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2020 방송대인 독서 분투기

이 책을 읽으며 느꼈던 거부감 이면의,

어쩌면 조금은 당혹스러운  ‘홀가분함’은

남자로 살아오면서 느껴왔던 말 못할

육체적, 심리적, 감정적 고충과 난관들을

단순히 나의 개인적인 잘못으로 여기지 않고

그것을 좀 더 너른 지평 위에서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얻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결국 어떤 경우이든,

자신이 어떠한 가능성과 한계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지

직시하는 것은 곧 자신이 집착하고 있는 과거의 껍질을 깨고

새로운 자신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기 마련이다. 

 

 

일전에 아내와 남녀 간의 차이에 대해 대화를 나눈 일이 있었다. 그 때 아내는 농담 반 진담 반, 살아보니 남자란 여자가 옆에서 돌봐주지 않으면 추레해 보이기 십상이라며, 남자는 나이가 얼마나 들었든 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다고 말했다. 내가 뭐라 반박하기도 전에, 그녀는 자기주장의 근거로 무려 ‘성경’을 거론했다.

그녀의 해석에 따르면, 이브는 아담보다 더 우월한 존재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아담을 창조한 후 시험가동 하는 과정에서 찾아낸 시행착오를 개량하여 만들어진 ‘신기종’이 바로 이브이기 때문이다. 이브가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어졌다는 구절은, 이브가 아담보다 열등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해석되어야 한다. 아담의 불완전한 부분을 보충해서 더 완전하게 만들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아담과 이브를 굳이 짝 지워준 이유에 대해서는, 그분께서 보시기에 아담이 여러모로 허술하고 미덥지가 않아서, 이브가 옆에서‘관리 감독’을 해주도록 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래야 그나마 하느님이 의도한 사람 구실을 할 수 있어서라고 말이다. 나는 그녀의 이 도발적인 주장이 몹시 분했지만, 한편으론 꽤나 그럴싸해서 금방 반박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 책, 『우리의 더 나은 반쪽』을 읽어나가면서 그날의 대화가 내내 머리를 떠나질 않았다. 이 책의 저자 샤론 모알렘(Sharon Moalem)이 바로 아내와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성경이 아닌, 과학에 근거해서 말이다. 여성이 남성보다 유전학적으로 우월하다는 내용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을 읽어 내려가는 내내, 나는 책날개에 나와 있는 저자 소개를 재삼재사 훑어보곤 했다. 저자가 남자라는 것에 계속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혹시나 저자가 여성을 정치적으로 옹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 글을 썼나 싶어 저자의 경력을 찾아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경력 어디에서도 정치적·사회적 운동가로서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샤론 모알렘은 미국의 저명한 유전학자로, 수많은 임상 사례에 입각한 학문적 분석을 통해 남녀의 유전적 특성이 우리가 성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사회적 통념과 다르다는 것을 밝힌다.
여성과 남성 중 누가 더 우월한가가 개체 발생 이전의 유전적 차원에서 이미 결정돼 있다는 주장은 파격을 넘어 과격하게까지 느껴진다. 처음에는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쟁점이 과연 과학적으로 입증될 수 있는 것인지조차 반신반의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그의 주장에 다소간 반감을 느끼기까지 했다. 그것이 어딘가 ‘상식’에 반한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는 남녀의 염색체 조합의 차이가 불러오는 결과에 대한 학술적 연구에서부터 출발해 그동안 내가 상식이라 여겨왔던 고정관념을 사정없이 흔들어댔다.
널리 알려져 있듯, 남성의 염색체 조합은 XY이고, 여성은 XX이다. 그러나, X 염색체에는 1,000개의 유전자가 존재하는 반면, Y 염색체에는 불과 70여 개의 유전자만 존재한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런 유전자 개수의 차이는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남녀 간에 중대한 차이를 불러온다. 이러한 구성상의 차이는 한 개체로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유전자 여벌을 여성이 남성보다 훨씬 더 많이 갖추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염색체를 공구함에 비교해보자. 원래 사용하던 공구가 있었는데, 그것이 망가져 새로 공구가 필요한 상황이 됐다. 그러면 공구함(염색체)을 열어 고장 난 공구를 대체할 것을 구해야 한다. 그런데 XX 조합을 가진 여성의 경우 그 공구가 무려 1,000여 가지가 넘는데 반해, XY인 남성은 고작해야 70개라는 한정된 옵션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염색체의 차이는 무엇보다 생존에 큰 영향을 미친다. 남성은 여성에 비해 생존에 훨씬 불리한 유전적 조건을 감내해야 한다. 영아 사망률, 다운증후군의 발생비율, 색맹 비율, 지적 장애의 발생비율, 각종 질병 감염률에 있어서 모두 여성보다 남성의 발생비율이 높으며, 기대수명 역시 남성이 여성보다 더 짧다. 어떤 성별이 유전자 차원에서 훨씬 더 안정돼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자료 중 하나는 사망률인데, 남성과 여성을 비교하여 보면 노인 사망률과 영아 사망률 모두 남성의 비율이 높다.

40세가 되는 시점에서 여성과 남성의 인구는 거의 동일하지만 100세가 넘어갈 경우, 생존자의 약 80퍼센트가 여성이다. 110세를 넘어가면 생존자 가운데 여성의 생존 비율은 95퍼센트에 이른다. 이에 대해 남성이 여성보다 수명 단축을 부르는 위험한 행동을 하는 경향이 높다거나, 남성들의 조기 사망을 야기하는 여러 사회적 요인들을 들어 남성 사망률이 높은 이유를 설명할 수도 있지만, 남녀 간 생활상의 차이가 현저히 줄어든 현대에 와서도 사망률에 큰 변화가 없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특히 남녀를 둘러싼 외부적 조건들이 유사한 상황에서 나온 통계는 남녀 간 사망률의 차이에 유전적 요인들이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뒷받침한다.

예컨대 19세기 및 20세기 초에 유타주에 거주한 모르몬교도 관련 자료에 따르면, 전통적으로 남성들의 조기 사망을 부추기는 요인으로 꼽혀왔던 술과 담배를 종교적인 이유에서 남성들이 멀리하는 상황에서도 여성이 남성보다 더 오래 살았다. 독일에는 세속과 분리된 채 생활한 1만 1,000명 이상의 카톨릭 남녀 수도자들을 조사한 결과 여성의 생존력이 높았다는 통계도 있다.
여성의 염색체가 남성보다 생존에 유리하다는 더 확실한 근거는 영아 사망률이다. 미국의 출생성비는 여아 100명 당 남아 105명이다. 사람들은 종종 남아의 출생비율이 높은 것이 곧 남성이 여성보다 더 강한 증거라고 성급히 결론짓곤 하지만, 저자에 따르면 이것은 명백한 오류다. 출생성비에서 남성이 여성보다 앞서는 이유는, 여성의 발생 과정이 유전학적으로 훨씬 어렵고 복잡하기 때문이다. 일단 태어난 여자아이는 남자아이에 비해 생존력이 더 강하다. 신생아 집중치료실에 전염병이 휩쓸고 지나갈 때, 남자아이가 여자아이에 비해 더 빨리 감염되며 훨씬 더 심각하게 앓는다. 유전학적으로 여성의 면역계가 남성에 비해 더 강력하게 설계됐기 때문이다. 1929년 251명의 신생아가 결핵균에 오염된 ‘뤼베크 참사’때도 죽은 신생아 중 대다수가 남자아이였다.
또한, 저자는 남성이 여성보다 지적 장애의 비율이 높은 이유도 언급한다. 유전적으로 남성은 하나의 X 염색체를 가지기에 뇌를 이루는 세포가 모두 동일한 X 염색체를 이용한다. 때문에 X 염색체에 돌연변이가 발생해도 이를 다른 정상적인 X 염색체로 대체할 수 없다. 반면, 여성의 뇌는 두 개의 X 염색체가 제공하는 유전적 정보를 이용하기 때문에 X 염색체의 한쪽에 돌연변이가 발생해도 병적인 영향을 최소화할 수가 있다. 바로 이런 차이가 자폐 스펙트럼 장애나 지적 장애, 발달지체를 비롯한 수많은 정신 질환이 유독 남성에게 편향되는 근원적인 메커니즘이라는 것이다.    
저자가 나열한 수많은 의학적 사례들을 읽어 내려가며 어쩌면 정말로 여성이 남성보다 ‘근본적’으로 우월한 존재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를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아마도 나를 포함한 많은 수의 남자들이 여성이 남성에 비해 뒤떨어진다는 통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시대가 변하고 사회 각계에서 약진하는 여성들이 점차 늘어나면서 이런 생각도 이제는 완전히 고리타분한 ‘꼰대’마인드로 여겨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나는 한사코 그런 ‘꼰대’가 아니라고 부정해 왔지만, 이 책에 드는 거부감을 의식하면서 내 무의식 깊은 곳에 오랫동안 자리 잡고 있던 관념이 완전히 바뀌지는 않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여성의 능력과 자질을 실현하는 데 있어 사회적 장애가 줄어들어 갈수록, 남성과 여성 간의 능력 차이는 없거나, 그리 크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는 듯하다. 장년에 접어든 한 남자로서 요즘 세태를 바라보며, 오히려 젊은 세대의 남성들의 전반적인 지적 능력이 점차 같은 세대의 여성들에 비해 열세가 되어가는 것이 아닌가 싶어 우려스럽기도 하다. 서점가의 주요 독자층을 비롯하여 우리 사회의 주요 문화 수요를 젊은 여성들이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더욱 그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인 내 마음 한편에 끈질기게 남아있던 마지막 보루는, 이러한 전반적인 경향은 지적인 영역에 국한되며, 여성이 남성에 비해 영원히 우세를 점하지 못할 부분도 있으리라는 생각이었다. 바로 완력, 육체적인 힘의 영역 말이다. 하지만 샤론 모알렘은 나의 마지막 보루마저도 위태롭게 만든다.
유전학적으로 남성이 여성에 비해 근육량이 많고 키와 체격이 크며 체력이 좋은 신체조건을 가지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저자의 비유에 따르면 이는 마치 단기 출력이 높은 스포츠카와 같다. 스포츠카는 단기적인 목적은 빨리 이룰 수 있지만, 연료 효율성은 낮고 유지비가 많이 든다. 반면, 여성은 하이브리드카에 비유될 수 있는데, 보다 많은 여벌의 유전자를 가진다는 것은 마치 휘발유 내연엔진과 전기엔진을 동시에 지닌 채 환경의 유불리에 따라 유연하게 바꿔 쓸 수 있는 상황에 비견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고도의 지구력과 강인한 정신력이 요구되는 과제에서는 오히려 여성이 남성을 압도할 수 있다. 대륙 횡단 레이스같이 초인적인 지구력과 스태미나를 요구하는 초장거리 경기에 도전하는 여성들이 점점 늘고 있고, 많은 여성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여성의 특성은 극한의 자연재해 상황에서의 생존 가능성에도 적용된다. 1932년과 1933년 사이에만 600만에서 800만이 죽은 것으로 추산되는 우크라이나 대기근에서도 기근 이전 우크라이나 인의 평균수명은 여성이 약 45.9세, 남성이 41.6세였는데, 기근이 지나간 뒤엔 여성의 평균수명이 약 10.9세, 남성은 7.3세로 여성이 더 끈질기게 오래 버틴 것으로 드러났다.

이쯤 되면,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는 통념이야말로 잘못된 것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여성보다 뒤떨어지는 유전자를 가진 한 남성으로서 반발심을 넘어 심지어는 약간의 자괴감까지 느끼기도 했다. 저자의 주장에 대한 반박 근거를 찾아 남성을 변호하고 싶은 본능을 억누르며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 책의 주장은 남성이라는 정체성이 겪는 곤란함을 이해하는 데 있어 하나의 열쇠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이가 들수록 세상과 인간관계로부터 오는 압력에 대처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이는 남성 혹은 여성에 국한되지 않는 인간의 보편적인 고충이겠지만, 남성들은 여성들보다 상대적으로 더 힘들어하고 더 쉽게 좌절하는 것 같다. 지하철역에서 노숙 생활을 하거나, 고시원 또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세상과 단절돼 고립된 삶을 사는 중장년의 남자들이 점점 늘어나는 이유로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남자들이 인생에서 경험하는 시련의 원인을 자기의 무능력과 불운 같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찾고, 그 시련을 혼자 견뎌내야 한다고 여기는 탓도 크지 않을까 싶다.
남성들도 생애주기별로 겪어야 하는 고유한 적응상의 과제들이 있다. 생의 특정 시기에서는 정체성을 재구성하고 내외부적인 스트레스에 대한 내성을 기르는 문제가 특히나 어렵게 다가온다. 남성들이 나이가 들수록 이러한 적응상의 과제들을 까다롭게 느끼는 원인이 유전적으로 어느 정도는 전제돼 있다고 받아들이게 되면 어떨까? 변해가는 세상에 적응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자신을 한층 편안하게 바라보며, 삶의 자세를 보다 유연하고 생산적으로 바꾸어 놓는데 기여할 수도 있지 않을까? 가령, 당면한 죽음을 도저히 이해하지도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상태로 막연한 불안을 느끼는 것보다, 그것이 그저 처음부터 정해진, 하나의 자연스러운 과정임을 수용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남은 삶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열리는 것처럼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며 느꼈던 거부감 이면의, 어쩌면 조금은 당혹스러운 ‘홀가분함’은 남자로 살아오면서 느껴왔던 말 못할 육체적, 심리적, 감정적 고충과 난관들을 단순히 나의 개인적인 잘못으로 여기지 않고 그것을 좀 더 너른 지평 위에서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얻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보니 나보다 우월한 유전자를 가진 존재로서, 어쩌면 진짜로 물가에 내놓은 아이같이 느껴질 나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아내가 새삼 고맙게 느껴지기도 했다. 결국 어떤 경우이든, 자신이 어떠한 가능성과 한계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지 직시하는 것은 곧 자신이 집착하고 있는 과거의 껍질을 깨고 새로운 자신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기 마련이다. 
그래, 남자가 약한 존재라고 인정하자. 그걸 인정하는 게 뭐 그리 체면이 깎일 일인가. 그래서 나이 들어서도 이 눈치 저 눈치 안 보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고 그로부터 위로받을 수 있다면.  

 

문명주  법학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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