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저자를 만나다

    고령사회와 자본이 지배하는 세계 유쾌함과 비극 결합해 소설로 형상화일본 우경화 갈수록 심해져  그래도 계속 저항할 것지금도 한국의 작가로부터 많은 용기 얻고 있어   “호시노 도모유키는 ‘국가를 흔들리게 하는 규모’의 소설을 쓰는 작가(오에 겐자부로가 자신의 소설적 후계자로 호시노 도모유키를 지목하며 ‘국가를 흔들리게 하는 규모’의 소설을 쓴다고 하여 크게 화제가 됐다)로 불리지만, 이 단편집에 실린 작품들은 그의 세계가 ‘국가’에 머물지 않고 ‘지구’를 흔들고 ‘우주’로 뻗어나가는 규모임을 보여준다.”『인간은행』(문학출판사, 2020.8)을 번역한 김석희 경희대 교수의 평가대로 호시노 도모유키의 소설적 스케일은 그 범위가 일국이 아닌 우주에 걸쳐 있다. 이것이 소설가로서 장점이 될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그가 던지는 메시지는 기존의 문제의식을 넘어서는 묵직함과 함께 작가 특유의 ‘유쾌함’이 아슬아슬하게 결합된 독특함을 보여주기에는 충분하다. 『인간은행』은 인간 자신을 화폐화해 노동으로 빚을 갚게 하는 기묘한 조직의 이야기(「인간은행」), 치매 노인을 엽기적으로 처리하는 독보적인 그로테스크함의 절정을 보여주는 작품(「무엇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특유의 작가적 유쾌함을 보여주는 이야기(「치노」), 살아남은 것이 미안하고 슬퍼지던 우리의 사회적 경험을 떠올리게 하는 단편(「눈알 물고기」), 인간의 집단적 광기를 그리는 한편, 그 광기를 되돌리는 힘 역시 인간에게 있음을 시사하는 작품(「핑크」), 인간이 식물화돼 가는 독특한 이야기(「스킨 플랜트」) 등의 문제작을 수록했다. 최익현 선임기자 bukhak@knou.ac.kr 『인간은행』에 수록된 단편들이 모두 예사롭지 않다. 현대 사회의 그늘진 곳에서 발생하는 어둡고 깊은 문제에서부터 인류의 먼 미래를 상상하는 일까지 소설의 스펙트럼이 넓고 단단하다는 게 인상적이었다. 『깨어나라고 인어는 노래한다』, 『론리 하트 킬러』, 『오레 오레』 등의 작품이 한국 독자들에게 소개돼 있으니, 호시노는 한국 독자들에게도 친숙한 일본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수록된 작품들 가운데, 이름하자면 ‘우주적 상상력’으로 명명할 수 있는, 그런 상상력이 마음껏 발산된 단편들이 있다. 예컨대 「스킨 플랜트」, 「지구가 되고 싶었던 남자」에서 더욱 그렇다. 여기서 이런 질문이 가능할 것 같다. 인간은, 인류는 영원할 것인가? 인간은, 인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지구의 역사를 생각해 보면 영원히 존재하는 생물이란 없다. 인간도 언젠가 멸망하든가, 아니면 다른 생물로 진화할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지구상에서 그런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생물은 인간뿐이라는 것이다. 다른 생물은 자신들의 장래 따위 신경도 쓰지 않고 그와 무관하게 지금을 살아간다. 인간은 앞일을 걱정하거나 기대하며 살아간다. 결국 미래의 시간을 사는 것은 인간의 특징이다. 때때로 인간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소설을 쓰고 싶다고 생각한다. 식물이 그저 자라날 뿐인 소설이라든가, 그런 거. 인간이 없으면 거기에는 어떤 이야기도 생기지 않는다. 그런 소설을 괜히 쓰고 싶어질 때가 있다. 하지만 인간의 언어를 사용해서 쓰는 이상, 그것은 인간의 시선으로 보는 식물일 뿐, 진정한 식물을 그려낼 수는 없다. 나의 소설이 자주 인간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의지를 포함하는 것은 그런 욕구가 내 안에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인간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인간의 가치관 속에서는 결코 밝은 방향을 향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특히 지금 코로나 시대의 세계를 내다보자면, 비관적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일이 많이 있다. 다만, 그것도 모두 인간의 가치관에 의한 것이다. 인간 이외의 생물이나 지구 입장에서 보면 인간이 자멸해 가는 것은 플러스도 마이너스도 아닐지 모른다. 인간이 없어져도, 혹은 인간 탓에 지구의 생명이 죽어 없어져도, 좋다고도 나쁘다고도 생각지 않을지도 모른다. 좋고 나쁘다는 것은 인간의 가치관이기 때문이다.그와 같이 인간의 가치 기준을 늘 상대적으로 바라보면서 글을 쓴다. 번역자 김석희 선생은 아마도 그런 부분을 ‘우주적 상상력’이라 이름 붙였을 것 같다. 그렇다면, 작가는 어떤 존재인가? 어떤 이들은 도스토예프스키 이후 서사의 시대는 종언을 맞았다고 말하지만, 그럼에도 다양한 서사와 이야기들이 지금도 넘쳐나고 있다.  당신은 왜 소설을 쓰는가?인간이 언어를 사용하며 사는 한, 소설은 계속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른바 ‘근대소설’이 시작된 것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정도부터인 것으로 안다. 서사시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생각해 보면, 계속해서 형태를 바꾸기는 하지만 ‘이야기’를 베이스로 했던 ‘소설’은 계속 존재했다고 할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소설의 역할은 이렇다. 우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나 존재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로 표현하는 것. 예를 들어, 백 년 전에 성폭력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것은 남자라면 보통으로 할 수 있는 행동이라고 묵인됐을 것이고, 설령 문제가 된다 해도 폭력이 심하다는 것이지, 성차별을 그 근저에 깔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런 시대의 폭력 체험을 일반적인 폭력과는 성질이 다르다고 느끼고 말로 표현하려 했다면, 정말 고생스러웠을 것이다. 우선 그걸 설명할 언어가 없고, 설명한다 해도 남들이 모를 것이다. 그것을 읽음으로써 간접체험하도록 쓰는 것이 소설의 언어라고 생각한다. 소설은, 성차별을 설명할 수 없다 할지라도, 거기에 뭔가 이상한 역학관계가 작용하는구나, 하고 느끼도록 쓸 수 있다.  또, 언어를 갱신하는 것도 소설의 중요한 역할이다. ‘혁명’이라는 말은 19세기 말에서 20세 중반까지는 새롭고 희망을 품은 언어였겠지만, 그 뒤로는 점차 정형화됐다. 안이하게 그 말을 입에 담는 사람은 사실상 생각을 멈춘 것이 아닌가 싶어지는 시대가 됐다. 그 단어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다든가, 혹은 다른 말로 바꾸어 일찍이 ‘혁명’이 가지고 있던 힘을 되살려내는, 그런 일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소설이다. 현대의 이야기를 쓰는 가운데 그 언어에 절실한 힘을 담을 수 있다면 틀에 박히고 의미를 잃은 언어를 되살려낼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를 계속 우리들의 것으로 남기기 위해서 글을 쓰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누군가 힘을 가진 사람이 제멋대로 말의 의미를 정해버릴 테니까. 오에 겐자부로는 한국에서도 신뢰하고 좋아하는 작가다. 그가 호시노를 가리켜 ‘국가를 흔들리게 하는 규모’의 소설을 쓴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국 ‘국가’를 흔들리게 하다는 건, 그만큼 소설적 화두와 주제가 현실의 어떤 본질적인 문제들을 깊이 건드리고 있다는 뜻이다. 「무엇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인간은행」 등의 작품은 분량은 짧아도 담겨 있는 주제들은 폭발력이 크다. 『인간은행』에는 「무엇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을까」가 첫 작품으로 수록돼 있다. 이 작품에는 고령사회의 단면과 노인 돌봄, 생명과 노동, 육식과 젠더 등의 사회적 이슈가 내재돼 있다. 사회공동체가 붕괴되고 있다는 것을 ‘나’가 직접 보여주는데, 개인의 무력화와 공동체의 붕괴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는 것 같다. 현 사회 시스템에서는 개인의 무력화와 동물화는 피할 수 없는가? 「무엇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을까」는 10년 전인 2010년에 쓴 작품이다. 어떤 문예지에서 ‘2030’년이라는 특집을 기획했는데, 그 당시를 기준으로 20년 후의 미래를 테마로 한 단편을 써달라는 의뢰가 왔다. 나는 단순히 20년 후를 상상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다. 즉, 100년 전인 1930년의 사회가 어떠했는지를 조사했다. 어쩌면 이 사회는 100년 전을 다른 형태로 되풀이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1930년은 관동대지진이 일어난 때로부터 7년 뒤다. 일본은 급속히 군국주의화 되어가던 무렵이었다. 세계 경제도 바닥을 쳤고 사람들은 빈곤에 허덕였다. 그 비참한 상황을 그린 영화, 「무엇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는가」가 크게 히트를 쳤다. 소녀의 인신매매 이야기다. 나는 그 영화를 보고, 그 2030년 버전을 소설로 쓴 것이다. 그것은 현대에 와서는 고령화 사회의 문제로서도 나타났다. 덧붙이자면 이듬해인 1931년에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박열의 부인. 무정부주의자였던 일본 여성 작가. 천황 부자를 암살하기 위해 폭탄을 반입했다는 혐의로 옥고를 치르던 중 사망함-옮긴이)의 유고가 『무엇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는가』라는 제목으로 정리됐다.압도적으로 강한 권력이 세상을 살아도 좋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등급을 분류하고 그런 가운데 사람들은 점점 노예와 같은 멘탈을 가지게 된다. 코로나의 소용돌이 안에 있는 지금도, 일을 잃고 홈리스가 되는 사람들이 급증하고 있지만, 다수의 사람들은 그 사실을 외면하고 있다. 홈리스가 된 사람을 방치하려고 하는 행정에 대해 분노와 비판을 쏟아내는 사람은 아주 적다. 누구나 방치되는 쪽이 되고 싶지 않기 때문에 방치하는 쪽에 있으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방치되는 사람들은 절망을 받아들여 ‘동물로서의 역할’에 눈을 뜨거나 기묘한 해방감을 맛볼지도 모른다. 물론, 이런 지옥도가 현실이 되기를 원치 않기 때문에 애써 극단적으로 어두운 소설을 쓴 것이다. 소설을 쓴지 겨우 10년 만에 그런 세계가 현실화되고 있다. 그 잔혹한 광경을 목격하면서 황망하기 이를 데 없다. 대표작 「인간은행」 역시 ‘인간화폐’로 전락한 인물을 묘사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벽장 안에 잠자고 있는 ‘퇴장화폐’를 ‘자본’으로 전환되지 못한, 일종의 자본의 유충으로 설명했다.  소설 속의 ‘나’가 어느덧 인간 화폐에 익숙해지는 것을 보면, 인간은 자본주의 시스템의 유충, 벌레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이러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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