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저자를 만나다

김병기 교수는 어려서부터 한문과 서예를 배웠다. 1980년에 대만에 유학해 6년 동안 중국 시학과 서예학을 연구했으며, 1999년부터 전북대 중어중문학과에서 가르쳐왔다.

중국시론과 서예론을 전공한 김병기 전북대 교수(중어중문학과)가 광개토대왕릉비문의 일부 글자들이 변조됐다는 내용을 정리한 사라진 비문을 찾아서(학고재)를 처음 출간한 것은 2005년이다. ‘속민(屬民)’과 ‘신민(臣民)’의 차이에 주목하고, 변조로 언급되는 ‘渡海波’의 원 글자를 ‘入貢于’로 추정해 문장을 새롭게 해석한 시도였다.
그러나 책이 발간된 뒤 그의 연구에 대해 학문적인 방법과 과정을 통해 반론을 제기한 학자는 없었다. 다만 단국대에 재직하고 있던 서영수 교수(현 단국대 사학과 명예교수)가 신문 인터뷰에서  “비문 전체의 내용과 여러 사료에 근거해 당시의 역사적인 정황을 파악한 상태에서 비문 해석에 접근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2018년 1월 김 교수는 모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비문 변조를 다시 강조했다. 금석학과 서예학의 방법으로 ‘일제가 변조했다’는 자신의 주장을 재차 내세운 것이다. 이에 대해 한 젊은 역사학자는 인터넷을 통해 근원적인 비판을 던졌다. 역사학계도 비를 세운 5세기 고구려인들의 의도와 욕망에 주목하고 있으며, 이런 의도와 욕망에서 본다면 비문은 강고한 적인 왜를 고구려가 격파해,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알리고자 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또한 그는 김 교수가 말하는 변조설에 대해서도 비석이 응회암인 데다 표면 굴곡이 있어서 탁본 시 획의 각도가 휘어질 수 있다고 반박하면서, ‘별로 설득력 없는 주장’이라고 비판했다.
정확한 논쟁이 형성된 것은 아니지만, 차례로 본다면 김 교수가 반론을 내놓을 순서다. 때마침 그가 증보판  사라진 비문을 찾아서-글씨체로 밝혀낸 광개토태왕비의 진실(학고재)을 출간했다. 김 교수의 주장이 ‘역사의 진실’에 부합하느냐는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그가 시도한 방식은 ‘역사해석’에 대한 다양한 생각을 열어줬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역사해석은 역사학자만의 것인가라는 질문인 셈이다.
그는 <KNOU위클리>와의 인터뷰에서 “광개토태왕비는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가장 생생한 자료다. 이 생생한 자료를 활용해 당시의 역사를 복원할 생각을 해야지 당시의 정황부터 이해하기 위해 심지어는 부실하기 그지없는 일본서기 까지 참고해 당시의 정황에 대한 추론과 가설을 세워놓고서 그런 추론과 가설에 맞춰 광개토태왕비문을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거듭 강조했다. 증보판을 출간한 김병기 교수를 서면으로 만났다.


비문의 내용 안에 이미 변조의 증거가 들어 있는데
그 증거를 보지 않고 과거의 연구 관성에 젖어
광개토태왕비문에 대해 임의적 추론을 거듭하는
학계의 현실이 너무 안타까워 연구에 나섰다.

 


‘중국시론과 서예론’이 전공이다. 2005년에 『사라진 비문을 찾아서』를 출간한 뒤 15년이 지나 다시 증보판을 냈다. 의외라고 볼 수도 있지만, 또 한편에서는 서예론의 관점에서 광대토대왕비문의 서체가 큰 관심 대상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사라진 비문’ 즉 ‘광개토대왕비문’에 새겨진 기록을 이토록 오래 추적한 까닭은 무엇인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말할 수 있다.
첫째, 합리적 의심 때문이다. 나는 광개토태왕비에 관해서라면 어떤 것도 다 관심을 가졌지만 특히 내가 관심을 가진 부분은 이른바 신묘년 기사이다. 광개토태왕비에 대한 최초의 탁본을 제일 먼저 입수한 일제는 그 탁본에 있는 구절이라면서 신묘년 기사를 다음과 같이 해석해 발표했다. 
“백제와 신라는 예부터 (고구려의) 속민(屬民)이었다. 그래서 줄곧 조공을 해왔다. 그런데 일본이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와 신라를 깨부수어 (일본의) 신민(臣民)으로 삼았다.”
광개토태왕비는 장수왕이 아버지 광개토태왕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훈적비(勳績碑)다. 본래 고구려의 속민(屬民)이었던 백제와 신라를 왜가 바다를 건너와 쳐부수고 그들의 신민(臣民)으로 삼았다는 것은 광개토태왕의 치욕이지 결코 공적이 될 수 없는데 이런 치욕을 무엇 때문에 훈적비에 새겼겠는가? 일제의 주장은 억지일 수밖에 없고 이런 해석을 제시한 일제는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역사를 왜곡하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일본은 21세기인 지금도 위안부 문제, 강제징용과 징병 문제, 독도 문제 등 역사 왜곡을 계속하고 있다. 여전히 역사 왜곡을 계속하고 있는 그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이 광개토태왕비도 변조해 역사를 왜곡했을 것이라는 합리적인 의심을 아니 할 수 없다. 일본이 역사 왜곡을 계속하는 한 그들은 언제라도 우리에게 합리적 의심의 대상인 것이다.
둘째, 타성에 젖은 연구로 인해 역사적 사실을 우리 스스로 묻고 있는 현실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이다. 광개토태왕비문의 신묘년 기사는 고구려의 입장에서 백제와 신라를 고구려와 동일 민족 관계에 있는 ‘속민(屬民)’으로 보고 기록한 문장이므로 백제와 신라를 다시 동일 민족 관계가 아닌 ‘신민(臣民)’으로 칭해야 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신묘년 기사의 ‘신민’은 고구려의 입장에서 왜(일본)를 칭한 말이며, 이 기사의 원래 문장은 당연히 ‘고구려가 왜를 고구려의 신민으로 삼았다’이다. 비문의 내용 안에 이미 변조의 증거가 들어 있는데 그 증거를 보지 않고 과거의 연구 관성(慣性)에 젖어 광개토태왕비문에 대해 임의적 추론을 거듭하는 학계의 현실이 너무 안타까웠기 때문에 광개토태왕비문 연구에 오랜 세월을 매달린 것이다.
나는 기왕에 연구를 진행해온 연구자들을 향해 “임금님은 벌거벗고 있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광개토태왕비 비문 안에 이미 답이 있는데 왜 애써 그 답을 보려고 하지 않고 엉뚱한 연구 방법만 사용하고 있는지 질문을 하고 싶었다. “임금님이 벌거벗었을 리 없다”는 식의 상투적 사고와 연구 방법에서 벗어나 비문 자체(自體)를 바로 보자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일제에 의해 왜곡되고 말살된 우리의 역사를 찾고 싶었기 때문에 광개토태왕비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게 된 것이다.

광개토대왕비문의 특정 글자들이 ‘왜곡’, ‘변조’ 됐다고 확신하게 된 근거는 무엇인가? 광개토태왕비문의 어디가 어떻게 조작됐으며, 그 증거는 무엇인지, 변조되기 이전의 글자는 무엇인지, 그렇다면 원래 비문은 과연 어떤 의미였는지 말씀해 달라.
광개토탱왕비문은 간첩 사코 가게노부(酒勾景信, 1850~1891)를 통해 최초로 입수한 일제는 6~8년 동안 극비리에 연구해 신묘년 기사에 대해 다음과 같은 해석을 내놓았다.
“백제와 신라는 예부터 (고구려의) 속민(屬民)이었다. 그래서 줄곧 조공을 해왔다. 그런데 일본이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와 신라를 깨부수어 (일본의) 신민(臣民)으로 삼았다.(百殘新羅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 來渡海破百殘□□新羅, 以爲臣民)”
일제는 원래 있던 다른 글자를 지우고 ‘渡海破’로 변조함으로써 이상과 같은 해석을 내놓은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은 광개토태왕비가 광개토태왕의 공적을 기린 훈적비라는 점에 비추어 보면 결코 있을 수 없는 해석이다. 나는 연구 끝에 일제가 ‘渡海破’로 변조하기 전의 원래 글자가 ‘入貢于’임을 찾아냈다. ‘渡海破’ 대신 ‘入貢于’를 넣으면 해석이 다음과 같이 바뀐다.
“백제와 신라는 예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었다. 그래서 줄곧 조공을 해왔다. 그런데 왜(일본)가 신묘년 이래로 백제와 □□와 신라에 대해 조공을 들이기 시작하였으므로, 고구려는 왜도 고구려의 신민으로 삼았다.(百殘新羅舊是屬民, 由來朝貢, 而倭以辛卯年來 入貢于百殘□□新羅 以爲臣民)”
이러한 해석이라야 ‘훈적비’인 광개토태왕비의 성격에도 걸맞고 당시의 역사적 사실에도 부합하는 해석이 된다. 나는 속민(屬民)과 신민(臣民)의 뚜렷한 의미 차이에 근거해 이런 해석을 하게 됐다. 광개토태왕비문의 신묘년 기사는 고구려의 입장에서 백제와 신라를 고구려와 동일 민족관계에 있는 ‘속민(屬民)’으로 보고 기록한 문장이므로 백제와 신라를 다시 동일 민족 관계가 아닌 ‘신민(臣民)’으로 칭해야 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신묘년 기사의 ‘신민’은 고구려의 입장에서 왜(일본)를 칭한 말이며, 이 기사의 원래 문장은 당연히 ‘고구려가 왜를 고구려의 신민으로 삼았다’인 것이다.

특히 증보판에서는 ‘금석학과 서예학’을 방법론으로 제시했다. 동북아시아 역사논쟁, 좀 더 문제적으로 표현한다면, 역사전쟁에서 금석학과 함께 서예학이 방법론이 될 수 있다고 보는가?
21세기 현재는 ‘융합학문’의 시대이다. 학제간(學際間)의 상호 융합과 통섭을 중시하는 시대다. 과거의 ‘자기 분야’에 갇힌 폐쇄적 연구 태도에서 벗어나 연구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자료라면 어떤 자료도 다 활용해야 하는 시대다. 비문이 곧 금석문이고 비문에 쓴 글씨가 곧 서예작품이다. 그러므로 금석학과 서예학은 비문 연구에 가장 필요한 학문 분야다. 어떤 자료라도 다 활용해야 하는 융합학문의 시대에 예로부터 비문연구의 핵심 학문으로 인정받았던 금석학이나 서예학을 비문연구에 활용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지금까지 광개토태왕비 연구에서 금석학이나 서예학을 두루 사용하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이해할 수 없는 기현상이다. 이제라도 금석학과 서예학적인 관점에서 광개토태왕비를 면밀하게 들여다보는 연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초판 발간 이후 학계의 시각을 보도한 기사가 있었다. “일본과 중국 학자 90퍼센트가 (광개토대왕비문) 글자 변조가 없다고 믿고 있으며, 국내 학자 중에서도 40퍼센트 정도는 이 견해에 동의”한다는 기사(<한국일보> 2005년 5월 25일 자)였다. 물론 이것은 2005년에 제한된 시각이 아닐 것이다. 이번 증보판에 ‘반론’을 강화한 것도 이 때문으로 보이는데.
초판 발행 이후, 나의 연구에 대해 학문적인 방법과 과정을 통해 반론을 제기한 학자는 아직 한 사람도 없다. 다만, 초판에서 제기한 나의 학설이 언론에 처음 소개됐을 때 서영수 교수가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의견을 제시했다.
“비문 전체의 내용과 여러 사료에 근거해 당시의 역사적인 정황을 파악한 상태에서 비문 해석에 접근해야지, 글자 한 자 한 자에 의혹을 제기하고 그것을 자기 논리에 맞추어서 풀어가서는 안 된다.” “재일 사학자 이진희 씨와 같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
서영수 교수의 이런 의견을 보도한 기자는 “국내 고구려사 연구자들은 전북대 김병기 교수의 광개토태왕비 신묘년 기사 해석에 대해 대체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였다”는 평을 붙였다. 여기서 신묘년 기사에 대한 서영수 교수의 해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백제와 신라는 예부터 속민이었는데도 아직 조공을 바치지 않고, 왜는 신묘년부터 (대왕의 세력권 내에) 함부로 건너오기 시작하였다. 그러므로 대왕은(대왕과의 맹세를 어긴) 백제와 (그 동조자인) 왜를 공파하고 (대왕에 귀의한) 신라는 복속시켜 신민으로 삼았다.”(서영수, 「‘신묘년 기사’의 변상과 원상」, <고구려발해연구> 2, 고구려발해학회, 1996, 429쪽.)
서영수 교수가 해석을 하면서 괄호를 이용해 말한 ‘대왕의 세력권 내에’, ‘대왕과의 맹세를 어긴’, ‘그 동조자인’, ‘대왕에 귀의한’ 등은 모두 광개토태왕비의 원문에는 단 한 글자도 보이지 않은 내용이다. 비문에 그런 말이 전혀 새겨져 있지 않은데 서영수 교수는 자신이 파악한 당시의 정황과 비문의 내용을 맞추기 위해 괄호를 이용하여 없는 말을 써 넣는 무리한 해석을 한 것이다.
광개토태왕비야말로 당시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가장 생생한 자료다. 이 생생한 자료를 활용해 당시의 역사를 복원할 생각을 해야지 당시의 정황부터 이해하기 위해 심지어는 부실하기 그지없는 『일본서기』까지 참고해 당시의 정황에 대한 추론과 가설을 세워놓고서 그런 추론과 가설에 맞춰 광개토태왕비 비문을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이는 광개토태왕비의 사료적 가치를 무시하는 연구 태도다. 비를 세울 당시의 생생한 기록인 비가 발견됐으면 비문의 글자를 한 글자 한 글자 꼼꼼하게 판독해 읽고, 그렇게 판독한 비문에 근거해 당시의 역사적 상황을 파악함으로써 혹 후대에 잘못 기록된 역사가 있다면 그것을 바로잡으려고 연구해야지 후대의 기록에 나타난 정황을 먼저 잘 파악해 그 정황에 맞춰 비문을 해석하는 것은 본말이 전도돼도 한참 전도된 연구 태도다. 이처럼 본말이 전도된 연구 태도로 연구한 연구 성과를 나는 신뢰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나는 내 주장에 대한 서영수 교수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

 

 

무조건적인 애국애족주의에 빠져

일제가 광개토태왕의 비문을 변조했다는 주장을

감정적으로 피력하는 것도 옳지 않지만,

지금도 끊임없이 역사를 왜곡하려드는 일본의 소행을 보면서도

광개토태왕비에 대해서 ‘일제가 변조했을 리 없다’는 생각을

먼저 갖고서 일제의 해석을 따르려 하는 것은

합리적인 연구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일부 학자가 제시한 “백제와 신라를 깨부술 정도로 매우 강력했던 왜를 후에 고구려가 제압했음을 기록하는 방식으로 광개토태왕의 무공을 기리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 근거 없는 개인적 ‘상상’일 뿐이라며 통렬하게 비판했다. 이들의 주장을 ‘근거 없는 개인적 상상’이라고 비판할 수 있는 근거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어떤 역사책에도 그런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중에 설령 고구려가 왜를 제압했다고 하더라도 일단 왜가 고구려의 속민이었던 백제와 신라를 쳐부수고 그들의 신민으로 삼은 것은 고구려의 입장에서 봤을 때 치욕인 것은 분명하다. 왜는 바다를 건너 직접 쳐들어 와서 고구려의 속민인 백제와 신라를 다 정벌해 그들의 신민으로 삼았는데 고구려의 광개토태왕은 바다 건너 왜를 정벌하지도 않았고 한반도 내에 들어온 왜를 물리친 것일 뿐인데 그것으로 백제와 신라를 쳐부술 정도로 강한 왜를 징벌했으니 그게 곧 ‘광개토태왕의 커다란 무공’이라는 점을 드러내기 위해 신묘년 기사를 새겼다는 것은 말이 될 수 없다. 이는 광개토태왕을 매우 나약하게 본 관점이며, 고구려를 왜와 작은 ‘힘 다툼’이나 하는 나라로 폄하하는 관점이다. 왜 비문에도 없고 역사 기록 어디에도 없는 가설을 세워서 광개토태왕과 고구려를 그처럼 나약한 존재로 폄하하려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렇다면 학계의 기존 광개토대왕비 해석에 나타나는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우선 우리 학계의 선행 연구자인 단재 신채호 선생이나 위당 정인보 선생, 그리고 광개토태왕 비문의 변조를 최초로 제기한 이진희 선생 등의 연구 관점이나 연구 성과를 우리 스스로 너무 경시했다는 점이다. 국수적인 태도로 연구를 하자는 게 아니라, 합리적인 사고를 하자는 것이다. 신채호, 정인보, 이진희 등이 말한 대로 광개토태왕비는 아들 장수왕이 부왕의 훈적을 기리기 위해 만든 훈적비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일제가 제시한 신묘년 기사는 근본적으로 성립할 수 없는 문장이다. 이처럼 단순하면서도 명확한 선행 연구자의 연구 성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주장을 까닭 없이 배척하고, 일본이나 중국의 연구자들이 사용하는 연구 방법이나 내용은 까닭 없이 수용하며, 심지어 옹호하는 현상이 적잖이 보이는 게 우리 학계의 현실이다. 무조건적인 애국애족주의에 빠져 일제가 광개토태왕의 비문을 변조했다는 주장을 감정적으로 피력하는 것도 옳지 않지만, 지금도 끊임없이 역사를 왜곡하려드는 일본의 소행을 보면서도 광개토태왕비에 대해서 ‘일제가 변조했을 리 없다’는 생각을 먼저 갖고서 일제의 해석을 따르려 하는 것은 합리적인 연구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도 비문의 문장과 서체에 집중하는 연구가 필요하다.
또 하나는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는 생각을 하지 않고 관성(慣性)에 젖은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새로운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 채 자신의 추론과 짐작으로 비문의 글자에 대해 “내 눈에는 이 글자로 보인다”는 가설을 먼저 세운 다음, 그 가설에 맞춰 ‘새로운 해석’을 하고, 그런 새로운 해석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기 위해 후대의 기록 중에서 자신의 해석을 뒷받침할 수 있다고 여기는 ‘근접한 기록’을 찾아내어 적잖이 억지스러운 의미를 부연하는 방식의 연구를 되풀이하고 있다. 이런 연구로는 끝없는 논쟁만 불러일으킬 뿐, 일제에 의한 비문 변조와 역사 왜곡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 다양한 연구 방법을 활용해 실질적이고 객관적인 연구를 진행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내가 비문에 나오는 ‘속민(屬民)’과 ‘신민(臣民)’의 뚜렷한 의미 차이를 규명하여 원래의 비문이 ‘도해파(渡海破)’가 아니라 ‘입공우(入貢于)’임을 밝힌 것은 전에 없던 획기적 발상이며, ‘입공우(入貢于)’임을 증명하는 데 사용한 서예학적 연구 방법은 지금까지 누구도 사용하지 않은 참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차후 광개토태왕비에 대한 연구가 상투적인 연구 방법에서 벗어나 융합적 학문연구 태도를 취해 다양한 각도에서 연구되기를 바란다.   

결국 선생님의 광개토대왕비문 해석은 “일제가 남긴 식민 사학적 관점이나 오랫동안 중화주의의 물들어 있던 사대주의적 관점으로 우리의 역사를 보지 말고 우리 자신의 역사관으로 우리의 역사를 바라보자는 뜻”에서 가능했다고 본다. 물론 선생님의 비문 해석이 완전한 ‘진실의 세계’에 도달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렇다고 선생님의 해석이 ‘역사학자’가 놓칠 수 있었던 ‘과거의 진실’을 새롭게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연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앞으로 어떤 작업을 계속할 생각인가?
광개토태왕비의 변조 여부를 놓고 벌여왔던 논쟁은 나의 이 저서 『사라진 비문을 찾아서-글씨체로 밝혀낸 광개토태왕비의 진실』로 끝나기를 바란다. 나의 주장에 대해서 학문적인 반론이 들어온다면 나 또한 반론에 대한 반론을 다하겠지만, 만약 내 주장에 잘못이 발견된다면 언제라도 내 주장을 철회할 것이다.
서예에 대한 연구를 보다 더 깊이 진행해 우리의 서예가 중국의 서예나 일본의 서예와 다른 점을 고찰함으로써 우리 서예에 배인 민족미감을 찾아내고, 서예를 통해 우리 민족이 이룬 문화와 예술과 역사를 좀 더 구체적으로 조명해 보고자 한다. 서예가로서의 역량을 쌓아 한국 서예의 세계화를 도모하고 한국의 서예를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한류를 창출하고 싶은 의지도 가지고 있다. 이런 의지를 실현하기 위해 이미 중국, 일본 대만은 물론, 구미지역까지 10여 개국을 돌며 전시도 하고 특강도 하면서 서예에 대한 세계인의 관심도를 파악한 바 있다. 한국 서예의 활성화와 세계화는 나의 학문 연구에도 많은 도움을 주리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고문헌 특히 필사본 고문헌에 대한 수집과 탈초와 번역에도 매진하여 고문헌에 담긴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발굴하는 작업도 계속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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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lsge***
    동의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2020-11-02 10:06:01

사람과 삶

영상으로 보는 KN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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