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NOU광장   마로니에

잘 몰라서 그랬습니다.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십시오.” 수화기 너머 남성이 급기야 울먹이기 시작했다. 당황스러웠지만 짐짓 냉랭한 척 대답했다. “제가 용서할 문제는 아니고요, 이 책의 저작권자인 저자가 용서를 해주셔야 하는데 전혀 그럴 의향이 없다고 하십니다. 자꾸 이러시면 그냥 법대로 처리하겠습니다.”

 

저작권을 침해당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편집자인 내가 만든 책의 저자가 저작권을 침해당했고, 침해 당사자인 유력 정치인은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으며, 그의 책을 대필한, 의원님에 대한 충심 하나로이 책 저 책의 내용을 적당히 엮어서 의원님 이름으로 책을 만들어드린 그의 비서관이 모든 게 자기 잘못이니 의원님 모르게 넘어가 달라며 애원하는 중이다. “책 나왔을 때 의원님이 얼마나 기뻐하셨는데요...”

 

우리나라 정치인에 대한 실망이야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책 한 권 내는 걸 이토록 우습게 알다니 출판편집자로서 모욕감마저 들었다. 저작권 침해를 당한 우리 책에는 저자의 10년 연구와 10년의 현장 경험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높은 수준의 분석과 제언이 가득하지만 책 말미에는 그 흔한 참고문헌 리스트도 필요 없을 만큼, 다른 이의 저작물에 거의 기대지 않고 본인의 20년을 한 줄 한 줄에 성실히 담아낸 책이었다. 집필에 2, 편집에 또 반년이 걸렸다. “급하게 내느라 그랬습니다. 집필에서 출간까지 한 달 만에 끝내야 했거든요.” 고작 한 달. 쓸데없는 첨언에 할 말을 잃었다.

 

며칠 후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이미 제작 및 배포한 도서에 대해서는 사용료를 지불하고 서둘러 개정판을 출간하겠다고 한다. 그러면서 출처 표기를 어떻게 해야 개정판에서는 저작권법 위반을 피해갈 수 있냐며 내게 자문을 구했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단순히 출처 표기의 문제가 아니었다. 더 큰 문제는 그 책(인용 저작물)과 우리 책(피인용 저작물) 간의 양적 질적 주종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인용은 책의 주된 내용을 뒷받침하는, 부차적인 수준에서만 용인된다. 인용한 부분을 뺀 나머지 부분만으로도 책의 내용이 성립해야 한다는 뜻이다. 문제의 책이 주장하는 바는 우리 책의 핵심 내용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에 불과했다. 우리 책의 내용을 걷어내면 애초에 성립할 수 없는 책이었다. 저작권법의 표현을 빌자면 인용의정당한 범위를 한참 벗어난 것이다. 굳이 설명하고 있지만 실은 단순하다. 의원님의 책은 의원님의 생각이나 연구를 토대로 의원님이 직접 쓰셔야 한다는 뜻이다.

 

저작권은 법률이 보호하는 권리이다. 저작권을 침해한 자는 저작권법에 따라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 원 이하의 벌금이 부과되며(저작권법 136), 단순히 출처 표기만 위반해도 5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질 수 있다(저작권법 제138). 그러나 책 한 권을 세상에 내놓는다는 것은 법률 이전에 양심과 양식의 문제이다. 엄청난 양의 펄프를 소비하고, 편집자, 디자이너, 인쇄사, 마케터 등 다양한 전문 인력이 투입되며, 무엇보다, 수많은 독자의 시간과 돈을 사용하는 일이다. 당신의 이름으로 책을 내고 싶다면 그 책이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 수없이 자문해야 한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 글은 당신의 머리와 손으로 직접 쓴 글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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