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사상가 함석헌은 시「그 사람을 가졌는가?」(1947)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만 리길 나서는 길 / 처자를 내맡기며 /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시 속에 등장하는 ‘그 사람’을 가리켜 사람들은 진정한 친구라고 말한다. 친구란 그런 존재라는 뜻이다.
금란지교, 붕우책선, 죽마고우, 지기지우… 모두 친구의 의미를 강조한 사자성어다. 동양적 공부의 길에서는 이렇듯 친구 관계를 밝힌 표현들이 제법 된다. 비록 마테오 리치의『교우론』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긴 하지만, 연암 박지원이『열하일기』에서 친구를 가리켜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유일하고 고유한 존재’라고 표현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친구의 의미는 ‘동요’에서부터 무의식적으로 뇌리에 각인된다. 대중가요에 이르면 무수히 많은 ‘친구야’가 존재한다. 임영호가 부른「내 친구」(1969)에서부터 1970년대 김민기가 부른「친구」(1971), 최백호의「영일만 친구」(1979), 1980년대 조용필의「친구여」(1983), 2000년대 인순이가 부른「친구여」(2004) 등 스펙트럼은 넓고 깊다. 그만큼 친구는 대중적이면서도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닌 존재라고 할 수 있다.
혼밥·혼술에 사라진 친구
그런데 이런 친구상에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혼밥, 혼술, 혼영이란 말이 익숙해진 오늘의 세태는 친구의 의미마저 흔들리게 만들고 있다. 한 문학평론가는 오늘의 세계를 가리켜 친구의 의미가 퇴색한 시대라고 지적한다. “과거와 달리 사람들은 친구들과 나누던 것을 혼자 해결하고 있다. 혼밥, 혼영, 혼술 등 혼자 하는 삶이 필요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코로나19는 우리를 ‘홀로’ 있게 하는 데 익숙하게 만들었다. 친구는 마치 유물이 되어버린 것 같다.”
2017년의 자료지만 이런 진단을 뒷받침할 만한 데이터가 하나 있다. 2017년 4월 14일 온라인 취업사이트 알바몬이 대학생 1천99명을 대상으로 벌인 설문조사다.
흥미롭게도 이 설문조사에서 대학생 89.8%가 평소 혼밥, 혼영 등 혼자서 해결하는 것이 있다고 응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세부적으로 혼밥이 78.4%로 1위를 기록했고 혼공(혼자서 공부하기) 72.1%, 혼영(혼자서 영화 보기) 54.3%, 혼강(혼자서 강의 수강) 46.2%, 혼술 21.0%, 혼행(혼자서 여행하기) 19.3% 순으로 이어졌다.
특히 이들 대학생이 혼밥 등 평소 혼자서 행동하는 가장 큰 이유는 ‘다른 사람에게 신경 쓰고 싶지 않아서, 혼자가 편해서’(24.4%)였다. ‘친구들과 시간을 맞추기가 힘들어서’(22.8%)가 그 뒤를 이었다.
시간이 흐른 2021년의 상황에서 본다면, 이런 대답은 더욱 강화됐으면 됐지, 약화하진 않았을 것이다. 이른바 혼밥, 혼공의 시대다. 여기엔 친구가 끼어들 자리가 극히 적다.
과연 그럴까? 이 코로나19 시대에 친구는 낡은 유물과 같은 존재가 된 것일까? 확실히 방송대 문법으로 보면 좀 이상하다. 혼밥, 혼술의 시대가 됐지만, 방송대를 선택해 공부하는 일은 결코 ‘혼자’ 하기 어려운 그 무엇이 있다. 또 어떤 이들은 친구를 따라서, 친구의 권유로 방송대의 문을 두드리기도 한다. 과연 방송대인들에게 친구란 어떤 존재일까?
대학생 열에 일곱은 혼밥·혼공
좋은 친구의 의미 쇠퇴하는 시대
그래도 방송대에선 모두가
꿈을 공유하는 새로운 친구다

세대 초월한 방송대 친구들
“친구요? 전에는 초등학교나 고등학교를 같이 다닌 이들을 친구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사회생활하고, 다시 공부하면서 생각이 바뀌더라고요. 친구는 같은 공간에서 시간을 함께 지나온 사람이 아니라, 서로 다른 공간과 시간을 거쳐왔더라도 뜻과 지향점을 공유할 수 있는, 신뢰할 수 있는 이들이 친구 사이라고 생각하게 됐어요.”(중어중문학과 ㄱ학우)
“음, 친구가 있냐고 묻기보다는 누군가에게 어떤 친구가 됐냐고 묻는 게 맞지 않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누군가에게 나는 어떤 친구일까를 늘 생각하거든요. 맞아요. 요즘은 친구 관계도 많이 퇴색한 건 분명해요. 그렇지만 힘이 되고 용기를 주는 이들이 있어요. 저도 그런 친구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고요.”(농학과 ㄴ학우)
“방송대에 와서 놀랐어요. 같이 술 마시고, 고민도 털어놓고 하는 동창들은 아닌데도 뭔가 규정하기 어려운 그런 관계들이 있더라고요.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고, 내 일처럼 돕는 선배와 후배들이 있어요. 나이 터울도 제법 있는데 정말 고맙고 편안한 분들이죠. 저는 이분들을 친구라고 생각해요.”(경영학과 ㄷ학우)
“저는 사회생활 때 알게 된 친구 따라 방송대에 진학해 공부했어요. 친구가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나도 방송대에서 공부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이제는 제가 또 다른 친구에게 방송대 공부를 권하고 있더라고요.”(문화교양학과 ㄹ학우)
방송대에서 공부하는 이들은 ‘친구’를 퇴색된 단어로 생각하지 않는다. 이들은 10대 후반에서 80대까지 다채로운 세대 특성을 보여주는 방송대 학생층의 생물학적 나이보다, 이 다양한 세대가 온라인 공간에서 같은 공부를 하면서 서로의 미래를 격려해주는 상호 인정에 더 의미를 부여한다. 나이를 떠나 ‘친구 사이’가 될 수 있는 곳이 방송대라는 설명이다. 그래서 이들에겐 ‘혼공’, ‘혼강’이 없다. 외형적으로는 혼자서 공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두가 온라인으로, 각자의 스터디로 연결돼 움직인다. 방송대를 두고 친구 같은 대학교라고 말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시대는 변해도 우정의 의미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쓴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친구를 ‘탁월한 품성’을 기준으로 설명하면서 우정의 유형을 자기 이익을 위한 우정, 순전한 즐거움을 위한 우정, 완벽한 우정 등 세 가지로 정리한 바 있다. 완벽한 우정은 실용성과 즐거움과 같은 기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친구의 ‘탁월한 품성’에서 온다. 이런 친구 사이라면 삶을 공유하면서 힘들 때 서로 의지할 수 있는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런 우정론은 훗날 로마의 키케로에게로 계승된 것으로 보인다. 키케로 역시 “우정은 셀 수 없이 많은 장점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특별한 장점을 꼽으라면 바로 미래에 대한 밝은 희망을 비추어서 나약해지거나 절망하지 않도록 도와준다는 점이다. 진정한 친구의 얼굴을 통해서 우리는 제2의 자아를 볼 수 있다. 따라서 친구가 있는 곳에 나 자신이 존재한다”라고 말했다.
‘탁월한 품성’, ‘선의’의 아이디어는 알렉산더 네하마스 미국 프린스턴대 철학과 교수에게서도 엿보인다. 그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느리게 쌓여가는 우정이 ‘중요한 가치’라고 주장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정은 우리를 그냥 도와주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가 되고 싶어 하는 바를 이루도록 길을 인도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이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철학 한입』, 데이비드 에드먼즈·나이절 워버턴 지음, 석기용 옮김, 열린책들, 2012. 저자들은 다양한 철학자들을 인터뷰해 ‘~에게 …에 관해 듣다’ 25개 꼭지를 실었다. 이 중 ‘알렉산더 네하마스에게 우정에 관해 듣다’ 참조)
‘우리가 되고 싶어 하는 바를 이루도록 길을 인도한다’라는 이 표현은 세대를 초월한 친구들이 머리를 맞댄 이곳 ‘방송대’에도 그대로 맞아떨어진다. 세태 속의 친구는 퇴색했지만, 인생 제2막을 위해, 각자의 꿈을 향해 서로 연결된 방송대인은 서로를 격려하는 유쾌한 삶의 동행자들이 된다.






