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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기와 시 쓰기를 가르치다 보면, 언제나 가르칠 수 없는 것을 가르치려 한다는 낭패감과 만난다. 자기 한계와 마주하고 고뇌하는 저마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가르치는 사람의 자격은 그저 많이 해보았다는 것밖에는 없는 누추한 내 자신과 만난다. 그럴 때마다 곁에서 함께 고뇌하는 벗을 자처하는 일을 하는 것으로 조금이나마 내 역할을 잘해보기로 거듭 결심하곤 한다.


강의실에서 만나는 학생들의 자기 한계는 대개 비슷한 면이 있다. 그것은 안전한 영역 바깥으로 조금도 발을 내딛고 싶지 않음에서 기인된다는 것이다. ‘완성도를 추구하기 위해서, 완벽함을 추구하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앞세우지만, 실은 실패와 서툶에 대한 두려움이 새로운 도전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안전하고 완성도 있는 작품을 시도하는 것을 질타하고, 실패를 격려하고 서툶을 반기면서 계속해서 스스로를 갱신해나가는 것을 응원해주는 태도가 창작교육에 있어서만큼은 더 중요하다.


실패와 서툶을 어떻게 일부러 시도할 수 있을까? 그것은 두려움 없이는 불가능하다. 우선 두려움에 관한 내성부터 필요하다. 산책을 할 때 처음 가보는 골목과 동네를 지도 없이 돌아다니는 일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조금 더 이해하기 쉽다. 당연히 길을 잃을 것이다. 두려움과 조바심과 무서움도 함께 엄습할 것이다. 길을 잃었다고 지각하고 있다면 더 큰 두려움과 더 큰 조바심과 감당되지 않을 무서움을 겪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길을 잃었다는 지각 없이 그저 골목의 풍경과 오늘의 날씨와 그 동네에 오래 살아온 사람들의 모습을 구경하는 마음이라면 그다지 두려울 것도 무서울 것도 없다.


이런 상태를 두고 리베카 솔닛은 『 길 잃기 안내서』에서 말했다. “길을 전혀 잃지 않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고, 길 잃는 방법을 모르는 것은 파국으로 이어지는 길이므로, 발견하는 삶은 둘 사이 미지의 땅 어딘가에 있다”고. 리베카 솔닛은 걷는 일과 떠나는 일과 길을 잃는 일로써 우리가 비로소 모색을 시작할 수 있다고 계속해서 말하고 있다.


시는 길 잃기를 권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시쓰기는 길을 잃어본 적 있는 자들이 시작한다. 길을 되찾기 위해서 시를 선택한 것은 아니다. 길을 잃어본 적 있는 자만이 얻어왔던 감각들로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이 시쓰기였기 때문이다. 길을 되찾지 않아도, 계속해서 길을 잃게 될지라도 거기서 미지의 무언가와 조우할 수 있고 그것을 증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증언의 역할을 부여받았다고 스스로 믿는 자들이 시인이 된다.


시인들이 남긴 증언들 덕분에, 시를 읽는 독자들은 길을 잃었던 기억과 길을 잃어버린 지금에 위무를 얻는다. 그리고 길잃기의 기쁨을 받아들인다. 그것은 일종의 해방감이다. 시는 길을 잃은 자들만이 누리는 자유가 그 궁극일 것이다. 시를 쓰는 삶을 살면서 내가 명백하게 얻었다고 느끼는 단 한 가지가 있시집 『극에 달하다』 『눈물이라는 뼈』 『수학자의 아침』 등과 산문집 『마음사전』 『시옷의 세계』 등을 냈다.다면, 길 잃기의 기술을 잘 익혔다는 것이다. 길을 잃었을 때에야 미지의 길을 찾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믿음이 있다는 것이다.


두려움은 있지만, 두려우리라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없다. 낯선 길 위에서 매번 서툴 수밖에 없지만 서툶에 대한 부끄러움은 없다. 오히려 길 안에서 안주하고 있을 때 더 큰 두려움과 더 큰 부끄러움이 있다. 시를 쓰지 않았더라면 알 리 없었을 감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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