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브라질 시민단체는 자국 대통령을 집단학살 혐의로 국제형사재판소(ICC: International Criminal Court)에 고발했다. 코로나19를 ‘작은 독감’ 정도로 치부해 안일한 대응으로 국민의 생명권을 무시하고 8만 명 이상을 죽게 방치·방관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집단학살이란 무엇인가? 사법적 심판과 함께 역사의 법정에 올릴 수는 없을까?
위클리 58호 커버스토리는 815와 제노사이드를 주제로, 1면에서는 ‘집단학살’이라는 용어가 등장하게 된 배경과 법적 처벌의 의미를 살펴본다. 2면에서는 일제가 자행한 대량학살 중 하나인 경신참변을, 3면에서는 암흑의 시기에도 살아 있는 양심으로 조선인의 생명을 구한 일본판 ‘쉰들러’ 하야시 부자(父子)의 이야기를 들여다본다.
1944년, 신조어 제노사이드 등장
집단학살(genocide)이란 무엇인가? ‘학살(虐殺, massacre)’은 한자어로 풀어보면 가혹하게 마구 죽인다는 뜻이다. 학살은 인류 역사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돼 왔던 행위다. 집단학살도 유사 이래 자행되던 비극적인 행위인데, ‘집단학살(홀로코스트 Holocaust)’이라는 용어 자체가 세상에 등장하게 된 것은 나치의 유태인 학살 때문이다. 특히 제노사이드라는 단어는 1945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처음으로 공식 언급됐다. 그러나 기소 내용에 포함된 집단학살은 나치의 학살을 설명하기 위한 용어일 뿐 법률 용어로 쓰였던 것은 아니다.
집단학살은 특정 집단을 절멸시킬 목적으로 행해진다. 일반적으로 종교, 인종, 이념, 보복 등의 원인으로 발생한다. 법률학자인 라파엘 렘킨(Raphael Lemkin, 1900~1959)은 1944년 출간한 저서『주축국 유럽 점령지 통치』에서 대량으로 행해지는 학살의 특징을 밝히면서, ‘집단학살’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했다. 그리고는 국제법으로 집단학살을 범죄 행위로 규정할 것을 제안했다. 이후 국제적 합의의 결과로서 1951년 집단학살의 예방과 처벌에 관한 UN협약이 시행됐다.
국가폭력 더 엄격하게 심판해야
법이 생겼다고 해서 집단학살이 멈춘 것은 아니다. 1994년 4월부터 약 100일 간 아프리카 르완다에서 80만~1백만 명으로 추정되는 시민들이 학살당했다. 이는 르완다 전체 인구의 약 20%에 육박하는 수치였다. 이것은 다수의 피지배계급인 후투족과 소수 지배계급 투치족간 갈등 때문이었는데, 후투족 무장 세력들은 몰려다니며 투치족을 찾아내 살해하고 시체를 길거리와 골목에 아무렇게 방치했다.
1992년부터 3년간 치러진 보스니아 내전에서도 집단학살이 일어났다. 이 학살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최악의 대학살로 기록됐는데, 구 소련연방 해체와 맞물려 유고연방이 쪼개지는 과정에서 종족 간 ‘인종 청소’로 촉발됐다. 약 20~25만 명의 사라예보 시민이 무차별 포탄에 희생됐다. 또 스브레니차 마을에서는 15세 이상 남성 8천여 명이 살해되는 끔찍한 집단학살이 발생하기도 했다.
르완다 집단학살에 관여한 장 폴 아카이수 타바 시장은 1998년 국제형사재판을 통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것은 집단학살의 예방과 처벌에 관한 UN협약에 의한 최초의 판결이다. 보스니아 내전 중 스브레니차 마을의 학살을 주도하고 명령한 믈라디치 사령관도 재판을 받았다. 1995년부터 6년간 도피생활을 하다 체포된 후 2017년에 이르러서야 집단학살에 대한 범죄 혐의로 국제형사재판소로부터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아직 법의 정의가 구현되지 않은 집단학살도 많다. ‘부인-왜곡-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진상규명’ 때문이다. 국내에서도 국가권력에 의한 폭력적 학살이 한국전쟁 이후 이어졌다. 특히 5·18 민주화운동의 집단학살 책임자로 지목되는 대한민국 11~12대 대통령은 재판에서 학살과 자신의 관련성에 대해 ‘모르는 일’이라고 부인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 1965년 인도네시아에서 일어난, 약 1백만 명의 희생을 가져온 집단학살은 50여 년이 넘도록 진상 규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그래서인지 학살을 주도한 ‘판차실라’라는 조직은 현재에도 국가 행사에 초대받는 국민영웅 집단으로 추앙받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진상규명을 위해 만든 피해자들의 모임은 여전히 숨어서 활동하고 있다.
인류사를 집단학살로 얼룩지게 한 국가나 집단, 거기에 참여한 개개인의 죄를 심판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옌스 롬멜 독일 나치범죄중앙사무국장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75년이 흐른 지금도 독일이 나치 범죄자들을 추적하는 것의 의미에 대해 “범죄는 반드시 처벌받는다는 사실을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에게 각인시키기 위해서”라며 심판은 “잘못된 과거사를 바로잡자는 목적도 있지만, 언제 다시 일어날지도 모르는 집단학살과 같은 반인륜적 국가폭력이 반복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집단학살에 맞섰던 ‘쉰들러’들
1938년 영국인인 니콜라스 윈턴은 크리스마스를 맞아 스위스 여행을 계획했다. 그러나 난민수용소에서 일하던 친구의 요청을 계기로 나치에 희생될 뻔했던 유태인 아이들 699명을 구출한다. 은행가였던 그는 나치의 위협에 아랑곳하지 않고 체코에 사무실을 열었다. 사재를 털어 나치 장교에게 거액의 뇌물을 주고 수용소에 갇혔던 아이들을 빼내 영국으로 입양 보내는 데 성공한다. 윈턴은 50년 동안 이 일을 밝히지 않았는데, 그의 아내가 다락방에서 윈턴의 구출 작전과 관련된 스크랩북을 찾으면서 ‘영국의 쉰들러’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예술계 쉰들러’도 있다. 미국인 기자 베리언 프라이는 1935년 베를린 여행길에서 나치의 유대인 집단학살을 목격한다. 루스벨트 대통령 부인 엘리너에게 자금과 나치에 쫓기는 유럽 지식인 200명의 명단을 받아 그들을 나치의 집단학살로부터 탈출시킨다. 프라이가 13개월간 목숨을 걸고 구해낸 이들은 마르셀 뒤샹, 마르크 샤갈, 막스 에른스트, 한나 아렌트 등 20세기 문화사와 지성사에 한 획을 그은 이들을 포함해 약 4천여 명에 달한다.
수많은 침략과 학살 속에서도 휴머니즘을 실천한 ‘쉰들러’들은 존재한다. 올 8월 15일은 광복 75주년이다. 한·일간의 역사적 상처는 여전히 깊고 깊다. 일본이 진정한 화해를 말하고자 한다면 집단학살과 침략에 대해 침묵하고, 부인하고, 왜곡할 것이 아니라, 침략과 학살의 주체였던 ‘군국주의 일본’을 스스로 세계사의 법정에 소환할 수 있어야 한다. 세계사의 법정에는 시효가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