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   아마르티아 센의 학문적 위치와 시사점

목광수 서울시립대 교수·철학 :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미시간주립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으로는『처음 읽는 윤리학』,『정의론과 사회윤리』(공저) 등이 있다.

하버드대 경제학과와 철학과 교수인 아마르티아 센(1933~ )은, 학문이 분화되고 전문화된 현대 사회에서 보기 드물게 통합적 지평을 보여주는 학자다. 그는 경제학과 윤리학을 함께 연구해야 한다는 18세기 애덤 스미스의 전통을 계승해 ‘사회적 선택이론(social choice theory)’을 중심으로 하는 후생경제학을 연구해 1998년 아시아인으로서 처음으로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또한 그의 ‘역량 접근법(capability approach)’은 윤리학 영역에서 다양한 평가 기준과 가치 추구의 다양성을 이론화할 뿐만 아니라 실질적 토대를 제공해 다양한 학문 배경의 학자들이 논의할 수 있는 학제간 연구의 장을 마련했다. 센의 이러한 통합 정신이 고스란히 담긴 작품이 2009년 출판된 『정의의 아이디어(The Idea of Justice)』이다. 센은 평생, 사회적 선택이론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학과 역량 접근법에 입각한 윤리학을 연구해 왔는데, 이 책에는 이러한 두 영역의 연구가 정의 실현이라는 목적 아래 통합되어 집대성돼 있다. 더욱이 센은 동서양의 문학과 역사, 특히 자신의 고향인 인도의 철학과 역사를 활용해 논의를 풍성하게 하여 설득력을 높이고 있다.


롤스의 정의론과 대비되는 특징들
센은 이 책에서 존 롤스 정의론의 한계를 깊이 파고들어 비판하면서 대안으로 ‘비교적 정의론(the theory of comparative justice)’을 제시한다. 센의 비교적 정의론은 롤스로 대표되는 기존의 정의론과 적어도 세 가지 측면에서 내용상으로 대비되는 특징을 보여준다.
첫째, 센의 비교적 정의론은 부정의를 제거하면서 조금씩 정의로운 사회에 접근해 나가는 실천적이고 현실적인 전략을 제시한다. 기존의 정의론은 롤스의 정의론에서 잘 나타나는 것처럼, 가상적 계약 방식을 통해 완전한 정의에 입각한 정의로운 사회 체계를 제시하려는 초월적 제도주의의 특징을 공유한다. 센은, 이러한 방식은 정의 실현을 위해 불필요하다고 비판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초월적 제도주의 없이도 우리가 가진 도덕적 감각과 이성적 검토를 통해 노예제와 같은 명백한 부정의를 발견하고 제거하는 정의 실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센은 공적 추론을 통한 부분적 비교 방식을 통해 점진적으로 부정의를 제거해 나가면서 정의 실현을 추구해야 함을 강조한다.
둘째, 센의 비교적 정의론은 제도적 측면과 아울러 비제도적 측면에서의 정의 실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센은 롤스 정의론처럼 완전히 정의로운 이상적 제도를 마련하려는 초월적 제도주의는, 부정의를 제거하고 정의를 증진하려는 실천적 목적을 위해 충분하지 않다고 비판한다. 왜냐하면 설령 제도가 아무리 정의롭게 구현됐다고 하더라도, 해당 사회 구성원들의 부정적 태도와 인식이 여전하다면 해당 사회에서 정의 실현은 요원하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서 제기되는 부정의의 문제들은 사회 제도뿐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의 태도와 인식의 비제도적 영역에서 나타나는 자존감 훼손, 낙인찍기나 불인정, 혐오 등과 깊이 관련돼 있다. 센은 실질적 정의 실현을 위해서는, 사회 기본 구조와 같은 제도적 측면뿐만 아니라 사회적 규범들, 태도들, 관행들 등의 비제도적 측면에서의 정의 실현을 주목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셋째, 센의 비교적 정의론은 단일한 평가 기준과 가치 체계에 토대를 두는 기존의 정의론과 달리, 다양성을 포용할 수 있는 역량 접근법을 토대로 한다. 센의 역량 개념은 행위자가 실질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실현 가능한 상태와 행위를 성취할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한다. 이러한 실질적 자유는 인간의 다양한 환경과 자질 등의 조건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점에서, 역량 접근법은 다양한 평가 기준을 위한 이론적 토대를 마련한다. 이러한 센의 역량 접근법은 다양한 현실 세계에 맞게 부정의를 제거하는 기준과 방향성을 제시해 현실 세계에서 빈곤 타파, 교육 기회 확충, 보건의료 충족 등의 정책적 토대가 된다. 즉, 센의 역량 개념은 비교적 정의론을 구성하는 인권, 자유, 공적 추론인 민주주의 등과 밀접하게 관련돼 제도와 비제도적 측면의 통합적 역량 강화와 점진적인 부정의 제거를 통한 정의 실현의 이론적, 실천적 토대를 제공한다.
그렇다면 센의 비교적 정의론이 지니는 이러한 특징은 우리 사회에 어떤 의미를 제공할 수 있을까? 적어도 세 가지 함의를 가질 것으로 보인다.


한국사회에 주는 세 가지 시사점
첫째, 센의 비교적 정의론은 한국 사회에서 추구되는 정의 실현이 단번에 이뤄지는 유토피아적인 거대 담론이 아닌 조금씩 점진적으로 부정의를 제거하는 실질적 방식이 돼야 함을 역설한다. 한국 사회는 일제 치하와 독재 정부 시절 등의 길고도 암울한 역사로 인해 거대하고 신속한 변화에 대한 열망이 크지만, 센이 잘 보여주는 것처럼 이렇게 오랜 시간 부정의가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사회에서 제도를 단번에 변화시키려는 시도는 오히려 그 과정에서 다양한 목소리와 가치들을 배제하는 폭력이 될 가능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제도 실현 자체도 현실적으로 어려워 회의감과 실망감에 빠지기 쉽다. 센의 비교적 정의론은 한국 사회에서의 정의 실현을 위해 일상에서 긴 호흡을 가지고 한 걸음씩 꾸준히 부정의를 제거하는 삶을 살아가라고 우리를 격려한다.
둘째, 센의 비교적 정의론은 한국 사회에서의 정의 실현을 위해 제도뿐만 아니라 비제도적 측면에서도 주목하라고 권면한다. 최근 한국 사회에서 화두가 되는 많은 이슈들은 제도 개선만으로 이뤄질 수 없는 비제도적인 문화와 인식 등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예를 들어, 제도적으로 여성차별을 처벌하는 법이 있다고 하지만, 일상에 만연한 여성차별 관습과 인식은 여성들의 자존감을 훼손할 뿐만 아니라 법을 피해 교묘한 형태의 실질적인 차별 대우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센의 비교적 정의론은 정의 실현을 위해서는 제도뿐만 아니라 교육, 인식 전환 캠페인, 문화 개선 등 다방면의 전략을 추구해야 함을 역설한다. 센의 논의는, 제도를 개선했지만 정의를 실현하지 못하는 현실에서 좌절하고 실망하고 있을 사람들에게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이 무언지를 분명히 알려주어 꾸준히 비제도적 측면에서의 부정의를 제거할 용기를 준다.
셋째, 센의 비교적 정의론은 한국 사회에서의 정의 실현을 위해서는 열린 공평성을 가지고 다양한 목소리에 귀 기울일 것을 촉구한다. 한국 사회가 다름에 대해 포용하는 마음이 부족하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나오고 있다. 최근에 있었던 난민 문제, 혐오 문제, 통일 문제 등의 다양한 이슈들에 대한 논란은 서로 다른 양상으로 보일지라도 본질적으로는 우리 사회가 다름에 대한 열린 마음을 가지지 못했음을 보여주며, 나아가 열린 마음에 기초한 다양한 목소리를 나누지 못했음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센은 인간의 동기가 다양하며, 다양한 가치들과 이유들이 현대 사회에서 정당하게 제시될 수 있기 때문에 다양한 목소리를 제시하는 열린 공평성이 부정의 제거와 정의 실현에 필수적임을 강조한다. 센의 논의는 열린 마음을 갖고 다양성을 좀 더 포용하는 것이 정의를 실현하는 길임을 우리에게 안내한다.
센은 이 책을 연구자들만을 위해 쓰지 않았다. 이 책의 다양하고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들과 쉽고 명료한 글쓰기는 대중들에게도 센의 논의에 흥미를 갖고 읽게 하기에 충분하다. 연구자들에게는 깊은 학문적 울림과 상상력을, 운동가들과 행정가들에게는 탄탄한 이론적 근거와 구체적인 지침을, 대중들에게는 세상을 보는 혜안과 실천의 지혜를 제시할 이 책은 우리 시대의 고전으로 꾸준히 읽힐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센은 인간의 동기가 다양하며, 다양한 가치들과 이유들이
현대 사회에서 정당하게 제시될 수 있기 때문에 다양한 목소리를 제시하는
열린 공평성이 부정의 제거와 정의 실현에 필수적임을 강조한다.
센의 논의는 열린 마음을 갖고 다양성을 좀 더 포용하는 것이정의를 실현하는 길임을 안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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