하거나 술에 의존하는 등 자신에 대한 통제력을 잃게 될 수 있다. 심한 무기력과 허무감을 느껴 출근을 거부하거나 갑작스럽게 퇴사하기도 한다. 단순한 슬럼프와는 달리 가정과 사회 생활에 영향을 끼치기도 하고 최악의 경우 충동적인 자살이나 돌연사로 이어지기도 한다.
문제가 이렇게 심각해지자 지난해 세계보건기구(WHO)는 번아웃을 질병으로 분류했다가 보험업계 등의 반발을 사 정정한 해프닝이 있었다. 그렇다고 WHO가 직장인들의 스트레스에 대한 관심까지 유보한 것은 아니다. WHO가 제11차 국제질병표준분류기준(ICD-11)에서 번아웃 개념을 “성공적으로 관리되지 않은 만성적 직장 스트레스”로 규정해 질병으로 분류하지는 않는 대신 직업 관련 증상으로 포함시켰다. 이는 제10차 버전보다 내용이 구체적이다. WHO는 10차 버전에서 번아웃을 ‘생활 관리에 곤란을 겪는 문제’ 중 하나로 ‘활력 소진 상태’라고 좀 더 광범위하게 규정한 바 있다.
전문가들은 WHO가 입장을 바꾼 이유에 대해, 번아웃을 질병으로 인정할 경우 의료기관이나 보험업계가 이를 공식적으로 치료하고 관리하기 위한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에 질병 분류 기준 개정 적용까지 유예기간을 둔 것으로 보고 있다. WHO는 번아웃의 특징을 세 가지로 발표했다. ①에너지 고갈이나 소진(탈진)의 느낌 ②일에 대한 심리적 괴리(의욕과 동기의 결핍, 무력감, 좌절), 또는 일에 관한 부정적, 냉소적 감정의 증가 ③업무 효율 저하다.
그렇다면 번아웃의 원인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많은 시간을 일에 몰두했지만 기대한 보상을 얻지 못하고 좌절감을 느끼는 수험생의 경우, 위험하거나 전문성이 필요한 까다로운 작업을 연속적으로 해야 하는 경우, 고객 요구를 친절한 태도로 일일이 끊임없이 응대하는 경우 등 그 사례는 끝이 없다. 그럼에도 맡은 업무(공부)를 하지 않을 수는 없다. 더 좋은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직장 내에서 도태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공부를 그만두거나 퇴사를 할 수도 없다. 미래와 생계가 막막하기 때문이다.
“당신 말고도 일할 사람 줄 서 있어!”
직장 생활을 하다보면 ‘일할 사람은 내 방 앞에 줄지어 서있다’는 뉘앙스를 느껴본 사람이 많을 것이다. 내가 일을 잘 못하면 언제든 새로운 사람이 내 자리를 대체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불안감에 시달린다. 회사는 단기간 최대한의 능력을 뽑아내고, 튕겨나가면 다음 구간을 질주할 새로운 사람으로 대체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야근을 해서라도 업무를 수행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야근=성실성’의 공식이 성립됐다. 회사에 오래 머물며 상사 눈에 자주 띄어야 인정받을 수 있다. 자유 시간을 최대한 확보하려는 노력에 대해 ‘빠졌다’ ‘게으르다’ ‘이기적이다’라고 비난 한다. 상사로부터 거친 말을 들어도 복종하고 감내해야 한다. 업무와 동일화 하지 않으면 도태되기 때문이다. 경제 성장을 주도했던 베이비붐 세대는 가정을 포기하다시피 하며 일에 매진했다. 가정에 소홀해도 야근하는 가장에 관대했다.

재가 돼 흩어져버린 열정
국민대통합위원회의 「한국형 사회갈등 실태진단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의 무한경쟁 환경이 국민의 신체·정신적 에너지를 탈진 상태로 이끌고 있다고 분석한다. 사회 발전의 동력이었던 경쟁이 ‘소모적 경쟁’으로 심화하면서 내부에 쌓이는 피로감이 위험수위에 도달했다. 경쟁 환경이 전 세대에 걸쳐 끝없이 반복되는 탓에 피로감이 극도의 탈진을 촉발시키고, 일을 계속 추진할 수 있는 열정을 사그라뜨리게 만든다.
눈에 띄기 위해 야근을 하다 보니 행복도도 떨어진다. 최근 10여 년 간 OECD의 통계를 보면 한국인의 행복지수는 하위권에 머물고 있다. 오래 일하지만 생산성은 낮고 피로만 쌓인다. 가족과 서먹해지고 자기개발은 남의 이야기일 뿐이다. 전문가들은 장시간 근로와 상사 눈도장 찍기로 인정받으려는 ‘한국형 성공 공식’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총 노동시간을 줄이고 정시퇴근을 안착시켜 업무시간 내 집중도를 높여 일과 삶의 균형을 찾아줘야 조직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는 것이다.
프랑스에 본사를 둔 외국계 기업에 다니는 30대 직장인 김주호 씨는 “한국인의 근면성이 경제를 일으켰다는 국제적 평가에 자랑스러웠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저성장을 보며 진정한 행복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고 한다. 그는 “프렌디(Friend+daddy·친구 같은 아빠)가 돼 가족과 함께 휴가를 즐기는 것이야 말로 소소하지만 진정한 행복”이라며 “일할 때 확실하게 하고 또 쉴 때 확실하게 쉬는 문화가 정착돼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주 52시간 노동을 환영한다고 밝혔다.
일본 미라이공업은 하루 정해진 근무 시간 7시간 15분을 지켜야 한다. 법정공휴일 외 연간 휴가일수는 120일이나 된다. 그렇지만 미라이공업의 특허와 실용신안 건수는 직원이 수백 배나 많은 소니와 도시바를 한참 앞선다. 생산성 향상과 눈부신 조직성과는 오래 일한다고 달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경쟁력은 짧은 근무 시간에 집중해 창의성을 발휘하는 열정적인 직원으로부터 나온다. 휴식을 통해 연료를 공급하지 않는다면 열정을 계속해 불태울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