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김병기 박사

“17년간 직장생활을 하다가 불현 듯 뭔가가 뒷목을 잡고 있는 느낌이 들어 뒤늦게 역사 공부에 뛰어들었어요. 53세에 단국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죠. 역사 공부는 가학(家學)인 셈입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사』(이학사, 2019)의 저자 김병기 박사가 ‘대한독립운동총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이란 직함이 새겨진 명함을 건네면서 한 말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의 해에 그의 가계(家系)는 좀더 주목해볼 만하다. 거슬러 올라가면, 대한독립운동총사 편찬위원장으로 『한국민족총사고』(1985)를 쓴 김계업이 그의 부친이며, 좀더 올라가면,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발행한 <독립신문>의 사장 및 육군주만참의부 참의장을 지낸 독립운동가이자 『한국독립사』(1965)의 저자인 김승학이 그의 조부다.
저자인 김병기 박사는 한국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던 시기에 태어났다. 고려대를 나와 평범하게 직장 생활을 하며 생계를 꾸려나갔지만, 끝내 ‘역사’의 부름을 피해갈 수 없었다. ‘독립운동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을 때, 그의 나이는 53세였다. 대학원 공부를 하면서 1998년부터 2005년까지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전임연구원을 지냈다. 이후에는 (사)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전문위원으로 활동해 오고 있다. 지은 책에는 『국외 3·1운동』, 『만주지역 통합의 주역 김동삼』(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등이 있다.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의 해에 그가 『대한민국임시정부사』를 들고나온 데는 어떤 연유가 있을까. 3월 28일 그가 있는 서울 수운회관 1층 (사)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를 찾았다.

Q. 3대째 ‘역사’ 연구를 잇고 있다.
“조부나 부친 모두 한국근현대사와 직접 관련된 분들이라, 어렸을 때부터 집안에 널린 고대사, 독립운동사 자료를 접하면서 자랐다. 아버지가 책을 집필하실 때 옆에서 많이 도와드리기도 했다. 사실 독립운동가 집안은 모두 어렵게 살았다. 그래서 대학을 졸업한 뒤 돈 벌겠다고 일을 했는데, 나이 먹어가다가 자꾸 뭔가가 뒷목을 잡아당기는 느낌이었다. 뒤늦게 대학원에 진학했다. 처음에는 고대사를 공부하려 했지만 한시준 교수님이 독립운동사 쪽으로 안내하셨고, 더군다나 독립운동 하시던 조부를 둔 운명 때문에 열심히 하지 않을 수 없었다.”

Q. 책의 제목을 ‘임시정부사’가 아니라 ‘대한민국 임시정부사’라고 했다. 부록편에 「대한민국 건국 강령」 전문을 실었다. 이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대한민국 정부의 뿌리이자 기원이라는 생각과 닿아 있는 것 같다.
“기본적으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공식 명칭이다. 왜냐하면 이 국호는 초창기 당시 임시의정원(오늘날 국회)에서 결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부르려면 정확한 명칭으로 부르는 게 맞다. ‘건국 강령’은 1941년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발표한 새 민주국가 건설을 위한 강령이다. 여기서 우리는 임시정부가 ‘임시’가 아닐뿐더러 나라 찾은 뒤, 어떻게 국가를 운영하려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해방 후 어떻게 국가를 운영하려 했는지 연속적 관점에서 엿볼 수 있는 자료다. 이를 통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단순한 ‘임시’ 정부가 아닌, 오늘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뿌리이자 기원임을 강조하고자 했다.”

Q. 이 책이 지닌 가장 큰 특징은 ‘임시정부사’ 시기의 확장이라고 할 수 있다. 임시정부의 역사를 1919년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로 한정하지 않고,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까지로 파악했다.
“사실 임시정부에서 국내에 들어오기 전에 국무회의를 열었다. 해방 소식을 접하면서 거기서 결의한 것들을 보면, 귀국해서 정권을 국민에게 봉헌한다, 임시정부의 모든 것, 자료 등을 새로운 정부에게 넘긴다고 결정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각료 그대로 귀국한다고 결정했다. 국제관계에서는 개인 자격이나, 국내동포 관계에서는 정부 자격임을 강조했다. 또 하나 눈여겨볼 대목은, 이분들이 자주적이고 통일된 정부를 지향했다는 점이다. 백범이 남북협상에 나선 이유가 이를 방증한다. 국내에 들어와서는 끝까지 지속되지는 못했지만 임시정부 각료 그대로 국무회의를 열기도 했다. 미군정에 정권을 자신들이 가져가겠다고 통보했으나 좌절됐다. 1948년 8월, 새 정부가 수립되면서 임시정부는 ‘임정’의 모든 것을 넘겨준 걸로 봐야 한다. 이렇게 보면 1919년부터 1948년까지 일관되게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역할을 하면서 새 정부에 공을 넘겨준 것으로 인식하는 게 옳다.”

Q. 국회도서관에서 ‘임시정부’로 검색했더니, 관련 학위 논문이 94건, 이 가운데 석사 논문이 67편, 박사 논문이 27편이었다. 임시정부 수립 100년이란 시점에서 돌아보면, 연구가 빈약하다고 볼 수 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자료 문제다. 임시정부가 길고긴 이동 여정을 거쳤고, 환국할 때 자료를 갖고 왔지만, 그마저 대부분 전쟁 때 분실해버렸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마지막 임시정부 거처가 된 충칭 시절의 자료마저 환국 후 전쟁을 겪으면서 대부분 분실했다. 저희 할아버지가 쓰신『한국독립운동사』뒷부분에 자료 망실 사정이 기술돼 있다. 기본적으로 자료가 너무 적다. 또 하나 꼽는다면 임시정부를 정부로 인정하지 않는 시각 탓도 있다. 북한이 그렇고, 뉴라이트 계열이 그렇다. 덧붙여 학제간 연구가 제대로 안 되고 있는 학계 풍토도 문제다. 임시정부 관련 연구는 종합적으로 고양될 필요가 있다. 역사, 정치,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의 협업이 요청된다. 여기에 독립운동에 대응한 일제의 제반 정책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Q. 올해는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의 해다. 감회가 새로울 것 같다.
“100주년이라 해서 뭐 특별하기보다 이를 계기로 그간 독립운동사 연구를 되돌아보고 그 역사의 의미를 짚어가면서 앞으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논의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많은 분들이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아직도 친일을 문제 삼느냐고 한다. 직업적 친일과 생계형 친일은 같지 않다. 사죄하면 끝나는데 사죄를 안 한다. 언제인가 자료를 보다가 깜짝 놀랐다. 친일파 후손들이 해방 후 유학 다녀와서 한국사회 지도층으로 재배치됐는데, 특히 이들은 ‘혼맥’으로 얽히면서 한국사회를 공고하게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아성이 앞으로 무너질 수 있을까? 절망적이다. 역사학자라면 기록으로 남겨둘 수밖에 없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역사의 심판’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게 항상 아쉽다. 재산 팔아 독립운동하느라 집안이 풍비박산 난 분들은 뭐란 말인가. 친일 논리가 횡행하면 나라에 정의가 설 자리는 없다.
한 가지 제안하고 싶다. 지금 독립운동 포상 신청을 했지만 계류 상태에 있는 건들이 너무 많다. 독립운동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를 제출하라는 것인데, 독립운동하면서 자료 챙겨서 하는 분들 있었겠나? 심지어 후손 입장에서는 할아버지의 독립운동 사실을 입증해서 포상받아야 명예를 회복하는데 자신이 무능해서 포상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다. 이런 생각으로 10여년 방방곡곡을 뒤지고 다니다가 울화병으로 돌아가신 분들도 있다. 무장투쟁, 첩보, 군자금 등과 관련된 분들이라면 더더욱 무슨 자료를 내놓을 수 있겠나. 포상금 안 줘도 명예를 드높여주는 방식으로 법안을 개정하면 된다.”


임시정부 관련 연구는 종합적으로 고양될 필요가 있다.
역사, 정치,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의 협업이 요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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