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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요즘 과거를 곧잘 반추하는 습관이 생겼다. 특히 코로나 사태로 인해 온 국민이 집콕 또는 사회적 거리 두기 운동에 동참하는 분위기여서 유난히 그런 회고성 성찰에 빠지는 것 같다. 어쩌면 지난 세월 동안 잘못 살아 온 것은 아니한가 하는 열패감 따위에 휩싸여 지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1972년 삼수(三修) 끝에 서울대 병설 초급 전문대학 과정으로 한국방송통신대학이 개교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행정학과에 입학 원서를 접수했지만 낙방하고 말았다. 마침 현역병 입영 영장이 나와 있던 터라 그해 3월에 입대할 수밖에 없었으니,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1975년 전역 하고 그해 여름에 실시된 서울시공무원 행정직 5급 을류(지금의 9급에 해당)시험에 합격해 공직에 입문했다. 이후에 개교 당시의 아픈 기억 때문에 방송대마저 쉬이 입학할 수 없겠거니 지레 짐작하고 대학 진학을 포기한 상태로 결혼도 하고 생활인이 되어 삶의 가파른 현장에 내몰리고 말았다.

 

그러던 중 큰딸이 자라 초등학교에 입학할 즈음이 되자, 혹시 저 아이가 성장해 아빠는 어느 대학을 졸업하셨나요?”라고 묻기라도 한다면 과연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마치 행운의 여신께서 돕기라도 하듯 방송대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왔다. 학업 기회를 놓친 현직 공무원들 가운데 방송대 입학을 원하는 이들을 지원하는 정부위탁장학생 특별 입학 전형 제도가 생긴 것이다. 시청 실무자가 학과마다 입학 정원의 5% 이내로 뽑을 수 있다고 안내했다. 나는 그 길로 달려가 입학 원서를 제출했다.

 

다른 공무원들은 행정학과나 법학과를 지원했지만 나는 주저하지 않고 다른 학과를 선택했다. 마침 1990년 베이징에서 아시안게임이 열리기로 되어 있어 중국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던 때였다. 기꺼이 중국어과(1990년 중어중문학과로 개칭)에 응시, 당당히 합격하는 기쁨을 만끽했다. 그 때의 감격을 어찌 필설로 다 표현할 수가 있을까.

 

1986학년도에 입학한 중국어과는 당시 3학년이 최고 학년일 만큼 신생학과였기 때문에 학습 의욕들은 왕성했지만 여러 측면에서 아쉬운 점도 많았다. 1회 졸업생 101명이 배출됐던 1989학년도에 나는 4학년에 진학하면서 학과 총학생회장으로 뽑혀 만학도로서 학업보다는 학생회 활동이 주가 될 만큼 생활패턴이 크게 바뀌게 됐다. 낮에는 공무원, 밤에는 학생회장이 되어 학과로서의 면모를 제대로 갖춘 원년(元年)’을 선언하고, ‘전국적인 공동체 구축작업에 적극 나섰다.

 

이후 중어중문학과 총동문회장을 3회 역임했고, 서울지역총동문회장(2002~2003)을 지냈으며, 20076월에는 ‘I LOVE 방송대1회 방송대와 국민이 함께하는 마라톤축제를 창설, 초대 조직위원장을 맡아 봉사할 수 있었다. 이 마라톤 대회의 성공적인 개최로 무너져 있던 전국총동문회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어 재건된 제20(2008~2009)에서 수석부회장을 맡았다. 청년시절부터 시작된 방송대 활동은 마치 숙명이나 되는 것처럼 2011년 말 정년퇴직할 때까지 줄기차게 이어져 왔으니, 어찌 방송대의 역사가 내 삶의 궤적 전부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나는 올해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고 하는 뜻깊은 세월을 살고 있다. 정년퇴직한 지도 어언 9, 마치 인생을 관조하기라도 하듯 방송대와 나의 지난날들을 되돌아보며, 국민의 대학으로서, 남북통일의 초석을 다지는 민족의 대학으로서 웅비의 나래를 활짝 펼쳐 나아가기를 간절히 염원하며, 방송대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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