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도서정가제 폐지 주장’ 문제 있다

「이끼」,「이웃사람」,「강철비」,「외모지상주의」,「복학왕」… 이들의 공통점은 ‘인기 웹툰’이다. 이 인기 웹툰과 웹소설이 지금 한국 출판계에 시한폭탄이 됐다. 대형 포털이 제공하는 웹툰, 웹소설과 같은 ‘전자출판물’에 대한 할인폭을 확대해 주자는 일부의 의견이 도화선이었다. 이것은 2014년 이후 출판 시장에 정착돼온 ‘도서정가제’를 기반부터 흔들어놓기 때문에 출판계의 우려가 커질 수밖에 없다.
2019년 10월, 청와대 국민게시판에 이 ‘도서정가제’를 폐지하자는 국민청원이 올라와 논란을 일으켰다. 어디서나 쉽고 싸게 책을 살 수 있게 하자는 주장이다. 최근 ‘전자출판물’의 할인폭을 확대하는 정부 추가 개선(안) 제출이 ‘타이밍’에서도 의혹을 사는 부분이다.



과열 경쟁 막으려 도입한 ‘도서정가제’
현행 도서정가제는 온-오프라인 서점의 과열 경쟁을 막기 위해 2014년 개정, 도입됐다.  ‘3년마다 재검토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이 작업은 민관협의체 즉, 정부와 출판계가 머리를 맞대고 함께 진행했다. 2017년 한 차례 검토를 통해 ‘제도 유지’로 가닥을 잡았으니, 3년차인 올해는 도서정가제 유지 여부를 다시 결정해야 한다. 개정 시한은 오는 11월이다.
지난 1년 동안 이해당사자들이 모여 협의를 하고, 합의안에 거의 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느닷없이 ‘추가 개선(안)’이 날아온 것이다. ‘전자출판물 할인율 20~30%로 확대’한다는 것인데, ‘연재 중인 웹 기반 콘텐츠는 완결 전까지 도서정가제 적용을 유예’한다는 안이다.
그러자 한국 출판계의 한 축인 ‘한국출판인회의’는 8월 6일 ‘정부의 도서정가제 보완 개선 합의안 파기에 대한 한국출판회의 입장문 발표’를 내놓으면서 크게 반발하고 나섰다. 대한출판문화협회, 한국대학출판협회 등 출판단체뿐만 서점가에서도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지역 서점 조합원 50여 명이 도서정가제를 유지해야 한다는 호소문을 돌린 것도 직접적인 피해가 예상돼서다. 8월 19일 전국동네책방네트워크는 ‘도서정가제 개악을 반대하는 전국 동네책방들의 성명서’를 발표, “거짓주장으로 소비자를 호도하여 도서정가제를 폐지하려는 이들에게 엄중한 책임을” 따졌다.

 

다양성이 더욱 중요해지는
4차 산업혁명시대에
지적 활동과 출판문화의
DNA를 근본적으로 위축시키는

정책은 재고해야 한다.

 

출판계와 문화계의 비판은 9월 24일 정점에 달했다. 이날 ‘도서정가제 사수를 위한 출판·문화계 공동대책위원회’ 명의로 청와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도서정가제가 무너지면 문화국가도 무너집니다’라고 대국민 호소에 나섰다. 이들은 “청와대와 문체부는 도서정가제에 대한 범출판계의 기존 합의를 존중하고 이해하라!”고 거듭 촉구했다.
출판계가 우려하는 지점은 전자출판물 할인율 확대로 인한 출판 생태계 왜곡이다. 백원근 책과사회연구소 대표는 “전자출판물 할인율을 종이책보다 더 높이는 것은 종이책과 전자책 생태계가 연계된 출판시장 상황에서 전자책 시장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을 만들겠다는 것과 같다. 정가제를 강화해도 부족한 마당에 매체간 차별 정책까지 취하려는 것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지적하면서 “정부는 사태를 복잡하게 만들지 말고 지난 1년간 민관협의체에서 논의하고 합의한 대로 충실히 이행할 책무가 있다”고 꼬집었다.
2018년 「도서정가제 적용 등 전자책 대여관련 정책개발」(문체부)에 참여했던 출판평론가 김정명 신구대 겸임교수는 “당연히 전자출판물은 출판물이기 때문에 도서정가제를 적용해야 한다. 웹소설, 웹툰도 출판물이라고 생각한다면 도서정가제를 적용하는 게 맞다. 도서정가제 적용은 받고 싶지 않고, 출판물과 같은 취급(예를 들어 면세 등)을 받고 싶다는 건 모순이다”고 지적했다.


‘무용지물’이 된 협의 프로세스
정부의 추가 개선(안)은 내용의 문제 외에도 절차적 정당성을 결여했다는 점에서 심각한 불신을 초래했다. 민관협의체가 1년 동안 머리를 맞대고 함께 논의해 ‘협의’한 사항들을 내팽개치고, 전혀 의견수렴도 논의도 없었던 내용을 들이미는 순간, 신뢰 프로세스에 금이 간 것이다. 한 출판학자는 “이번 전자출판물 할인폭 확대는 애초 논의의 테이블에 올라와 정리된 내용이 아니다. 코로나19로 어려워진 출판계에 ‘뒷통수’를 친 것은 신뢰에 먹칠을 했다고밖에 볼 수 없다”고 비판했다.김정명 신구대 겸임교수 역시 “정부의 추가 개선안은 출판계의 1년 동안의 고민을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어서 안타깝다. 특히 출판계 이해당사자들의 합의에 반하는 내용이라면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다. 어떤 내용이든 1년여의 합의보다는 낫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고 우려했다.
물론 출판계의 이런 반응이 과장된 것 아니냐는 시선도 있다. 실제 출판계 안에서도 ‘도서정가제가 재고도서 정리 기회를 막고 있다’는 지적도 있지만, 출판 생태계라는 전체 구도 안에서 본다면, ‘도서정가제 폐지’ 주장에는 위험한 논리가 내재돼 있다.
대형 마트로부터 골목상권을 보호하기 위해 나섰던 정부가 출판산업과 관련해서는 대형 포털의 이해에 맞춰 발빠르게 대응했다는 것도 이번 ‘추가 개선(안)’이 최소한의 균형감각마저 상실한 졸속 행정으로 비쳐지게 만든다. 
책이 전부인 이들과, 그저 하나의 서비스 품목에 불과한 이들을 동등한 선상에 놓을 수는 없다. 한 출판평론가는 “웹툰과 웹소설은 빗장을 여는 역할에 불과하다. 도서정가제가 폐지되면, 출판시장은 과거 과열경쟁 구조로 되돌아가는 걸로 그치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일궈왔던 출판 생태계가 급격히 위축되고 붕괴될 수 있다”고 토로했다. 다양성이 더욱 중요해지는 4차 산업혁명시대에 지적 활동과 출판문화의 DNA를 근본적으로 위축시키는 정책은 재고해야 한다.
최근 대학로에서 공익서점을 표방해왔던 한 서점(책방)이 폐점을 알리는 글을 올려 출판 관계자들을 먹먹하게 하고 있다. 글의 한 토막이다. “만약 할인을 더 많이 한다면, 할인을 할 수 있는 서점, 할인을 할 수 있는 출판사, 할인하는 책, 할인하면 더 많이 나가는 저자만을 위한 세상이 펼쳐질 것입니다. 영세 자영업인 동네책방, 1인 출판사, 독자가 소수인 책, 첫 책을 내는 저자의 자리는 현저히 줄어들거나 사라질지도 모릅니다.”(<월간경실련>, 2020년 9~10월호)
도서정가제의 ‘할인’ 제어장치를 제거하는 순간, 출판계와 지역 서점들이 곧바로 직격탄을 맞게 된다는 우려는 과장도, 기우도 아니다. 그것은 실재하는 공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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